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공단은 우리가 지킨다.’
지난 4월30일 오전 서울 무교동 효령빌딩 6층 개성공단기업협회 사무실 벽에는 이렇게 적힌 펼침막이 내걸려 있었다. 비좁은 사무실에는 이미 취재진 10여 명이 몰려와 있었지만, 분위기는 사뭇 가라앉은 채였다. 출입구 옆 프린터로 소박하게 출력해 붙여놓은 종이가 눈길을 끈다. ‘출입제한 28일째, 조업중단 22일째.’
“길만 있다면, 어떻게든 (개성으로) 가보겠지만…. 기업이 무슨 힘이 있습니까?” 2008년 개성공단에 입주한 의류업체 에스앤지(S&G)의 정기섭 회장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는 “(개성공단 출입이 제한된) 지난 4월3일 이후 만취하지 않고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어제 오랜만에 술을 마시지 않았더니, 밤새 뒤척였다”며 웃었다. 정 회장은 “이대로 공단이 폐쇄되면 입주기업 절반은 도산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북이 해도 너무하지만, 그런다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응하면 관계를 풀 수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정 회장과 나눈 1시간30분 남짓한 대화를 정리했다.
<font color="#1153A4"><font size="3">“우리라면 파주에 공단 조성하겠나?”</font></font>
2005년 9월 본 단지 1차 분양 때 토지를 분양받았다. 북에 투자하기로 결심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한 1년6개월 정도 공장 건설공사 착공을 미루면서 망설였다. (2006년 10월) 1차 핵실험 때도 공단엔 별 문제가 없더라. 2007년 5월 공사에 들어가 2008년 7월 초 입주했다. 1만5600m²(약 4700평) 토지에 90억원을 투자해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단단하게 짓다보니, 공사가 길었다. 그만큼 장기적 전망을 갖고 들어갔다.
입주 시기가 좋지 않은 것 같다.말해 뭐하나. 들어가자마자 금강산에서 박왕자씨 피격 사건이 터졌다. 남북관계가 험악해지기 시작하더라. 입주 5개월 만인 2008년 12월엔 북쪽에서 남쪽 상주인력을 확 줄이는 ‘12·1 조치’를 단행했다. 의류공장은 노동자들이 숙련되기 전까지는 생산성이 올라가지 못한다. 그 무렵 기술교육이 한창이었는데, 기술진이 개성에 오래 머물지 못해 차질이 많았다. 공장 정상 가동까지 기간도 많이 걸리고. 북쪽에선 기업과 정부를 별개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그들 사회엔 사기업이 없지 않나. 당국 사이에 불만이 있으면, 그걸 기업에 쏟아낸다.
사업을 해보니 어떻던가.북에 간 것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노동력 때문이었다. 투자비나 건축비 등은 남쪽보다 더 든다. 그런데 인력 공급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우리 회사만 해도 공장을 정상적으로 가동하려면 2070명 정도가 필요한데, 배정받은 건 960명 수준이다. 그나마 40살 이상이 절반 가까이 된다. 그래도 입주 3년차부터는 수익이 나더라. 이번 위기를 잘 넘기면, 여전히 매력적인 투자처다. 적정인력을 모두 보충받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서 역외가공지역으로 인정돼 미국 수출길까지 열리면 연간 500억원 정도는 매출을 올릴 수 있다고 판단한다.
이번 사태 이전까지 개성공단에 대한 북쪽 반응은 어땠나.솔직히 ‘속았다’는 얘기를 많이 하더라. 원래 개성공단은 2천만 평 규모로 개발하기로 했다. 그 가운데 800만 평 정도는 남쪽 중소 제조업체가 입주하기로 했다. 1960~70년대 남쪽이 한창 경제개발을 하던 시절처럼, 북쪽에서도 50만~60만 명의 노동자가 개성공단에서 일하면 먹고살 만하다고 판단했을거다. 입장을 바꿔, 우리라면 경기도 파주의 최전방 지역에 배치된 2개 사단 병력을 후방배치하고 북쪽 기업이 입주하는 공단을 조성하겠나? 우회를 하지 않으면, 개성공단은 비무장지대(DMZ)에서 1km 정도 떨어져 있다. 북 군부가 반대하는 건 당연했다.
지난 4월8일 공단 잠정폐쇄 조치를 결정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보는가.개성공단은 북쪽 공단이다. 경쟁력 있는 공단으로 키우는 것도 북쪽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번 일도 발단은 북쪽이 군사·안보적 측면에서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문제는 이걸 어떻게 풀어가느냐인데, 걱정이 크다. 모든 일에는 명암이 있지 않나. 지금 정부의 영향력 있는 자리에 있는 분들이, 밝은 쪽보다는 어두운 점만 확대해서 보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
<font color="#1153A4"><font size="3">“쑥 캐 ‘연명했다’ 얘기는 우스개”</font></font>지난 4월25일 정부가 북에 대화를 제의했는데.
솔직히 박근혜 대통령이 미인으로 보이더라. (웃음) 우리는 군사훈련은 훈련이고, 개성공단은 개성공단이고, 대화는 대화다라고 생각한다. 북은 그게 아니다. 다 한 덩어리로 본다. 박근혜 대통령이 말한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구상은 맞다고 본다. 북을 올바른 방향으로 끌어내야 하는데, 지금은 대화가 단절된 상황 아니냐. 배척하지 말고, 진정성을 느끼게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 호의를 갖고 허심탄회하게 대화에 임해야 결실을 맺을 수 있다.
하지만 북이 대화를 거부했고, 정부는 잔류 인원 철수로 맞섰다.4월25일은 북쪽의 창군절이다. 휴일에 대화 제의를 해놓고 24시간 안에 답하라는 건 ‘숨은 의도’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개성 주재원들이 겪고 있는 ‘생활의 참상’도 박 대통령께 잘못 전달된 것 같다. (웃음) 먹을 게 없어 쑥을 캐다 먹는다거나, 신변도 불안한 상태고 언제 인질이 될지 모른다는 얘기까지 나오지 않았나. 대통령으로선 국민 보호가 최우선이었을 테니, 철수 결정을 내린 것도 당연하다. 사실 위성방송을 통해 남쪽 텔레비전도 보고, 채소·과일·고기 등 신선식품을 빼고는 식량도 넉넉한 편이었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다면, 아무리 직장이라도 누가 거기 머물겠나? 잘못된 상황 판단으로 내린 결정이긴 하지만, 우리도 개성공단을 포기할 수 있다는 신호를 북에 준 것은 역설적으로 긍정적 측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식량 부족에 대한 언론 보도가 잇따랐는데.봐라. 회사에 따라 2교대로 심야근무를 하는 데가 있다. 출퇴근 거리가 멀다보니, 저녁 8시가 넘으면 차라리 밤 10시나 11시까지 일을 시킨 뒤 회사에서 재우는 경우도 있다. 일부 인원이지만, 이들의 저녁과 아침을 해결해줘야 한다. 우리 회사도 쌀 20kg짜리 10∼20포씩은 갖다놓는다. 한꺼번에 많이 갖다놓으면 북으로 식량을 보낸다고 하니까.(웃음) 쑥을 캐 ‘연명했다’는 얘기도 우스개다. 공단 한가운데에 개울이 흐르는데, 개울가 둑방에 쑥과 나물류가 많이 난다. 거기가 청정지대 아니냐. 나도 개성에 머물 때 할 일 없는 일요일에는 쑥을 뜯고 그랬다.
개성에 남은 직원은 없나.정부의 철수 결정이 납득되지는 않지만, 수용은 했다. 끝까지 남았던 법인장 1명이 마지막으로 4월27일 귀환했다. 한 달 만에 만났더니 눈물이 나더라. 그 친구(법인장)가 사실은 35일 만에 나오는 거다. 심하진 않지만 당뇨가 있어 한 달에 한 번씩 약을 지어 먹는데, 약이 떨어지고 열흘이 지나서 걱정이 많았다. 다행히 남는 시간에 공도 차고 해서 평소보다 건강해 보이더라. (웃음)
<font color="#1153A4"><font size="3">‘비렁이(거지)끼리 자루 찢는다’는 말</font></font>정부가 지원대책을 내놓고 있는데.지금은 ‘피해보상’을 입에 올릴 때가 아니다. 어떻게든 정상화해야 한다. 정부가 마음 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본다. 인내심을 갖고 지속적으로 대화를 해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북이 해도 너무하지만, 그런다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으로 대응하면 관계를 풀 수 없지 않느냐. 이대로 공단이 폐쇄되면 123개 입주기업 가운데 절반은 도산을 피하기 어렵다. ‘비렁이(거지)끼리 자루 찢는다’는 말이 있다. 서로 다 갖겠다고 싸우다가, 자루가 찢어져 애써 구걸해온 음식이 땅바닥에 떨어진다는 얘기다. 북과 남이, 물론 처지는 다르다. 하지만 이렇게 싸워 대체 뭘 얻겠나.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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