“대통령이 기업인들의 노력에 대해 실질적인 도움을 주려고 애쓰는 것이 진심으로 느껴졌다.”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두산 회장)은 지난 8월28일 박근혜 대통령과 10대 그룹 회장단의 오찬간담회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재벌 총수들은 무엇 때문에 한껏 부풀었을까?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에 답이 있다. “경제민주화가 대기업 옥죄기나 과도한 규제로 변질되지 않고 본래 취지대로 운영될 수 있도록 하겠다.” “너무 많은 입법이 쏟아지고 있다. 경제에 찬물을 끼얹는 입법이 되면 문제가 심각하다. 규제를 위한 규제는 하지 않겠다.”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GS 회장)은 “기업들의 연간 투자·고용 계획이 차질 없이 이행될 수 있도록 기업 의견에 귀기울여달라”고 주문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고개를 끄덕였고 대선 공약인 경제민주화는 ‘사망 선고’를 받았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경제민주화 공약들 국회서 낮잠 </font></font>
대통령과 재벌 총수의 만남 이후 재벌 개혁 움직임이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는 것은 처음이 아니다. 이유는 한결같이 투자·고용 확대를 위해서다. ‘성장과 분배의 조화’를 대선 공약으로 내세운 노무현 정부가 그랬다. 노 대통령은 2003년 6월1일 재벌 총수들을 서울 종로구 효자동의 한 삼계탕집으로 불렀다. 당초 1시간35분으로 예정된 삼계탕 오찬은 40분 이상 연장됐다. 재벌 개혁을 천명하는 독전의 자리가 될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으나 정작 재벌과 손잡는 화해의 자리였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은 “노사관계가 국가경제를 희생시키거나 경제의 경쟁력을 해치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향후 1~2년 내에 전반적으로 산업경쟁력을 높이는 노사관계로 나아가기 위한 체계적이고 합리화된 방안을 만들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손길승 당시 전경련 회장(SK 회장)은 “삼성·LG 등 14개 기업이 올해에 26조원의 투자를 촉진하기로 했다”고 화답했다. 그 뒤 8월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노 대통령은 재계가 밀어붙인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를 공식 국정과제로 발표하고 재벌 규제를 대부분 풀어줬다.
앞서 김대중 대통령도 1999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재벌을 개혁하는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재벌들은 몸을 움츠리며 초긴장했지만 2000년 4·13 총선을 전후로 개혁 의지가 흔들렸다. 레임덕에 걸리자 급기야 2001년 말에는 출자총액제한제도를 누더기로 만들고 재벌들의 금융지배를 용인하며 사실상 ‘백기’를 들었다. 최정표 건국대 교수(경제학)의 분석이다. “대통령들은 선거 때는 유권자 표를 의식해 재벌 개혁을 외치다가 당선되면 재계의 극심한 저항과 로비에 곧 굴복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투항’은 전직 대통령들보다 한발 빨랐다. 취임 두 달도 되지 않은 지난 4월 경제민주화 입법 ‘속도조절론’을 들고나왔다. 여야가 한창 논의 중이던 대기업 일감 몰아주기 규제 법안에 대해 박 대통령은 “(내) 공약 내용이 아닌 것도 포함돼 있는데 무리한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고 말했다. 지난 7월10일 언론인과 만나서는 “(경제민주화 관련) 중점 법안들이 통과돼 거의 끝에 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제는 투자하고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해나가야 한다”고 했다. 박 대통령의 경제민주화 공약이 국회 상임위원회에서 제대로 논의조차 안 된 채 수두룩하게 쌓여 있는데도 말이다.
여론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재벌 총수의 경제범죄 엄단’ 관련 입법이 대표적이다. 재벌 총수의 중대 범죄에 대해선 집행유예형을 불가능하게 하고(특정경제가중처벌법 개정안), 형이 확정된 뒤에는 대통령이 사면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안(사면법 개정안)이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잠자고 있다. 재벌의 신규 순환출자 금지(공정거래법 개정안)도 그렇다. 재벌 총수 일가가 몇%의 지분으로 그룹을 지배하는 기존 순환출자는 그냥 놔두더라도 새로운 순환출자는 제한하자는 데 이견이 없다. 그러나 재계가 “헐값에 외국 투자자본에 매각될 수 있다”고 ‘협박’해 관련 법은 정무위원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 재계의 과장된 경영권 위협론 </font></font>법무부가 입법 예고한 상법개정안도 비슷한 운명에 처해 있다. 쟁점은 감사위원 분리선출과 집중투표제다. 감사위원 분리선출이란 자산 2조원 이상 상장회사(146곳)의 감사위원을 맡을 이사는 다른 이사와 분리해 선임하도록 해 대주주 의결권을 최대 3%까지만 허용하는 제도다. 감사위원의 독립성을 높여 대주주의 전횡을 감시·견제하겠다는 취지다. 집중투표제는 1주당 1표만 주는 현행 방식과 달리, 이사 3명을 선출하면 3표, 5명을 선출하면 5표를 주는 것이다. 그러면 소액주주가 연합해 원하는 이사를 선임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재계는 상법개정안으로 외국 투기자본에 의한 경영권 위협을 초래할 수 있다고 반발한다. 배상근 전경련 경제본부장은 “감사위원 선임시 대주주 의결권 제한은 외국에 유례가 없고, 기업의 경영권 방어를 위한 과도한 자금 투입으로 투자·고용의 위축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참여연대 시민경제위원회는 이렇게 반박한다. “감사위원 분리 선출은 새로운 규제 도입이 아니다. 이명박 정부 초기인 2009년 상법 개정으로 본래 기능을 상실한 감사위원 제도를 회복하는 일이다. 재계는 실재하지 않는 위협을 과장되게 내세우고, 무엇보다 잘못한 경영에 책임이 있는 경영진을 교체하도록 한 주식회사 제도의 본질을 왜곡한다.” 국내 상장회사의 이사 수는 평균 9명인데 법상 최소 3명 이상 선출해야 하는 감사위원에 모두 반대 세력이 선임돼도 경영권이 넘어가지 않는다. 더구나 이사 임기를 서로 달리하는 ‘시차임기제’를 허용한 상황이라서 경영권 위협 가능성은 더욱 낮아진다. 오히려 총수가 절대 권한을 행사하는 지배체제(이사회)에 총수의 통제 밖에 있는 독립적 인사가 단 1명이라도 들어오는 걸 용납할 수 없다는 게 재계의 속내다. 채이배 경제개혁연구소 연구위원은 “최근 총수들이 구속 기소 또는 실형 선고를 받은 CJ·SK·한화의 배임·횡령 사건의 근본 원인도 이사회가 총수를 견제·감시하는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 공약과 국정과제로 약속한 상법개정안을 수정할 뜻을 내비쳤다.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상법개정안에 대한 (재계의) 우려도 잘 알고 있다. 그 문제는 정부가 신중히 검토해서 많은 의견을 청취해 추진할 것이다.”(8월28일 10대 그룹 회장단과의 간담회) 재계는 또다시 투자·고용 확대라는 ‘당근’을 앞세웠다. 전경련은 올해 30대 그룹의 투자 규모를 애초 계획보다 5조9천억원(4%) 늘어난 154조7천억원으로, 고용 규모를 1만3천 명 늘어난 14만7천 명으로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현실화될지는 미지수다. 올해 초 30대 그룹은 연간 148억8천억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지만 상반기 투자 실적은 61조8천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69조원)보다 되레 10.4% 줄었다. 지난해에도 연간 151조원 이상 투자하겠다고 발표했으나 실제 투자 실적은 138조2천억원에 그쳤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 처음으로 돌아가기엔 이미 늦었나</font></font>신규 채용 계획도 곧이곧대로 믿기 어렵다. 14만7천 명이라면 우리나라 전체 신규 취업자 수의 25~30%에 이르는 수치이기 때문이다. 실제 채용 규모는 발표된 수치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게다가 한국은행 통계를 보면, 국내 사업의 매출 10억원당 평균 고용인원(취업유발계수)은 2011년 기준으로 7.3명이지만, 10대 그룹의 취업유발계수는 0.78명에 불과하다. ‘대기업의 투자 확대가 고용을 늘리고 성장률을 높인다’는 낡은 패러다임이 이미 수명을 다한 지 오래라는 얘기다. 투자·고용 확대를 앞세워 권력이 재벌과 손잡는 명분을 제공할 뿐이다.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의 진단이다. “재벌에 투자를 구걸하는 순간 개혁은 끝이다. 힘의 균형추가 재계 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다. 경제민주화는 단순히 분배 구조를 개선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경제성장 전략의 토대이기도 하다. 재벌의 불평이 늘더라도 중견기업·중소기업·벤처기업의 투자가 활성화되는 것이 중요하다. ‘갑’이 불편해지는 대신 ‘을’이 제 몫을 찾고 성장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 재계와의 첫 회동에서 약속한 ‘중소기업 대통령’을 되새겨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대통령 선거를 치른 지 7일 만인 12월26일, 박 대통령은 전경련을 방문하기에 앞서 중소기업들의 연합체인 중소기업중앙회와 소상공인단체연합회를 먼저 찾아갔다. “기존 경제정책이 대기업과 수출에 의존하는 외끌이였다면 이제는 대기업·중소기업, 수출·내수가 함께하는 쌍끌이로 가겠다. 경제가 살려면 중소기업이 잘돼야 한다. 중산층 70% 복원 약속도 중소기업인과 소상공인이 중심이다.” 반면 재벌 총수들과 만난 전경련 자리에선 “대기업도 이제 변해야 한다. 이윤 극대화에만 혈안이 될 게 아니라 공동체 전체와의 상생을 추구해야 한다”고 쓴소리를 던졌다. 처음으로 돌아가기엔 이미 늦은 것일까?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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