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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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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서 ‘어게인 2002’ 재연되나

등록 2012-09-04 17:42 수정 2020-05-03 04:26
‘김대중 전 대통령 추모하는 민주 경선 후보들’ 18일 오전 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3주기 추도식에서 민주통합당 대선 경선 후보인 문재인, 박준영, 손학규, 김두관, 정세균 후보(왼쪽부터)가 참배하고 있다. 뉴스1

‘김대중 전 대통령 추모하는 민주 경선 후보들’ 18일 오전 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3주기 추도식에서 민주통합당 대선 경선 후보인 문재인, 박준영, 손학규, 김두관, 정세균 후보(왼쪽부터)가 참배하고 있다. 뉴스1

광주는 ‘노풍’의 진원지였다. 2002년 3월16일 열린 민주당 광주 경선에서 노무현 당시 후보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37.9%의 득표율로 승리했다. 이인제 후보가 31.3%로 2위, 한화갑 후보는 17.9%로 3위에 그쳤다. 정치권에선 이를 ‘3·16 사건’이라고 불렀다. 광주 지역의 지구당을 대부분 장악하고 있던 한화갑 후보는 사흘 뒤 후보직을 전격 사퇴했다. 광주에서의 승리는 이긴 쪽에서도 충격이었다. 노무현 캠프 공보특보를 지낸 유종필 관악구청장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씨는 당시 사석에서 “정말 광주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어요”라고 의아해했다고 한다. 광주에서부터 불어온 바람은 국민경선의 짜릿한 드라마와 함께 ‘단기필마 노무현’을 결국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출마선언 시점, 혼전 양상

9월6일로 예정된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 선출을 위한 광주·전남 경선에서 다시 그런 역동성이 발휘될 수 있을까? 현재로선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모두 13만9274명의 선거인단이 등록한 광주·전남 경선이 주목받는 것은 초반 대세론을 형성한 문재인 후보에겐 마지막 고비, 손학규·김두관·정세균 후보에게는 역전의 발판을 마련할 마지막 기회이기 때문이다.

각 주자들이 일제히 김대중 전 대통령을 호명하며 지역 민심에 호소하는 건 그래서다. 문재인 후보는 최근 이용희 전 국회부의장, 김옥두 전 새천년민주당 사무총장, 조순용 전 청와대 정무수석, 김관선 전 전남도의원 등 김 전 대통령 쪽 인사들을 영입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같은 준비된 대통령, 성공한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지지를 호소해온 손학규 후보도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 전도사’인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을 선대위 상임고문으로 위촉한 바 있다. 김두관 후보 역시 “호남을 얻는 후보가 결국 야권의 대선주자가 될 것”이라며 분주하게 바닥 민심을 다지고 있다. 공약 경쟁도 치열하다. 문재인 후보는 광주 상품거래소 설치, 신재생에너지 등 신산업과 관광산업 육성을, 손학규 후보는 서울대와 전남대의 혁신네트워크 설치, 호남고속철도 조기 완공, 국제문화예술 허브도시 육성을 제시했다. 김두관 후보는 한국학호남진흥원 설치, 광주 탈핵 및 에너지 전환 전초기지 건설 등의 청사진을 내놨다.

각 후보들의 출마 선언 시점까지도 광주·전남 민심은 혼전 양상을 띠었다. 손학규·김두관 후보 등 비문 주자들도 호남 민심에 오랫동안 공을 들여왔다. 손학규 후보는 대선 출마를 선언한 뒤 민주당 후보들 가운데 가장 먼저 광주를 찾았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생가가 있는 전남 신안 하의도를 방문했다. 김 전 대통령의 슬로건이던 ‘준비된 대통령’도 사용하고 있다. 김두관 후보는 1995년 결성된 전국 기초자치단체장들의 모임 ‘머슴골’을 통해 꾸준히 호남 지역 인사들과 교류하며 인적 네트워크를 쌓아왔다. 대선 출정식도 전남 해남에서 열었다. 전북 출신인 정세균 후보는 현재 자신이 유일한 호남 출신 후보라는 점을 내세운다.

문재인 후보를 돕고 있는 한 인사는 “5월까지만 해도 지역의 시민사회나 정치권, 오피니언 리더들 사이에선 김두관 후보가 우세였고, 예비경선 이후에는 손학규 후보가 치고 올라오는 분위기였다”며 이렇게 전했다. “특히 손학규 후보는 지난 몇 년 동안 지역 사회에 공을 정말 많이 들였다. 공을 들였다는 건 스킨십을 잘했다는 거다. 손 후보가 직접 시의원·구의원들에게 몇 번씩 전화를 걸었더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 과정 속에서 감동했다는 사람들이 참 많더라.”

2002년 3월16일 열린 민주당 광주 경선에서 누구도 예상치 못한 1위를 차지한 노무현 당시 후보가 지지자들과 함께 승리의 ‘브이’자를 그려 보이고 있다. 한겨레 자료

2002년 3월16일 열린 민주당 광주 경선에서 누구도 예상치 못한 1위를 차지한 노무현 당시 후보가 지지자들과 함께 승리의 ‘브이’자를 그려 보이고 있다. 한겨레 자료

친노에 대한 ‘앙금’ 논란

비문 주자들은 호남의 민심 저변에 여전히 흐르고 있는 친노에 대한 ‘앙금’이 변수로 작용하길 기대하는 눈치다. 문재인 후보는 2006년 5월 한 기자간담회에서 ‘부산정권’ 발언으로 파문을 일으켰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당선 뒤 “호남이 날 좋아서 찍었느냐, 이회창이 싫어서 찍었지”라는 발언으로 논란을 부른 바 있다. 인사나 지역 현안 등과 관련해 “호남이 번번이 물을 먹었다”는 인식이 여전한 것도 사실이다. 손학규 후보의 한 측근은 “노무현 정부에서 광주·전남이 받았던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며 “게다가 안철수도, 문재인도, 새누리당의 박근혜도 모두 영남 아닌가. 2002년의 영남 후보론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손학규 대표 시절 비서실 차장을 지낸 이남재씨는 “광주가 노무현 대통령을 전략적으로 당선시켰지만 결국 소외됐다”며 “다른 지역의 경선 결과에 휩쓸리는 게 아니라 광주·전남은 오히려 다른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김두관 캠프의 염동연 상임경선대책위원장은 8월23일 지역 언론인들과의 간담회에서 “참여정부 당시 호남 인맥 청산의 주역이었던 문재인 후보가 호남의 아들을 자처하는 것은 소가 웃을 일”이라며 직격탄을 날렸다. 전남 보성 출신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무특보와 열린우리당 사무총장을 지낸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배경에는 문재인 후보 등 참여정부 핵심 인사들의 책임이 있다”며 “자신의 행태에 대한 진정한 반성과 고백이 선행되어야 한다”고까지 했다.

문재인 캠프 공동선대본부장인 노영민 의원이 최근 문 후보의 지역 방문 행보를 두고 “호남 상륙작전을 수행하며 문 후보에 대한 오해가 불식됐다”고 언급한 대목도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손학규 캠프의 김유정 대변인은 “당내 경선에서 굳이 ‘상륙작전’이라는 군사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5월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광주 시민들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고통이 될 수 있다”고 비난했다. 정세균 후보 쪽도 “문재인은 호남을 적지로 생각하느냐”고 꼬집었다. 반면 문재인 후보를 돕고 있는 한 인사는 “참여정부 시절의 인사 소외라는 것은 정치인들이 만들어낸 허구”라며 “정서적으로만 남아 있는 인식을 문재인 후보에게 추궁하는 것은 문제”라고 반박했다. 이렇듯 호남 민심을 잡으려는 각 캠프의 신경전은 격화되는 양상이다.

문재인, 여론조사 선두

실제 바닥 민심은 어떨까. 여론조사에서는 문재인 후보가 일단 앞서 있다. 가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서치뷰와 함께 6월15일부터 이틀 동안 실시한 민주당 대선주자 지지도 조사에서 문 후보는 32.6%로 1위를 차지했다. 손학규 고문이 19.1%로 2위였다. 한 달 뒤 조사에선 문재인 후보가 35.2%, 손학규 후보가 22.4%였다. 경선 초반 4연승을 기록한 문 후보 쪽도 광주·전남에서의 넉넉한 승리를 점치는 분위기다. 송창욱 공보팀장은 “다른 후보들이 지금까지의 경선 과정에서 국민들에게 감동 있는 메시지를 보내지 못했기 때문에 경선의 역동성이 나타나지 못하는 것으로 본다”며 “주말(9월1일)로 예정된 전북 경선 결과를 지켜봐야 하겠지만 현재의 구도가 광주·전남에서도 이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길 수 있는 후보를 밀어준다는 특유의 ‘전략적 선택’이 이번 경선 국면에도 작용하고 있다는 게 문 후보 쪽의 대체적인 관측이다.

가까스로 봉합되긴 했지만, 여전히 비문 주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불공정 경선’ 논란이 반전의 계기가 될 가능성도 낮아 보인다. 광주시에 사는 박아무개(40·남·학원강사)씨는 “막상 경선을 한다니까 관심이 생겼지만 경선룰 문제가 불거지는 것을 보고 미쳤구나 싶었다”며 “4·11 총선 때도 차려준 밥상을 걷어찬 민주당이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비판했다. 구아무개(32·남·회사원)씨도 “박근혜 후보가 5·16을 혁명이라고 말하는 판에 어떻게든 정권을 교체해야 한다는 것이 광주의 전반적 정서”라며 “다른 후보들이 주장하는 대로 룰을 수정한다고 해도 문재인 후보가 이길 것 같다”고 했다.

갈 길이 바쁜 각 후보들은 아직 무대에 등장하지 않은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존재와도 경쟁해야 한다. 민주당 후보들 중에선 문 후보의 지지도가 높지만, 안철수 원장을 포함하면 출마 선언이 임박한 것으로 알려진 안 원장이 광주·전남에서도 견고한 1위를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손학규 후보가 “안철수 원장과 가장 잘 조화를 이루는 후보가 바로 나”라며 “정권 교체는 손(학규)·안(철수)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한 참모는 “지역 기반이 서로 겹치는 문재인·안철수 조합보다 수도권과 영남이 결합할 수 있는 손학규·안철수 조합이 본선 경쟁력 측면에서 훨씬 강력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반면 김두관 후보 쪽에선 상대적으로 ‘안철수 현상’에 부정적인 기류가 강하다. 그동안 “실체가 없는 안철수 원장과 어떻게 공동정부를 하느냐”는 의견을 밝혀온 김 후보는 최근 “(안 원장이) 직접 나갈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며 안 원장의 무소속 출마 가능성을 점쳤다.

이미 단일화 국면을 향한 시선

야당의 전통적 지지 기반이던 호남에서조차 민주당 후보들에 대한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지 않는 걸 단순히 민주당 지지세의 약화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는 지적도 있다. 지역 정가 흐름에 밝은 한 인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호남이 전략적인 선택을 한다는 건 우리의 세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다. 호남이기 때문에 찍어주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누가 더 가깝기 때문에 찍어주고 하는 시대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광주·전남은 민주당이 가야 할 큰 방향과 시대정신을 누가 계승·발전할 수 있는지를 본다. 그렇게 노무현을 지지했다. 지금은 문재인이든 안철수든 다른 누구든 박근혜를 이길 수 있는 후보가 누구냐는 게 핵심이다.” 민주당의 어느 후보를 선택해야 안철수 원장과 야권 단일 후보 결정 과정을 거쳐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를 누를 최대한의 시너지를 창출할 수 있느냐에 호남의 시선이 이미 가 있다는 이야기다. 9월6일 광주·전남의 선택이 어찌될지 여야를 불문하고 신경을 곤두세우는 까닭이다.

송호균 기자 ukno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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