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한 주립대학에서 심리학과장을 지낸 친구가 있다. 그의 전공은 ‘감각과 지각 심리학’이었다. 그는 미 해병이나 정부 관련 단체에서 연구기금을 지원받아 연구를 수행한 일이 있었다. 나중에야 군 관련 단체에서 지원받은 연구가 고문을 효과적으로 자행하는 자료로 사용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연구로 인해 받은 고문 피해자들의 고통보다는 적겠지만, 그는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과 죄책감에 시달렸다. 어느 날 모든 직책과 사회적 활동을 그만두었다. 심지어 아내와 자녀에게 모든 재산을 넘기고 미국을 떠났다. 지금은 지구 변방인 뉴질랜드의 한 시골 사찰에서 승려도 아니고, 그냥 불목하니의 삶을 살고 있다.
히치하이킹하던 그를 내 차에 태워 처음 인연을 맺게 되었고, 어느 날 고해성사처럼 털어놓는 그의 얘기를 들으며 나는 문득 이근안을 떠올렸다. 고문기술자 이근안과 고문연구자로서의 그가 아니라, 숨어 사는 두 남자로서 말이다. 한 명은 자발적으로, 또 한 명은 자신도 모르게, 국가에 의해 괴물이 된 두 사람. 서울 용산 참사를 다룬 영화 이 국가가 진압경찰을 어떻게 소모시켰는지 말하려 했던 것과 유사한 입장이다. 그렇다고 이근안에게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대부분의 고문은 가해자의 생각을 피해자의 입으로 말하라고 하는 것이다. 고문 가해자들은 자신의 생각을 입증할 방법도 의사도 없으니 상대의 입을 빌려 확인받을 수밖에. 영화 에서도 실체는 없으나 입증해야 할 ‘민추위’와 ‘거대 배후’라는 이근안의 생각을 김근태가 말하게 하려는 것이 고문의 이유다.
하지만 고문의 궁극적인 목적은 독재자의 자기애적 병리행동의 완성이다. 병리적 자기애 성격을 가진 이들은 자기를 계속 확대재생산해내는 것에 모든 것을 건다. 자기를 너무 강박적으로 사랑한 나머지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자기로 만들려고 한다. 자기 말만 듣게 하고, 자기 생각을 실현하게 하고, 자기가 가장 올바른 사람이라는 것을 타인의 입을 통해 입증하게 만든다. 이때 ‘자기’ 밖의 사람들은 시대에 따라 ‘빨갱이’, 상황에 따라 ‘반동’, 조건에 따라 ‘분열주의자’나 발목을 잡는 ‘잉여’로 불린다.
이들에게는 또 하나 공통점이 있다. 온 국가를 일본식 ‘새마을’로 만들고, 가장 부당한 방법으로 정권을 찬탈하고도 ‘정의사회를 구현’하고, 또는 ‘도둑적으로 완벽한 정권’을 세운 독재자들에게는 ‘시범케이스’가 필요하다. 말 안 듣는 놈들은 다 죽일 수도 있지만 그러자면 너무 시끄러워지니까 몇 놈만 죽이는 거다. 학교 교실에서도 폭력 선생들은 이런 방법을 종종 사용한다. 학기 초에 딱 걸린 한 놈을 죽도록 패는 거다. 그러면 교실은 장악된다. 이른바 시범케이스, 편하게 다스리겠다는 거다.
고문의 후유증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한 사회는 시범케이스에 대한 폭력과 고문의 기억으로 인해 자신을 검열하게 된다. 치욕스러운 상황이다. 내 말과 행동이 ‘그’가 생각하고 원하는 것을 거스르지 않는지 스스로 검열하는 세상. 고문이라는 국가적 폭력의 궁극적인 목적은 전 국민 스스로가 간단없는 자기 검열을 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때 국가가 국민에게 직접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어도 모든 국민은 폭력의 피해자가 된다.
고문 피해자들의 ‘임사체험’자신을 검열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사회는 불안하다. 그러나 가장 불안한 사람은 고문하는 세상을 만든 독재자 자신이다. 병리적 자기애는 자신이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임을 잘 알기에 비롯된 것이다. 개인사를 찬찬히 분석해보면 성장 과정 어디쯤에 존재가 심각하게 부정된 지점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말을 부정하는 것조차 자신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으로 여겨 분노한다. 고문 피해자를 안고 사는 사회가 앓게 되는 고문 후유증은 이렇다. 일상적인 자기 검열, 현격히 떨어진 자기 존중감, 자신도 세상도 냉소하는 경향이다. 이것은 다시 독재를 예비한다. 영화 가 27년 전 이야기인 동시에 현재의 이야기일 수 있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그러나 이를 영화로 소비한다는 것은 고문 후유증을 앓고 있는 우리 사회에 어떤 의미가 될까?
정지영 감독은 김근태를 안아주는 인재근씨, 허위 자백으로 괴로워하는 자신을 위로하는 또 다른 김근태를 보낸다. 고문 피해자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들을 위로할 만한 윤리적 영화다. 고문받는 김근태를 위로하는 또 하나의 김근태, 이것은 허구가 아니다. 영국 글래스고대학의 쿠퍼 박사는 고문 피해자들의 사례를 통해 ‘임사체험’(Near-Death Experience)이라는 개념을 말한다. 고문 피해자들은 극도의 고통과 공포를 경험하는 고문 과정에 또 다른 자신이 그 상황에서 벗어나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자신을 바라보기도 하고, 밝은 빛과 대양(大洋) 앞에 서 있는 경험을 한다고 한다. 영화의 윤리적 상상력은 고문 피해자의 내적 상태에 다다른다.
영화에는 또 하나의 윤리가 있다. 는 보기 전에 각오해야 했던 것만큼 잔인하지는 않다. 더 세게, 더 잔인하게, 눈을 뜨지 못하도록 영화 속의 김근태를 파괴함으로써 고문에 대한 관객의 가학적 상상력을 만족시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영화는 김근태도 김근태 역의 배우도 착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두 가지의 윤리적 지점 때문에 한 가지 기우가 생겼다. 위로하는 김근태와 인재근을 보며 관객이 자신의 부채감을 경감하지나 않을까, 칠성판에서 몸부림치는 타인의 고통을 그저 영화로 소비하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 영화가 유통될 때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책무와 고문 가해자에 대한 분노를 옅게 하지 않았으면 한다.
영화 말미에서 국가보안법을 다루는 허술한 태도 또한 여전히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하지만 감독은 ‘늙은 아비와 그 딸의 주제가’ 을 이근안의 휘파람으로 노래하며 절묘하게 시비를 피해간다.
한 표로 사람은 바꿀 수 있다백보 양보해서 고문기술자 이근안도 시대가 만든 괴물이라고 치자. 하지만 그 시대를 만든 전두환은 어떻게 할 것인가? 남영동을 만든 독재자는 여전히 잘 살고 있지만 고문 피해자는 그 후유증으로 죽었다는 사실은 무거운 현재진행형이다. 박정희의 인혁당은 어떤가? “인혁당 재건위에 대한 ‘두 개의 판결’을 역사의 판단에 맡기자”고 하는 그 딸이 집권 여당의 대선 후보로 활보하고 있다. ‘사법’이라는 이름의 폭력으로, ‘경제’라는 이름의 밥줄로 국민을 겁박하며 입 닥치고 따라오라고 했던 현재의 대통령은 어떻게 할 것인가? 다음달이면 선거가 있다. 한 표로 세상을 바꾸기는 어렵다. 하지만 사람은 바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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