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대통령 선거를 보면 복지·경제·남북관계 분야의 공약에서 여야가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성장과 분배’ ‘시장 자율과 규제’ ‘안보와 남북협력’이라는 대립 프레임은 미세하게 진동했지만 그 기본 틀은 굳건했다. 하지만 2012년 18대 대통령 선거에서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대선을 40여 일 앞두고 주요 후보들이 내놓은 공약과 정책이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기 때문이다.
수개월째 언론을 오르내리는 경제민주화 공약뿐만이 아니다. 예를 들면 새누리당이 ‘비정규직 철폐’라는 빨간색 펼침막을 내걸었고, 북한 주민을 위한 인도적 지원을 약속했다. 윤희웅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조사분석실장의 진단이다. “성장과 안보를 지지하던 산업화 세대가 고령화되며 한국 사회의 주류와 비주류가 자리를 바꾸기 시작했다. 지금은 과도기다. 50대로 진입한 386세대는 물론, 20∼30대도 복지·분배·남북협력의 가치관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논리를 똑같이 반복해서는 새누리당이 지지층을 확장할 수 없는 상황이다.”
새누리당의 변신을 두고 누구는 당 정체성을 탈바꿈한 ‘파격적인 행보’라고 하고, 누구는 당 정체성을 감춘 ‘물타기용 꼼수’라고 한다. 어떤 평가를 내리더라도 세 대선 후보가 공통적으로 내놓은 공약은 실현될 가능성이 커졌다. 시대의 요구이기도 하지만 ‘사기 공약’이 아니고는 누가 정권을 창출하든 여야가 반대할 이유도 명분도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공약도 선거철이 지나면 관철하기 어렵다는 공식이 깨질 수 있다는 뜻이다. 은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 안철수 무소속 후보의 공약·정책 가운데 공통점을 뽑아냈다. 이른바 ‘공약의 최대공약수’다. 100점짜리는 아니지만 대통령 당선자가 그것이라도 먼저 실천하면 올해보다 나은 내년을 기대할 만하다.
2012년 12월 18대 대통령 선거에서 기이한 현상이 발생했다. 주요 대선 후보들이 경제·사법·통일·노동·교육 분야에서 엇비슷 공약과 정책을 내놓아 여야의 차별성이 전보다 흐릿해졌다는 평가가 많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 안철수 무소속 후보(왼쪽부터). 사진 신소영 기자, 강창광 기자, 박종식 기자
검찰 개혁 특별감찰관 두고 수사권 조정하고
검찰이 독점하는 수사 기능을 일부라도 분산해야 한다는 데 이견이 없다. 박근혜 후보는 감찰 기구인 ‘특별감찰관제’와 ‘상설특검’을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문재인·안철수 후보가 약속한 ‘고위공직자비리(부패)수사처’ 신설보다는 강도가 약하지만 검찰을 손봐야 한다는 데는 뜻을 함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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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친·인척의 부패와 고위 공직자의 비리를 감시하는 특별감찰관은 국회가 추천해 대통령이 임명하며, 임기는 3년이다. 안대희 새누리당 정치쇄신특별위원장은 “감찰관은 조사권이 있고, 고발한 사건은 상설특검이 수사와 기소를 맡는다”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서울 내곡동 사저 의혹 특검처럼, 사안별로 특별검사를 정하면 불필요한 정치 공방이 벌어진다는 이유에서다. 특별감찰관의 조사권은 광범위하다. 재산 변동 검증을 위한 현장 조사, 계좌 추적, 통신거래 내역 조회 등이 가능하고 경찰·검찰·국정원 등 관계기관에 자료를 요구하고 직원 파견을 요청할 수 있다.
검경 수사권 조정에 대해서도 세 후보는 그 필요성에 공감한다. 지난 10월19일 박 후보의 경찰 관련 공약 발표는 이렇다. “검찰과 경찰 간에 견제와 균형 원리에 따른 합리적 역할 분담이 필요하다. 검찰과 경찰 간의 협의를 거쳐 수사권 분립이 이뤄지도록 하겠다.”
수사권 조정 문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2년 대선 때 ‘경찰 수사권 독립’을 공약으로 내세운 뒤, 기회 있을 때마다 해결을 재촉해왔던 사안이다. 하지만 검찰의 거센 반대에 부딪혀 공약을 달성하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해 손을 댔다. 경찰에 수사개시권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형사소송법을 개정한 것이다. 하지만 검찰의 포괄적인 수사지휘권은 그대로 유지해 경찰이 개악이라고 반발한다.
노 전 대통령과 맥을 함께하는 문 후보가 그래서, 박 후보보다 한발 더 나아가 있다. 지난 10월23일 ‘권력기관 바로세우기’ 정책 발표에서 “경찰에 민생범죄와 경미한 범죄를 수사하도록 독자적인 수사권을 부여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안철수 후보에는 못 미친다. 10월31일 안 후보가 발표한 사법 개혁 과제를 보면, 경찰이 내사를 포함한 모든 수사 단계를 지휘하고 검찰은 직권남용·뇌물 등 경찰 비리를 비롯한 예외적인 경우에만 직접 수사를 맡도록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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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대선 후보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명박 정부의 강경한 대북 기조와 거리를 두고 있다. 남북관계를 더 이상 악화시킬 수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셈이다. 남북 대화 재개 의지도 공통적으로 천명했다. 박근혜·문재인 후보는 당선되면 북한 지도자와 만나겠다고 밝혔고, 안철수 후보는 남북 정상 간 핫라인 설치를 공약했다. 대북 인도적 지원도 모두 약속했다. 이명박 정부가 승계를 사실상 거부한 6·15 공동선언과 10·4 정상선언을 승계(문·안 후보)·존중(박 후보)하겠다고 했다.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회의체인 6자회담을 재개하겠다는 의지도 세 후보 모두 밝혔다.
그러나 통일·외교 정책의 각종 구성 요소들 간의 관계, 공약을 현실화할 경로와 강조점에서는 세 후보 사이에 적잖은 차이가 발견된다. 현실적으로 가장 중요한 쟁점은 남북관계와 북핵 문제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다. 문·안 후보는 남북관계와 북핵 문제 해결의 병행 추진을 공언했다. 이명박 정부의 ‘선핵폐기론’이 아니라,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병행추진론’을 계승해 남북관계를 핵 문제에 연계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박 후보는 이 대목에서 분명한 태도를 밝히지 않았지만 ‘선핵폐기론’에 가깝다. 문·안 후보가 북핵 문제 해결 과정에서 대화와 외교를 강조한 반면, 박 후보는 외교적 노력과 함께 ‘억지력 강화’를 강조한 대목도 곱씹어볼 대목이다. 박 후보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을 무력화할 수 있는 억지력을 강화하겠다”고 공언했는데, 이는 자칫 동북아 각국의 군비 확장 경쟁이라는 안보 딜레마의 악순환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노동 정년이 57살에서 60살로
비슷한 약속이 여럿 있다. 일단 누가 당선되더라도 현재 기업의 평균 정년 57살을 60살로 추진할 가능성이 높다. 여기엔 문재인 후보가 가장 앞선다. 그는 고령층의 일자리 유지를 위해 법정 정년을 60살로 의무화한 뒤 국민연금 수급 연령에 맞춰 단계적으로 65살까지 늦춰야 한다는 생각이다. 안철수 후보도 정년을 60살로 연장하는 방안을 법제화하되 점진적으로 연령 제한을 폐지해야 한다고 밝혔다. 다만 청년층과의 세대 갈등을 피하려면 정년을 연장하는 대신 임금을 깎는 ‘임금피크제’를 시행한다는 전제를 달았다. 박근혜 후보 역시 임금피크제와 연계한 정년 연장을 이야기한다. 그는 목표 연령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지난 4·11 총선 때 새누리당 공약에서 ‘정년 60살 의무화’를 약속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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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 인상도 세 후보가 공감하는 분야다. 다만 온도차가 있다. 문·안 후보는 현재 직장인 평균임금의 37% 정도에 그치는 최저임금을 50%까지 올리는 방안을 공약으로 내놨다. 문 후보는 10월7일 청년들과의 타운홀미팅에서 “최저임금조차 보호받지 못하는 최저임금 미달 노동자들이 200만 명 된다. 최저임금이 실질 생계 임금 수준이 되도록 올려야 한다”고 설명했다.
비정규직 해법에도 유사성이 발견된다. 여기서는 박근혜 후보의 목표치가 가장 높다. 박 후보는 공공부문의 상시 비정규직을 2015년까지, 문 후보는 2017년까지 철폐한다는 방침이다. 박 후보는 10월31일 서울시당 선거대책위원회 발대식에서 “비정규직 차별을 해소하고 안정적인 근무환경을 만들어서 안심하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겠다”고 했다.
안 후보는 공공부문에서 2년 이상 근무한 비정규직이 없도록 법제화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누가 승리하든 앞으로 비정규직이 점차 줄어든다는 얘기다. 이 밖에 보험설계사와 학습지 교사 등 특수고용직 노동자의 산재보험 적용, 과도한 근로시간 단축 등도 세 후보의 공약수다.
보육 기획재정부의 축소 결정에 모두 반발세 후보 모두 맞벌이 부부의 표심을 공략하고 있다. 지난 4·11 총선을 계기로 새누리당과 민주당이 내년부터 만 0~5살 무상보육을 전면 실시하기로 한 것에 안철수 후보도 적극 동참한다. 여기에 안 후보는 보육시설들이 현장실습비나 입소비 등의 명목으로 학부모에게 추가 비용을 물리지 않도록 보육비를 적정하게 산정하겠다는 내용을 추가했다. 다만 기획재정부가 걸림돌이다. 정치권의 합의와 달리 보육료 지원 대상자를 전체에서 소득 하위 70%로 축소하기로 결정하고 내년 예산안을 짰기 때문이다. 무상보육을 제도화하려면 여전히 새 대통령의 강한 의지가 필요한 상황이다. 박근혜 후보는 9월25일 이렇게 강조했다. “(소득) 상위 30%에 해당하는 사람들도 다들 빠듯하게 살아가는 젊은 부부들이어서 지원이 필요하다. 새누리당이 약속한 바를 지킬 수 있도록 이젠 국회 차원에서 노력하겠다.”
학부모가 선호하는 국공립 보육시설 확충도 나란히 포함돼 있다. 박·안 후보는 현재 10%에 불과한 국공립 시설 이용률(아동 수 기준)을 단계적으로 30%까지, 문재인 후보는 40%까지 올리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맞벌이 가정의 육아 부담을 덜어주려는 ‘맞춤형 보육 서비스’ 제공도 공통 약속이다. 육아도우미가 가정을 방문해 자녀를 돌봐주는 서비스를 확대하거나, 부모가 원하는 시간에 아이를 맡아주는 ‘시간제 보육 서비스’를 도입하겠다는 식이다.
936호 줌인 그래프
공약이 지켜진다면 다음 정권에선 학부모의 교육비 부담도 적잖이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일단 모두 고교과정을 의무교육으로 전환하겠다고 발표했다. 만 0~5살 무상보육에 이어 초·중·고교까지 무상교육을 이루겠다는 거다.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가장 고통을 주는 대학 등록금에 대해서도 사실상 ‘반값 등록금’으로 통일된 상태다.
물론 방식과 속도엔 차이가 있다. 문재인 후보는 고지서에 찍히는 명목 등록금을 당장 내년부터 반으로 깎겠다고 이야기한다. 내년 국공립대에 적용한 뒤 내후년엔 사립대로 확대한다. 안철수 후보도 명목 등록금을 2017년까지 단계적으로 반으로 줄이겠다고 밝혔다. 지난 총선에서 민주당의 반값 등록금을 ‘포퓰리즘’이라 비판했던 박근혜 후보는 반값 등록금이란 용어는 꺼리면서도 “등록금 부담을 분명하게, 반드시 반으로 낮추겠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 소득 하위 70%를 대상으로 소득별로 차등적으로 장학금을 지원해 전체 부담을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것이다.
또 이명박 정부에서 부활한 전국 학업성취도평가(일제고사)를 적어도 초등학교에서는 폐지하겠다고 입을 모았다. 여기에 문·안 후보는 중·고교까지 포함한 전면적인 폐지를 약속한다. 사교육을 줄이고 공교육을 정상화해야 한다는 원칙에도 세 후보는 의견을 같이한다. 각론은 다르다. 문 후보는 초등학생의 일몰 뒤 사교육 금지와 과학고를 제외한 외국어고·자사고 등 특목고 폐지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안 후보는 특목고 우선 선발권 폐지와 국가영어능력시험 재검토를, 박 후보 쪽은 현재 사교육 대책을 준비 중이다. 김종인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은 10월29일 “사교육비를 줄이기 위해 교육 시스템을 전면적으로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주거 임대주택 비율 늘리고 기간 늘리고부동산시장 활성화보다는 주거 안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교집합은 임대주택 증가다. 구체적으로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는 공공임대주택에서 사는 가구 비율(현재 5.3%)을 2018년까지 10% 수준으로 끌어올릴 생각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에 위축됐던 공급(연평균 3만∼4만 가구)을 최대 연 12만 가구까지 확대하면 된다고 한다. 박근혜 후보는 행복주택 프로젝트를 선보였다. 철도부지 상부에 아파트, 기숙사, 상업시설을 세워 공급하겠다는 공약이다. 낮은 토지 비용 덕분에 보증금이나 임대료가 절반 이하로 떨어지리라 기대한다. 특히 5년, 10년 뒤에 분양하는 공공임대주택과 달리 40년간 장기 임대한 뒤 리모델링해 재임대하는 방식을 제시했다.
문 후보는 임대등록제를 전면 실시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현행 2년의 임대차계약을 1회에 한해 세입자가 연장할 수 있게 하는 임대차계약갱신청구제도를 도입한다. 4년의 임대 기간을 보장해 주거 불안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안 후보의 공약과 일치하는 지점이다. 또 둘 다 전세금보증센터를 설립해 계약 기간이 끝났는데도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세입자를 지원하기로 했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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