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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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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옛적 나쁜 놈들 전성시대

등록 2013-01-15 20:42 수정 2020-05-03 04:27

김태촌이라는 이름이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78년이다. 그해 4월14일 서울시경은 ‘칼잡이 폭력 전과자들로 구성된 조직폭력단’ 두목 김태촌과 그 일당을 범죄단체 조직 등의 혐의로 구속했거나 수배 중이라고 밝혔다. 폭력단 이름은 ‘광주 서방파’였다. 김태촌의 광주 서방파는 이후 ‘전국 제패’를 시도하며 광주라는 지역명을 떼고 서방파로, 조직폭력계 재편 이후에는 범서방파로 불렸다.

조직폭력배들이 으레 하는 용·호랑이 등의 화려한 문신은 1980년대 초반부터 부산 지역 폭력조직을 통해 급속하게 들어온 일본 야쿠자 문화라고 한다. 예전 우리 조폭들은 忍耐(인내)·王(왕) 등 단순한 글자나 그림을 몸에 새겼다. 한겨레 자료 사진

조직폭력배들이 으레 하는 용·호랑이 등의 화려한 문신은 1980년대 초반부터 부산 지역 폭력조직을 통해 급속하게 들어온 일본 야쿠자 문화라고 한다. 예전 우리 조폭들은 忍耐(인내)·王(왕) 등 단순한 글자나 그림을 몸에 새겼다. 한겨레 자료 사진

217개 조직 5384명 조폭들 관리 대상

김태촌씨가 지난 1월5일 새벽 64살의 나이로 숨졌다. 언론은 그의 부음 기사에 ‘80년대 암흑계 최대 보스’ ‘3대 조폭 보스’ ‘조폭 대부’ ‘범서방파 두목’이라는 시커먼 수식을 얹었다. 남에게 칼을 잘 썼지만 그의 죽음은 ‘칼침’과는 거리가 먼 패혈증 때문이었다. 일부에서는 “언론이 키우고 만들어낸 조폭 대부”라는 평가도 있다.

김씨가 숨졌지만 여전히 ‘범서방파’는 경찰의 ‘관리 대상 조폭’에 해당한다. 관리 대상 조폭은 ‘수괴급’으로 전과가 있고 조직활동 우려가 있는 이들이 주로 포함된다. 신흥 조직의 경우 조직 결속 정도와 지속성 등이 관리 대상 기준이 된다. 분기별로 행동대장급과 전체 조직원들의 동향을 파악한다. 2012년 기준으로 전국에는 217개 조직 5384명의 조폭들이 관리 대상에 올라 있다. 2011년에는 220개 조직 5451명으로 파악됐다. 비관리 대상 조폭은 이보다 몇 배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범서방파는 서울강남경찰서 관할이다. 강남서 관할에는 송정리파와 대흥동파도 있다. 이 입수한 2000년대 후반 ‘각 지방청별 조직폭력배 현황’ 보고서에는 서울지방경찰청 관리 대상 항목 아래 범서방파 동향 보고서가 수록돼 있다. 계보(두목·부두목·행동대장·행동대원), 전과, 출소자 동향(유흥업·유통업·무직 등), 조직원 최근 동향 등이 빼곡하게 정리돼 있다. ‘심장혈관 2개가 막혔다’ ‘폐절개 부위 통증으로 당분간 대외활동 어렵다’ 등 두목 김태촌의 병원 치료 동향은 물론, 조직원들끼리 접촉 여부, 행동대장들이 운영하는 식당이나 호텔 신축 상황 등이 자세히 정리돼 있다. 배반자로 찍힌 누군가가 일정한 직업 없이 조직원들을 피해다닌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경찰과 검찰의 수사기록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김태촌의 삶은 이렇다. 그는 1948년 10월10일 전남 광주 우산동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동네에서 주먹 좀 쓰는 형들과 어울렸다. 눈빛 매섭고 주먹 잘 쓰고 깡까지 좋은 그는 금방 눈에 띄었다. ‘광주 서방파’ 두목 김아무개 밑으로 들어가 행동대장이 됐다. 서방파라는 이름은 두목 김아무개의 출생지인 전남 광산군 서방면에서 따왔다. 죽을 때까지 김태촌을 따라다닌 ‘서방파’라는 딱지는 애초 그의 것이 아니었다.

김씨는 1974년 서울로 올라간다. 김씨는 전남 목포 출신 박아무개가 두목으로 있던 ‘번개파’ 밑으로 들어갔다. 1970년대 초반 서울은 명동·충무로·을지로 바닥을 헤집고 있던 신상현의 ‘신상사파’가 꽉 쥐고 있었다. 영등포 삼일당(맘보)파, 청량리(국필이)파 등도 ‘나와바리’(구역)를 지키고 있었다. 여기에 호남 출신 주먹들이 등장하며 세를 키우기 시작했다. ‘호남파’에는 이후 김씨의 ‘숙적’이 되는 조양은이 1970년에 먼저 올라와 몸담고 있었다.

서울의 중원은 신상사파가 차지하고 있었지만 호남 출신 폭력배들 역시 명동과 무교동을 중심으로 세를 넓혀갔다. 갈등은 피를 불렀다. 1971년 1월2일 야구방망이를 쥔 조양은 등 범호남파 특공대 4명이 신상사파 본거지였던 명동 사보이호텔 커피숍을 습격한다. 두드려맞은 신상사파는 위상과 세력이 급격히 추락했고 호남파가 그 빈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숙적 조양은과 죽을 때까지 이어진 악연

김태촌은 상경 2년 뒤인 1976년 3월 호남파 두목 오아무개의 허벅지를 칼로 찌른다. 신상사파가 무너진 뒤 범호남 세력 간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무교동 엠파이어호텔 후문 주차장에서의 1차 습격이 실패하자, 바로 그날 2차 습격을 시도했다. 태평로 국제호텔 옆 골목은 피로 물들었다. 이를 계기로 김씨는 조직폭력계의 신흥 강자로 떠오른다. 이 사건은 라이벌 조양은의 입지도 함께 굳혀놓는 계기가 됐다. ‘모시던’ 두목이 김씨에게 당하자 조양은이 실질적인 보스가 된다. 조양은은 두목에 대한 보복으로 1976년 4월 중구 태평로 아시아호텔에서 김태촌 일파를 공격한다. 김씨가 죽을 때까지 이어진 숙적 관계의 시작이다.

김씨는 번개파가 아닌 ‘서방파’로 독자적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조양은도 무교동·명동 일대 다운타운호텔, 백남호텔, 조선호텔 나이트클럽 등 유흥업소를 장악해갔다. 1977년 1월 서방파는 무교동에서 조양은 쪽 두목 오씨를 다시 식도로 난자해 불구로 만든다. 이로 인해 결국 오씨가 조직폭력계를 은퇴하자 조양은은 아버지 제삿날인 1978년 11월10일 자신의 집에서 ‘양은이파’를 결성한다. 국내 최대 폭력조직의 시작이자 김태촌의 서방파, 이후 결성되는 이동재의 ‘OB동재파’와 함께 이른바 ‘폭력조직 3대 패밀리’ 정립 구도의 축이 놓인 셈이다.

김씨는 1976년 5월 야당인 신민당 총재 선출 전당대회에 당원증을 달고 난입해 각목을 휘둘렀다. 김영삼계를 밀어내고 이철승이 신민당 총재에 오른다. 김씨 역시 신민당 중앙당 노동부 차장이라는 직책을 받는다. 그러나 서방파의 영화는 오래가지 못한다. 1977년 10월 김씨가 구속된다. 1980년에는 양은이파 조양은까지 구속된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것이 이동재의 OB동재파였다(이동재는 1989년 양은이파의 공격을 받아 불구가 된 뒤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도피한다).

김씨는 이후 검거와 출소를 반복한다. 1986년 1월 출소 뒤에는 맘보파 두목 오재홍 등 옛 서방파 조직원들을 다시 모으기 시작한다(오재홍은 2007년 한화 김승연 회장 폭행 사건에 다시 등장한다). 그해 4월 세종문화회관에서 서예작품·동양화 등 미술품 전시회를 열어 유흥업소 사장 등에게 이를 강매하는 방법으로 자금을 모으는 한편, 6월에는 조직폭력배들이 참가하는 ‘새마을 축구대회’를 열었다. 김씨는 이 자리에 서울고검 박아무개 검사와 국회의원 등을 초청해 세를 과시했다. 그러나 석 달 뒤인 9월 인천 뉴송도 호텔 사장 살해 사건을 주도한 뒤 제주도까지 도주하게 된다. 그는 도주 44일 만에 트럭 어물상자 사이에 숨어 제주도를 떠나는 카페리호에 올라탔다가 항해사에게 들켜 검거된다. 징역 5년에 보호감호 10년이 그에게 떨어졌다. 이 과정에서 김씨와 박 검사의 유착 관계가 드러나 검찰은 얼굴을 구겨야 했다.

1989년 1월 김씨는 형 집행정지로 석방된다. 폐암으로 왼쪽 폐를 떼어냈다는 게 이유였다. 그는 교도소 안에서 종교에 몰두했다. 석방 뒤 조용기 목사와 안면을 트고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드나들었다(김씨 빈소에는 조용기 목사가 보낸 조화도 놓였다. 김씨는 조 목사 아들과 별거 상태에 있던 탤런트 출신 아내에게 이혼을 종용하는 협박 전화를 했다는 의혹도 샀다). 그가 출소 뒤 자리를 잡은 곳도 경기 파주에 있는 여의도순복음교회 국제금식기도원이었다. 그해 3월 김씨는 기도원에서 옛 조직원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신우회’를 결성했다. 심장병 어린이 돕기, 사회봉사 등을 목표로 내세웠다. 김씨는 이후에도 여러 차례 신우회가 종교모임이라고 강조했지만, 검찰과 경찰은 종교모임으로 위장한 폭력조직으로 판단했다. 그해 6월 김씨는 축성기도 대성회라는 종교행사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옛 서방파, 맘보파, 방배동파 등 검은 양복 차림의 조직원 300여 명이 참석했다. 검경은 이 행사 역시 수사기관을 속이기 위한 위장 기도회로 판단했다. 이 자리에서 ‘범서방파’가 결성됐고 양아무개를 후계자로 지목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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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폭 재판이 시국사건보다 어렵다”

김씨는 노태우 정부의 ‘범죄와의 전쟁’ 선포 다섯 달 전인 1990년 5월 서울지방검찰청 강력부에 의해 다시 검거된다. 슬롯머신 업소 지분 등을 강제로 빼앗은 혐의였다. 서울 동부이촌동의 한 사우나에서 붙잡힐 때 그의 수중에는 2억1800만원어치 수표가 있었다(이때 검사가 2012년 개봉한 영화 에 등장하는 검사의 실제 모델이라는 조승식 검사다). 이듬해 검찰은 범서방파 결성 혐의로 김씨에게 사형을 구형한다. 범죄단체 조직 혐의로 사형이 구형된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검찰은 구형 논고에서 “대한민국 제1의 수괴급 폭력배인 피고인에 대한 양형이 향후 국내 폭력조직 사건의 영원한 지표가 된다는 점과 앞으로 국내에서 폭력조직은 영원히 발붙일 수 없다는 경종을 울리기 위해 사형을 구형한다”고 했다. 그러나 검찰 쪽 증인이던 옛 서방파 부두목이 갑자기 증언을 번복하는 ‘영화 같은’ 일이 벌어진다. 결국 대법원까지 간 김씨에게 징역 10년이 최종 확정된다. 조승식 검사는 “조직폭력배 재판이 시국사건 재판보다 어렵다”는 말을 남겼다. 1992년 총선을 앞두고는 김씨를 검찰과 국가안전기획부, 경찰, 군 등이 비호했다는 비망록이 등장해 정치권을 한바탕 뒤집어놓기도 했다.

김씨는 2005년 6월 출소한다. 그러나 교도소 수감 시절 교도관에게 뇌물을 주고 전화 사용과 흡연 등 편의를 제공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나 이듬해 12월 다시 구속 기소된다. 대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은 뒤 병치레로 병원을 드나들던 그는 2009년 11월 1년 형기를 다 채우고 그의 인생 열 번째이자 마지막 출소를 부산교도소에서 하게 된다.

‘나쁜 놈들 전성시대’는 이제 지나갔을까. “요즘은 과거처럼 조직원들을 규합해 세를 과시하는 경우는 없다.” 서울 지역 경찰서 형사과장을 지낸 경찰 관계자는 서방파·양은이파·OB동재파 등 전국구 조직폭력 단체는 더 이상 없다고 했다. 과거처럼 집단으로, 떼로 움직이지도 않는다고 했다. “지방도시나 돈이 몰리는 신흥도시에서 상권을 장악하려는 일부 신흥 조폭들이 경찰 비관리 대상인 친한 후배들을 끌어들이기도 하지만 서울에서 그런 미련한 짓은 안 한다. 과거 조폭들은 ‘범단’ 무서운 걸 너무나 잘 안다.”

‘범단’은 범죄단체를 말한다.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제4조는 범죄단체를 구성하거나 가입·활동한 이들을 엄하게 처벌한다. ‘수괴’는 사형·무기 또는 징역 10년 이상이 가능하다. 1961년 법 제정 당시부터 이랬다. 간부만 해도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 이른바 ‘똘마니’들도 2년 이상 철창신세를 지게 된다. 조폭 수사에 밝은 한 강력통 부장검사는 이 조항을 두고 “세계사적으로 기념비적 법률 조항”이라고 했다.

조폭 수사·언론 보도는 과장되기 마련

경찰 관계자는 “요즘은 떼로 다니면 죽는 걸 안다. 사안이 있을 때마다 친소관계에 따라 느슨한 형태로 움직인다”고 했다. 2011년 조폭에게 돈을 주고 청부폭력을 지시한 혐의로 이윤재 피죤 회장이 실형 선고를 받았다. 당시 이 회장의 지시를 받은 회사 간부가 동원한 폭력배는 무등산파 행동대원 1명을 포함한 3명이었다. “피죤 간부로부터 A가 청부폭력을 의뢰받는다. 통상적인 조폭이라면 바로 자기 밑 수하를 부르지 않는다. A는 자기가 신뢰하는 B에게 다시 연락하고, B는 자기를 따르는 C와 D에게 어디로 집합하라고 연락한다. C·D는 A가 이 일을 시킨 줄 모른다.” 경찰은 조폭들이 결혼식이나 부모 고희연을 위해 호텔을 예약하면 24시간 안에 100% 확인 가능하다고 한다. 장례식 역시 마찬가지다.

조폭의 소규모화는 최근 일이 아니다. 1990년 범죄와의 전쟁 이후 검경은 폭력조직 175개를 무너뜨리고 ‘수괴급’ 200여 명을 포함해 2만5291명을 구속했다. 10년 뒤인 1999년 이 가운데 85% 정도가 풀려났다. 하지만 거대 조직이 모두 와해돼 과거 수십 명 단위를 이루던 조폭들은 갈 곳을 잃은 채 몇 명 단위로 흩어졌다. 활동 역시 소규모에 걸맞은 ‘합법화’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폭력조직의 자금줄 노릇을 하던 슬롯머신 업소들이 1993년 검찰의 집중 수사로 망가진 것도 전국구 조직 재건을 불가능하게 했다.

대신 합법적 사업체를 운영하는 이른바 ‘기업형 조폭’들의 활동 분야가 다양해졌다. 인터넷 도박장 등 불법적 활동도 늘어나고 있지만 건설업, 사채업, 유통업, 동남아시아 부동산 투자, 주식 등으로 자금원을 넓히고 있다는 것이다. 엔터테인먼트 쪽에도 진출했다는 얘기가 있지만 적발된 사례는 거의 없다고 한다. 경찰 관계자는 “과거처럼 유흥업소 관리·운영이나 술·안주·물수건·종업원 독점 공급 같은 이권 개입을 조직이 도맡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유흥업소 운영을 한다고 해도 개인 단위로 이뤄지지 조직 전체가 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주가 조작에 관심을 보이는 일부 조폭도 있지만 이 역시 개인적 관심이지 특정 조직의 기업형 관여는 아직 포착되지 않는다고 했다.

조폭 수사와 언론 보도는 과장되기 마련이다. 실적이 요구되지만 범죄단체로 ‘엮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검경 수사권 조정 갈등으로 서로 손발이 안 맞아 단속 실적도 떨어졌다. 1993년 서울 성북구 삼선동 비둘기공원에서 8명이 모여 결성했다는 ‘청문회파’ 행동강령은 ‘강한 자는 살고 약한 자는 죽는다. 조직을 이탈하면 청문회에 회부하여 죽는다”였다. 이들의 범죄사실은 편의점에서 40만원을 갈취했다는 것이었다. ‘동네 양아치’ 수준으로 보이는 이들이 과연 그런 행동강령과 조직명을 진지하게 정했을지 의심스럽다. 청문회파는 그 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검찰 관계자는 “단체성을 입증하는 것이 정말 복잡하고 어렵다. 행동강령, 조직·지휘통솔 체계, 위계질서, 명령 하달, 합숙생활, 운영자금, 조직원 훈련 등을 입증해야 한다”고 했다. 경찰 관계자는 “요즘 ‘범단’으로 의율하기가 매우 까다로워졌다. 행동강령이나 통솔 체계를 정하는 애들도 거의 없다”고 했다. 서울 지역의 한 판사는 “범죄사실로 보면 도저히 ‘범단’으로 볼 수 없는데도 억지로 만들어온 듯한 경우가 종종 있다”고 했다. 알려진 것처럼 조직 이름은 수사기관에서 ‘네이밍’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과거에는 활동 지역이나 두목의 출신 지명을 많이 따다 썼지만, 해당 도시나 지역에서 불만이 나올 수 있어 두목 이름을 많이 붙인다고 한다.

요새는 돈 있는 사람이 두목

조폭의 씨를 말릴 수는 없다, 조폭은 예나 지금이나 돈 있는 곳으로 몰린다, 요즘 조폭은 의리가 아닌 돈으로만 모인다, 돈 있는 사람이 두목이다. 조폭 수사를 전문으로 하는 이들의 공통된 말이다. 지난해 대선에서 안철수 캠프 대외협력실장을 맡았던 하승창씨는 1월5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올렸다. “(김태촌을) 가까이서 본 적이 있다. 1990년 (법무부) 같은 호송버스를 탔다. 대개 교도관이 어디 앉으라 하면 가서 앉게 마련인데 김태촌은 자기가 앉고 싶은 곳에 가서 앉았다. 그 자리가 김근태 선배 옆자리였다. 순간 교도관들은 당황하는 듯싶었으나 그냥 순간뿐. 유명한 조폭도 김근태란 사람이 무척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교도소에서도 아무 거리낌 없이 지내던 조폭 김태촌도 세월과 병을 이길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조폭들이 새겨들을 말이다. ‘차카게 살자.’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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