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죄지은 회장님은 재판 구경 중

등록 2013-01-26 10:08 수정 2020-05-03 04:27

범죄 혐의자가 모두 처벌을 받는 것은 아니다. 혐의가 있더라도 증거가 부족하면 법원에서 무죄 선고가 나온다. 하지만 법원의 유무죄 판단이 나오려면 전제조건이 있다. 검찰이 기소하는 것이다. 어떤 범죄 혐의자라도 검찰이 기소하지 않으면 법원이 처벌할 방법이 없다. 기소권을 대한민국에서는 검찰이 독점하고 있어서다. 검사 출신 변호사가 검찰 수사 단계에서 잘 팔리는 이유기도 하다. 이들은 범죄 혐의자가 기소되지 않도록 힘쓰는 역할을 맡는다. ‘유전무죄’는 법원보다 검찰에서 더 통용된다고 법조인들은 말한다. 검찰의 ‘기소하지 않는 힘’을 한번 경험해보자.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0부(재판장 설범식)는 지난 1월16일 이른바 ‘신한 사태’와 관련해 횡령 등 혐의로 기소된 신상훈(65) 전 신한금융지주 사장과 이백순(61) 전 신한은행장에게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2년씩을 선고했다. 신한 사태란 2010년 9월 신한은행이 두 회사에 900억원 이상을 부당 대출(배임)하고 이희건(2011년 사망) 명예회장의 경영자문료를 가장해 은행 돈 15억6600만원을 횡령했다고 신 전 사장을 고소한 사건이다. 검찰은 당시 4개월의 수사 끝에 배임 438억원, 횡령 15억6600만원에 재일동포 주주들에게 8억6천만원을 받았다며 신 전 사장을 기소했다. 고소를 지휘한 이백순 전 행장도 검찰 수사 과정에서 3억원을 신 전 사장과 함께 횡령하고 재일동포 주주에게 5억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됐다.
하지만 재판부는 “정상적인 대출 과정”이라며 신 전 사장의 배임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고, 횡령 혐의에 대해선 2억6100만원만 유죄라고 밝혔다. 그것도 “라응찬과 이백순을 위해 은행 돈을 사용했다”는 이유를 들었다. 그런데 은행 돈의 ‘수혜자’라고 밝혀진 라응찬(75) 전 신한지주 회장은 왜 법정에 서지 않았을까? 이 입수한 검찰 수사 기록과 재판 기록, 판결문을 통해 재구성해본다.

‘유전무죄’는 법원보다 검찰에서 더 잘 통용된다고 법조인들은 말한다. 검찰에 기소된 신상훈 전 신한지주 사장(왼쪽)과 이백순 전 신한은행장(가운데). 라응찬 전 신한지주 회장은 검찰에 소환됐지만 검찰이 기소하지 않아 법정에 서지 않았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한겨레 이종근 기자

‘유전무죄’는 법원보다 검찰에서 더 잘 통용된다고 법조인들은 말한다. 검찰에 기소된 신상훈 전 신한지주 사장(왼쪽)과 이백순 전 신한은행장(가운데). 라응찬 전 신한지주 회장은 검찰에 소환됐지만 검찰이 기소하지 않아 법정에 서지 않았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한겨레 이종근 기자

검찰 금융실명제 위반 수사가 사태의 시작

2008년 12월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라응찬 회장을 금융실명제법 위반으로 수사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을 파헤치다가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에게 라 회장이 50억원을 건넨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50억원에 대해 라 회장은 1991년 신한은행장으로 선임될 때 이희건 명예회장이 행장직을 잘 수행하라고 30억원을 줬는데, 그 이자가 붙은 것이라고 해명했다. 라 회장의 진술을 계기로 검찰은 이 명예회장의 전체 금융계좌를 뒤지기 시작했다.

혐의 하나. 금융지주회사법 위반

검찰 수사가 확대되자 신한은행은 다급해졌다. 신상훈 당시 은행장은 라 회장 수사에 대한 법률자문자로 김아무개 변호사를 선임하고 변호사 비용 3억원을 갖다주라고 비서실에 지시했다. 변호사 비용을 마련하지 못한 은행 비서실은 신한은행 재일동포 주주인 양아무개씨에게 부탁했고 양씨가 3억원을 내주었다. 양씨는 법정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3억원을 빌려간 당사자는 라응찬 회장 아닌가. (돈을 빌려준) 다음해(2009년) 설 이후 회장실에서 (라 회장으로부터) 직접 ‘신세 많이 졌습니다.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들었다.” 3억원을 마련한 이아무개 비서실장도 “라 회장이 해결하리라 생각했다”고 법정에서 진술했다.

2009년 4월 검찰의 소환조사가 임박하자 라응찬 회장은 5억5천만원을 내고 법무법인 태평양을 선임한다. 하지만 신한지주 부사장 위아무개씨는 라 회장을 위해 변호사를 추가로 선임해야 한다며 김아무개와 유아무개 변호사를 추천했다. 착수금 1억원에 성공보수 1억원이 각각 책정됐다. 착수금(2억원)은 라 회장이 댔지만 성공보수(1억5천만원)는 또 다른 재일동포 주주인 이아무개씨가 지원했다.

“사용처는 라응찬의 변호사 비용”

금융기관의 임직원은 직무와 관련해 직접이든 간접이든 돈을 받아서는 안 된다. 금융지주회사법 위반이다. 신상훈 전 사장과 이백순 전 행장이 1심 재판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은 것도 재일동포 주주에게서 2억원, 5억원을 각각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재일동포 주주에게서 변호사 비용을 지원받은 라 전 회장은 어떨까? 재판부는 “교포 주주가 자금을 교부한 상대방이 라응찬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라 전 회장은 유죄가 아니다. 검찰이 아예 기소하지 않았기 때문에.

라 전 회장의 해명은 이렇다. “신상훈 사장이 여러 차례 추가로 변호사를 선임하는 게 좋겠다고 말하면서 변호사 비용은 자신이 대겠다고 했다. 내가 만류하며 거절했다. 성공보수를 지급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 또 신상훈 사장이 여기저기서 끌어온 돈으로 변호사 비용을 집행했다는 사실도 보고받지 못했다.”(2010년 11월30일 피의자 신문조서에서) 라 회장은 상당한 재력가다. 당시 검찰 조사에서 그는 △80평형 아파트(9억원) △신한금융지주 20만5425주(90억원) △골프회원권 4개(5억원) △저축성 및 투자성 예금 80억∼90억원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혐의 둘. 횡령

변호사 비용으로 라 전 회장은 개인 자금 7억5천만원을 썼다고 검찰에서 진술했다. 또 신한은행이 재일동포 주주에게서 끌어모은 4억5천만원도 별도로 라 전 회장의 변호사 비용으로 사용됐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또 다른 2억원이 채아무개 변호사에게 건네졌다. 이 돈은 신한은행 부행장 3명과 비서실장이 6천만원과 2천만원을 갹출해 우선 대납했다. 그러고는 나중에 은행 비서실에서 관리하던 이희건 명예회장의 경영자문료에서 충당했다. 마지막으로, 검찰 수사가 끝난 2009년 5∼6월에는 라 회장의 수사 과정에서 애쓴 사람들에게 답례한다며 7500만원어치의 상품권을 은행 돈으로 샀다. 당시 은행장은 이백순 행장이었다. 하지만 검찰은 신 전 사장만 횡령 혐의로 기소했다. 재판부는 “신상훈 피고인이 2009년 3월17일 신한지주 사장으로 옮긴 뒤 한참 지난 시점이고 사용처도 라응찬의 변호사 비용”이라며 무죄를 선고했다.

라 전 회장의 반박을 다시 들어보자. “명색이 신한금융그룹의 회장인데 신한은행 부행장들에게 몇천만원씩 갹출해서 개인 형사사건의 변호사 비용을 만들어오도록 하고 이를 ‘명예회장님 경영자문료’ 명목의 법인자금으로 메꾸어 보전·정산하도록 지시할 수는 없다. 신상훈 사장이 나를 돕고자 했다면 개인 돈으로 도와야 하고 당연히 내가 추후 정산해줘야 한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2010년 11월30일 피의자 신문조서에서)

SD에게 갔다는 ‘남산 3억원’의 등장

변호사 비용 14억원을 쏟아부은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라응찬 회장이 박연차 회장에게 건넨 50억원은 재일동포 4명의 차명계좌로 운영했지만 비자금은 아니라고 검찰은 결론 냈다. 이자와 함께 박 회장이 반환했기에 라 회장의 개인 투자금이라는 거다. 개인 투자금이라는 이유로 돈의 출처는 조사하지 않았다. 검찰은 “금융실명제법 위반은 과태료 사안으로 형사처벌 법규가 없다”고 했다. 검찰의 ‘면죄부’를 받은 라 회장은 2010년 3월 4연임에 성공했다.

사건은 그렇게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2010년 7월 주성영 한나라당 의원이 국회에서 라 회장의 50억원을 검찰이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민주당은 국정감사에서 “라 회장이 경북 상주 출신 모임인 ‘상촌회’(상주촌놈회)의 보호를 받는다”고 주장했다. 라 회장은 국회를 움직이는 손으로 신상훈 사장을 지목했다. 라 회장이 4연임에 성공하자 ‘넘버2’인 신 사장이 라 회장의 등에 칼을 꽂으려 한다는 의심이 나돌았다.

946호 신한은행 사태 일지

946호 신한은행 사태 일지

혐의 셋. 정치자금법 위반

2010년 9월, 마침내 신한 사태가 터졌다. 신 사장을 검찰에 고소하기 직전에 라 회장과 이백순 행장은 신 사장에게 자진 사퇴를 종용했다. 하지만 신 사장이 거부했다. 명예회장의 경영자문료를 검찰이 뒤지자 ‘남산 3억원’이 튀어나왔다. 라 회장의 지시로 이상득 전 한나라당 의원에게 불법 정치자금 3억원이 건네졌다는 증언이다. 그 자금을 조성해 전달하는 데 참여한 행장 비서실 직원의 입을 통해 나왔다.

이백순 당시 신한지주 부사장이 라 회장의 지시라며 2008년 2월20일 아침 6시에 서울 중구 장충동2가 남산자유센터 웨딩홀 주차장으로 현금 3억원을 가져오라고 했다. 비서실 직원은 현금 3억원을 신속히 마련하려고 재일동포 주주 2명과 신상훈 행장의 계좌에서 우선 돈을 인출해 해결했다. 그리고 나중에 명예회장의 경영자문료에서 2억6100만원을 정산해줬다. 비서실 직원은 재판 과정에서 “신한 사태 이후 ‘그 돈이 SD(이상득 전 의원)에게 갔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이런 사실을 라응찬 전 회장이나 이백순 전 행장은 부인한다. 그런 지시를 하지도 않았고, 돈가방이 건네진 장소에도 간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검찰은 명예회장의 경영자문료에서 3억원을 빼내는 데 이백순 행장도 관여했다고 보고 신 전 사장과 함께 그를 횡령 혐의로 기소했다. 재판부도 남산 3억원이 라 전 회장의 지시로 이 전 행장을 통해 제3자에게 전달됐다고 판단했다. “신상훈 피고인이 라응찬과 이백순을 위해 은행 돈을 사용했다”는 표현이 그래서 나온다. 하지만 “이백순 피고인은 남산 3억원이 전달될 무렵 돈의 출처(경영자문료)를 알았다고 볼 아무런 증거가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남산 3억원을 전달한 사람(이백순)은 무죄, 나중에 보고받은 사람(신상훈)은 유죄로 운명이 엇갈린 것이다. 그렇다면 지시한 라응찬 전 회장은? 검찰이 기소하지 않아 또다시 형사처벌을 피해갔다.

운전하고 헬스클럽 다니는데 ‘알츠하이머’

라응찬 전 회장은 증인으로 법정에 나오지도 않았다. 신상훈 전 사장과 이백순 전 행장의 사건에 수없이 등장해 재판부가 검찰 쪽 증인으로 세 차례나 출석을 요구했는데도 말이다. “신한은행 사건에 따른 충격으로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치료 중”이라고 불출석 사유를 밝혔다. 알츠하이머병은 치매를 일으키는 뇌질환이다. 이후 라 전 회장이 직접 운전하며 호텔 헬스클럽을 다니는 모습이 언론 보도로 알려져 논란을 빚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검찰을 비판했다. “검사는 증인이 출석하도록 합리적인 노력을 아니한 채 라응찬이 치매에 걸렸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한 의무기록증명서만 제출하고 증인 신청을 철회했다. 라응찬이 헬스를 하거나 개인 사무실에서 책을 보는 등 국내에서 정상적으로 생활하는 사실이 인정된다. 법정에서 진술하기 어려운 건강 상태라는 검찰의 주장은 소명되지 않았다.”

검찰의 ‘직무유기’를 바로잡을 방법은 없는 것인가.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