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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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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불타고 있는 용산 남일당 망루

등록 2012-11-06 19:57 수정 2020-05-03 04:27
가석방으로 나온 ‘용산 참사’ 구속자 김재호(왼쪽)씨와 김대원씨는 지난 10월31일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열린 ‘용산 생명평화미사’에 참석했다. 사진 : 박승화 기자

가석방으로 나온 ‘용산 참사’ 구속자 김재호(왼쪽)씨와 김대원씨는 지난 10월31일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열린 ‘용산 생명평화미사’에 참석했다. 사진 : 박승화 기자

319번째. 햇수로는 3년6개월이 넘었다. 지난 10월31일 저녁 7시.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 2층에서는 319차 ‘용산 생명평화미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미사를 준비하는 이들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펼침막을 달고, 제단을 준비했다. 지난 2009년 1월20일 설 연휴를 앞두고 ‘용산참사’가 벌어진 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사고 현장인 남일당 건물 앞에서 천막을 치고 매일 용산 생명평화미사를 열어왔다. 하루도 빠짐없이 열렸던 미사는 1년 넘게 병원 냉동고에 보관돼 있던 용산4구역 사망자들의 영결식이 있은 2010년 2월 284차 미사를 끝으로 장소를 옮겨, 지금은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 저녁에 열린다. 용산 참사 유가족들과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언젠가 이뤄질 진상규명을 기원하는 자리다.

“매일 밤 딸 손을 잡고 잔다”

이날 미사에는 특별한 손님이 찾았다. 이들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자 미사에 참석한 유가족들은 눈시울을 붉혔다. 3년9개월 전 서울 용산 남일당 건물 옥상 망루에 올랐다 구속된 김재호(56)·김대원(42)씨다. 이들은 지난 10월26일 ‘교정의 날’ 특별 사면자로 가석방됐다. 이들은 경찰을 죽였다며 특수공무집행치사 혐의로 징역 4년형을 받았다. 이번 가석방은 형기를 석 달 남기고 이뤄졌다. 용산참사 구속자가 가석방으로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다.

“만나자마자 뭐, 제 정신이 아니었죠. 아주 울음바다가 됐으니까요.”(김재호) 미사를 앞두고 만난 이들은 여전히 가석방이 꿈만 같다고 했다. 시간이 멈춘 것 같다고도 했다. 재호씨는 충남 공주교도소에 있었다. 가석방되던 날, 그의 아내는 용산참사 유가족과 함께 그를 맞으러 교도소 앞까지 찾아왔다. 그는 “딸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어서 가장 좋다”고 말했다. 그가 망루에 오를 때 9살이던 딸이 12살이 됐다. 아버지의 부재와 생계 때문에 집을 계속 비워야 했던 어머니 사이에 홀로 남겨진 딸은 심한 우울증을 겪었다. 그는 몸이 한없이 부어 엉망이 된 아내와 딸을 보며 가슴이 먹먹했다. 그는 “가석방된 뒤로 매일 밤 잘 때 딸 손을 놓지 않는다”고 했다.

대원씨는 재호씨와 같은 날 기소돼 전북 전주교도소에서 지냈다. 그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노총각이다. 복역 기간 내내 칠순을 넘긴 어머니는 전주를 오고 갔다. “돌아올 수 있는 집이 있고, 그 안에 어머니가 계시다는 생각을 하니 아직까지는 (가석방으로 나온 게) 좋은 거 같아요.” 하지만 그에게 참사 당일의 이야기를 꺼내자, 금세 눈가가 붉어졌다. “검찰의 사건 발표를 보면, 망루에서 바깥으로 처음 고개를 내민 사람이 나와요. 그게 저예요. 망루 4층에 있었는데, 갑자기 검은 호스가 들어오더니 제 얼굴에 정면으로 최루액(소화기 분사액)을 쐈어요. (최루액 때문에) 숨 쉬기 힘들어서 밖에 얼굴을 내밀었던 거죠.”

교도소 생활 탓일까. 재호씨는 출소 다음 날, 새벽 동 트기 전 잠에서 깼다. 토요일 새벽 찬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홀로 남일당 건물 터를 찾았다. “건물은 이제 없지만, 주변을 걷다보니 그 안에서 있었던 일이 다시 생각나더라고요. 그런데 어느 길을 들어섰더니, 영 낯설어 보이기도 하더라고요. 암튼 뭔가 시간이 툭 단절된 느낌이랄까….”

불타는 망루 앞서 “여기 안에 사람이 있다”
용산 참사가 일어난 2009년 1월20일 새벽, 서울 용산 남일당 건물 옥상에서 경찰에게 둘러싸인 김재호씨 모습이 보인다. 김명진 기자

용산 참사가 일어난 2009년 1월20일 새벽, 서울 용산 남일당 건물 옥상에서 경찰에게 둘러싸인 김재호씨 모습이 보인다. 김명진 기자

2009년 1월20일 새벽, 남일당 건물 위로 경찰의 컨테이너가 내려온 건, 이들이 망루에 오르고 나서 하루 만이었다. 김석기 서울지방경찰청장이 경찰청장으로 ‘영전’한 이튿날이었다. 이들은 전날 새벽 서울 용산구 한강로2가 한강대로변 재개발 예정지에서 그나마 눈에 띄고 높았던 5층짜리 남일당 건물에 올랐다. 용산4구역을 떠나지 못하던 세입자 가게 주인도 있었고, 전국철거민연합에서 온 이들도 있었다. 석 달 정도 버티고 내려오면, 뭔가 달라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경찰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왜 올라갔는지 묻지도 않았다. 결국 이날 새벽, 불 붙은 망루에서 용산4구역에서 음식점을 하던 이상림(71)씨와 양회성(55)씨 등 철거민 5명, 그리고 경찰특공대 대원 1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들은 그날 새벽의 순간을 또렷이 기억했다. “망루 3층에는 사람들이 가져온 짐을 한 군데에 모아뒀어요. 경찰이 물대포를 계속 쏴 발이 흠뻑 젖어 짐 가운데 신을 걸 찾으러 갔죠.” 짐 무더기 속에서 양말을 꺼내 갈아 신은 재호씨는 침낭을 뒤집어쓰고 앉아 있었다. 망루는 난로 옆도 추웠다. ‘아침이 되면 새로운 일과가 시작되겠지’라는 생각뿐이었다.

망루 4층에 있던 대원씨는 “경찰 컨테이너가 내려올 때, 이미 경찰이 옥상의 망루 주변을 다 점거한 상태였다”고 말했다. 망루 2층과 3층에는 인화물질이 쌓여 있었다. “경찰이 물을 뿌리니까 사람들이 물에 젖어 망루 위로 계속 올라간 거죠.” 곧 망루 안은 경찰이 뿌려대는 최루액(소화기)에 숨을 못 쉴 지경이 됐다. 이들은 모두 누군가 “뛰어!” 하는 소리를 듣고 망루를 벗어나 옥상 위로 뛰어내렸다. “옥상 바닥에 떨어지니 바닥에 고인 물 때문에 ‘철퍼덕’ 소리가 들렸어요. 그리고 2~3분쯤 지났을까. 망루 안에서 불이 확 올랐죠.” 그날 현장 사진에는 불타는 망루 앞에 서 있는 재호씨가 찍혔다. 그는 건물을 에워싼 경찰들을 향해 “여기 안에 사람이 있다”고 소리쳤다.

화마는 순식간에 경찰을 포함하여 6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대원씨는 “(경찰에 체포돼) 호송 버스를 탔는데, 무전을 듣는 경찰 간부의 모습을 보고 ‘아, 뭔가 잘못됐구나’라고 직감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하루 만에 땅으로 내려온 이들은 ‘도심 속 테러리스트’라는 낙인이 찍혔다.

시간이 흘렀지만 도시 한복판에서 벌어진 이 야만적인 사건의 기억은 여러 사람의 머릿속에 아직도 또렷이 남아 있다. 그동안 용산참사를 다룬 수많은 책과 영화가 나온 것은, 이 사건을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이 가운데 용산 참사를 다큐멘터리로 엮은 은 가석방된 이들에게 큰 위로가 됐다. 이들 모두 복역 중이라 영화는 보지 못했지만, 영화가 큰 관심을 받았다는 소식은 전해들었다.

망루에서 내려오자마자 생계 걱정

재호씨는 “경찰특공대, 철거민 모두 피해자라는 이야기를 담았다고 하던데, 특히 많은 사람이 그 영화를 보면서 울고 동감했다는 이야기를 뒤늦게나마 전해듣고 마음이 벅찼다”고 했다. 심지어 대원씨는 이 일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시위를 하는 사람들을 마뜩찮은 시선으로 보았다. 그는 “두 개의 관점에서 영화를 만들었다 해서 그런 제목을 붙였다고 들었다”며 “이 일을 겪고 나서야 그 상황을 겪어보지 않은 이상 남의 일을 쉽게 말하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사실 이 두 사람은 서로 잘 알고 지내던 ‘이웃사촌’은 아니다. 재개발사업으로 강제 철거가 되고 남일당 건물에 오르기로 결심하기 전까지, 이들은 그저 한동네에서 장사하며 얼굴만 알고 지냈다. 재호씨는 남일당 건물 맞은편의 ‘진보당’이라는 금은방 주인이었다. “젊은 시절, 다른 금은방에서 손님 받는 법과 세공 기술을 배워서 1984년에 제가 처음 개업한 가게였죠.”

같은 동네에서 중국음식점 ‘공화춘’을 하던 대원씨의 재호씨에 대한 기억은 이랬다. “군 제대하고 시작한 식당이었죠. 그땐 잘 알지 못했지만 형님네 배달을 가면 기억에 남던 게 하나 있어요. 짜장면을 시키면 꼭 딸내미 꺼를 손수 비벼주더라고요. 매번 참 쉽지 않을 텐데 정성스럽게 말이죠.” 그 흔한 ‘상가번영회’도 없던 용산4구역에 몰아닥친 철거 바람이 이들을 서로 형님동생 사이로 만들었다.

용산참사로 구속된 이들은 모두 8명이다. 모두 망루에 오른 이들이다. 이 가운데 가장 낮은 형량을 받은 재호씨와 대원씨만 가석방됐다. 올해 초부터 용산참사 관련자들에 대한 대통령 사면 요구가 쏟아졌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원씨는 “매번 탈락을 해서 가석방에 대한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저희 둘다 지난 8월15일에 가석방 신청을 각각 올렸어요. 그런데 떨어지고, 다시 9월에 신청을 올려서 이번에 나오게 된 거죠.” 재호씨는 “지난 5월에는 교도소 관계자들이 ‘곧 선거철이니까 나가서 사회적 이슈가 되면 곤란하다’며 안 된다고 했다”고 덧붙였다.

삶의 터전을 지키고 싶어 망루에 올랐던 이들은 망루에서 내려오자마자 생계 걱정을 해야 한다. 재호씨 부인은 최근 노래방을 차렸다. 전세금과 대출금을 모아 차린 노래방이다. 아내는 그가 없는 동안 관광가이드를 하며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젊은 시절을 쏟아부었던 금은방은 접었다. 중국음식점만 해온 대원씨도 앞으로 생계가 막막하다. 보증금 2천만원, 권리금 1억원을 투자한 중국음식점에 대한 보상금으로 6천만원을 받았다. 동네가 없어져 단골 손님도 사라졌고, 재개발 뒤 임대료가 오를 게 뻔한 용산4구역으로 돌아갈 길도 없다.

정부 대책에도 여전한 ‘제2의 용산’

남일당 망루에 오른 이들은 “강제 철거 전에 상인들에게 임시 주거와 생계를 위한 임시 시장을 마련해달라”고 주장했다. 평범한 상인이던 이들은 주검이 되거나 ‘테러리스트’가 돼 망루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그사이 정부는 재개발에 관한 몇 가지 후속 조처를 내놓았다. 조합원에게 분양하고 남은 상가는 상가 임차인들에게 우선 분양권을 주고 영업 손실에 따른 휴업 보상비를 석 달치에서 넉 달치로 늘리겠다고 했다.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 개정에도 나섰다. 하지만 폭력 용역업체는 여전히 곳곳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고, ‘제2의 용산’으로 불리는 철거촌은 도처에 널렸다. 이들은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반드시 이 사건의 재심을 받고 싶다”고 힘주어 말했다. 남일당 건물은 이미 없어졌지만, 망루는 여전히 불길에 타고 있다.

한겨레21 제935호 사람과 사회 -서울 용산 참사 구속자 현황

한겨레21 제935호 사람과 사회 -서울 용산 참사 구속자 현황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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