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겨야 한다. 그런 절박함이 있었다. 8년 동안 지친 미국 국민이 많았다. 공화당 대통령은 이라크전쟁을 일으켰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경제도 죽쒔다. 2008년엔 금융위기가 왔다. 그해 대통령 선거는 진보에 주어진 기회였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권력은 총구에서 나오지 않는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권력은 생각의 총알과 말의 폭탄으로 얻어진다. 선거라는 전쟁터에서 사용되는 생각과 말의 실탄이 슬로건이다. 버락 오바마 선거운동원들은 어디서나 ‘변화!’(Change)와 ‘예스 위 캔!’(Yes, we can)을 외쳤다. 오바마는 대통령에 당선됐고, 미국 민주당은 8년의 야당 생활을 끝냈다.
‘가치-정책-후보-감성’ 드러내는 말의 조합
슬로건은 ‘슬로곤’(slogorn)이라는 스코틀랜드어에서 왔다. ‘군대’와 ‘함성’이라는 뜻이 섞여 있다. 슬로건은 선거의 전부가 아니지만 쓸모 있는 무기다. 여당으로부터 권력을 되찾아야 하는 야당의 처지에서 더 그렇다. 전세계의 정치 컨설턴트가 이구동성으로 최고로 꼽는 정치 슬로건도 1992년 미국 대선 때 등장했다. 2008년과 상황이 비슷했다. 보수 공화당이 1980년 대선에서 승리한 뒤 1992년까지 집권하고 있었다. 보수의 시대였다. 시골로 취급받는 아칸소주 주지사 출신 빌 클린턴이 이길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탁월한 선거 전략과 슬로건이 힘을 발휘했다.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It’s economy, stupid)라는 구호는 조지 부시(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아버지)를 아프게 찔렀다. 민주당은 권력을 되찾았다.
그리고 2012년 한국의 야당은 권력을 찾아오겠다고 벼르고 있다. 두 번의 싸움 중에서 이미 한 번 졌다. 민주통합당의 총선 슬로건은 ‘MB 심판’이었다. 무기력한 슬로건이었다. 선거에서 졌다. 1당이 되지 못했다. 행정부 권력을 다투는 대통령 선거 하나만 남았다. 김두관 경남도지사와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을 빼고 야권 대선 후보들이 잇달아 출마를 선언했다. 슬로건 싸움도 시작됐다.
선거 슬로건도 카피라이팅의 한 종류다. 말하자면 대통령이라는 상품을 파는 광고문구다. 소비자들의 오해가 있다. 좋은 카피라이팅은 그냥 멋진 말이 아니다. 슬로건은 고도의 마케팅 전략의 일부다. 상품의 기능을 앞세울 것인가, 아니면 상품이 상징하는 브랜드 가치를 내세울 것인가? 이 상품이 여타 비슷한 상품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슬로건은 이런 질문들에 답하는 과정에서 나온다. 선거 슬로건도 마찬가지다. ‘가치-정책-후보-감성’을 단번에 드러내는 절묘한 말의 조합이어야 한다. 오바마 캠프 선거 전략가인 데이비드 액설로드는 미국 사회를 여러 측면에서 격변기로 판단했다. ‘유권자들의 적극적이고 감정적인 상태를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변화’와 ‘예스 위 캔’ 슬로건은 그렇게 탄생했다.
2012년의 손학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캠프에도 한국판 액설로드가 있다. 손낙구 보좌관과 김계환 비서관 등 참모진이다. 이들이 만든 ‘저녁이 있는 삶’ 슬로건이 화제다. 다른 좋은 선거 슬로건처럼, ‘저녁이 있는 삶’도 그냥 멋부린 말이 아니다. 손학규 캠프는 슬로건 탄생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손학규 고문은 오랫동안 한국 경제의 미래를 고민해왔다. 2011년 9월 국회교섭단체 연설을 앞두고 참모진에 숙제를 줬다. “경제위기에 대한 시장 근본주의적 대책과 한국식 낡은 성장 정책을 대체할 새로운 성장 모델을 찾아보라.” 의원단과 참모진이 여러 번 토론했다. ‘장시간 짜내기 노동’이 아니라 ‘일하는 사람 각자의 창의력에 기반한 시장경제 모델’로 방향을 정했다. 그 모델의 대전제는 노동시간 단축이었다. 민주노총 출신 손낙구 보좌관은 “노동계에서도 이미 추진력을 상실한 노동시간 단축 어젠다를 손 대표가 밀어붙일 수 있을지 처음엔 의구심이 들었다”고 말했다.
풍경이 있는 슬로건, 저녁이 있는 삶
손 보좌관의 의욕을 되살린 것은 한 통의 전화였다. 제보자는 자신을 유럽 출장이 잦은 대기업 직원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유럽에 가면 회사의 경쟁력은 꿀릴 게 없지만 휴가 이야기만 나오면 늘 얼굴이 화끈거렸다”며 “2주 이상의 여름철 집중휴가제가 생활의 일부로 자리잡은 유럽 친구들의 바캉스 계획 이야기에 (한국 직원이) 끼어들기 창피했다”고 말했다. 손 보좌관은 “대기업의 젊은 직원이 공감하는 정책이라면 한번 해볼 만하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손학규 고문은 노동시간을 단축해 일자리와 삶의 질을 동시에 개선하는 방안을 정책으로 채택했다.
선거메시지 담당 김계환 비서관은 이렇게 구체화된 정책과 가치를 어떻게 표현할지 고심했다. 손 고문과 참모진들은 여러 번 회의했다. 브레인스토밍(자유발언)도 했다. 숱한 대화 속에서 참모들은 문득 유럽의 삶과 한국의 삶을 대비했다. 대다수 한국인들은 저녁이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음에 착안한다. 참모진도 예외가 아니었다. 저녁이 없는 삶은 압축성장의 그늘이고, 한국 사회의 슬픈 자화상이었다. ‘저녁이 있는 삶’은 그렇게 탄생했다. 독립영화 감독인 손 고문의 둘째딸 원평씨도 “아빠가 20년간 정치 활동을 하며 사용한 메시지 중에 가장 가슴에 와닿는다”라고 지지했다. 이 슬로건은 손 고문의 저서 제목으로도 사용됐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은 아직 전체 슬로건을 정하지 않았다. ‘우리나라 대통령’과 ‘3대 교체-정권 교체, 정치 교체, 시대 교체’는 출마 슬로건이다. 선거 전체에 대한 슬로건이 아니라 문 고문이 왜 출마했는지에 집중한 슬로건이다. 문 고문 캠프의 설명을 종합하면, 이 슬로건에 담긴 콘셉트는 ‘화합’과 ‘통합’이다. 문 고문 캠프의 선거메시지 담당자는 “편을 가르거나 지역주의에 기대는 기존의 정치를 안 하겠다는 것이다. 모든 국민이 함께 동행하는 통합하고 소통하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뜻”이라고 밝혔다. ‘3대 교체’라는 슬로건은 ‘대통령이 되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나왔다. 정권 교체는 국민 다수가 가진 당연한 분노와 요구다. 정치 교체는 기존의 여의도 정치가 아니라 국민이 함께하는 정치를 하겠다는 뜻이다. 시대 교체는 경제민주화의 의지를 반영한다. 시장이 공정한 분배를 막는 것도 잘못이고, 진보가 성장을 이야기하면 보수로 비치는 것도 구시대의 사고방식이라는 두 고민에서 나온 구호다. 메인 슬로건은 1~2주 뒤 나올 예정이다. 문 고문 캠프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선거 캠페인을 맡았던 전문 카피라이터 정철씨가 전체 슬로건 작업을 총괄하고 있다. 그는 지난 총선 때 ‘바람이 다르다’는 작품을 만들어냈다.
평등과 서민 화두로 삼은 김두관
정세균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은 ‘빚 없는 사회’ ‘편안한 나라’를 내건다. 고병국 공보담당은 “‘빚 없는 사회’ 슬로건은 향후 5~10년 뒤 한국 사회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공부하는 과정에서 나왔다”고 밝혔다. 정 고문 캠프는 한국 사회의 위기 요인으로 가계 부채, 국가 부채, 저출산·고령화 사회 등을 꼽았다. 고민을 관통할 단어를 찾아헤맸다. 그게 ‘빚’이었다. 빚은 은유이자 직설화법이다. 가계 부채는 실제의 빚이다. 저출산·노령화 사회 현상은 우리 세대가 미래 세대에게 넘기는 은유적 빚이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 실패는 국민에게 빚을 넘기는 행위였다. 고병국 공보담당은 “이를 관통하는 단어는 빚이며, 빚 없는 사회로 가는 것이 당면한 복합적 위기를 해결할 키워드”라고 설명했다.
김두관 지사는 7월 출마를 앞두고 있다. 당연히 아직 슬로건을 공개하지 않았다. 강병원 홍보위원은 “지난 6월25일 국회에서 열린 민주평화국민연대(민평련) 토론회에서 김 지사가 한 발언에 슬로건 화두가 담겨 있다”고 밝혔다. 이날 김 지사의 발언 중에 눈에 띄는 단어와 표현이 있었다. “이제 우리는 감히 평등을 말해야 한다. 평등은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 원리”라고 강조했다. ‘서민’이라는 단어도 여러 차례 사용했다. 김 지사 캠프는 한국 사회의 과제로 ‘평등’을, 후보 브랜드 가치로 ‘서민’을 꼽은 셈이다. 두 가지 콘셉트를 절묘하게 표현하는 슬로건은 7월 초에 공개된다.
전문가들은 어떻게 평가할까. 홍보커뮤니케이션 업체 ‘에그피알’의 홍순언 대표는 오랫동안 광고홍보 업계에서 활동한 베테랑이다. 김대중 정부 시절 민주당 국회의원의 선거를 도운 경험도 있다. 그도 ‘저녁이 있는 삶’의 장점을 우선 언급했다. “가수 ‘버스커버스커’ 노래처럼, 이미지화가 유행이다.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슬로건은 일단 이미지화가 된다. 저녁 풍경이 떠오르는 것이다. 또 지금까지 정치인 손학규가 가진, 공부는 잘했는데 친구는 없을 것 같은 서울대생 이미지를 깨고 20~30대 직장인들과 그들의 아내에게 호소할 수 있는 슬로건인 듯하다. 박근혜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을 꺾으려는 후보는 슬로건으로 뭔가를 선명하게 보여줘야 할 것이다. 나는 손학규 고문이 그런 선명한 슬로건을 정하기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왔는데 이번 슬로건으로 본인의 이미지를 커버했다. 20~30대가 자신의 지지 기반임을 명확히 했다. 슬로건에서 부정적 어휘는 경계 대상이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 같은 슬로건은 야당 성향의 지지자를 뭉치게 하는 효과는 있지만 전체를 아우르는 안정성은 없는데, ‘저녁이 있는 삶’은 손 고문 본인의 이미지를 개선하고 박근혜라는 1위 후보를 견제하며 동시에 야당답지 않은 포용력도 담은 슬로건이다.”
그렇다면 안철수의 슬로건은?
홍 대표는 문재인 고문의 출마 슬로건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밝혔다. “문재인 고문의 출마 슬로건은 2002년 대선에 나온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의 ‘대한민국 국민통합’ 슬로건처럼 좀 모호한 듯하다. 문 고문의 슬로건은 선명한 느낌일 거라 예상했다. ‘우리나라 대통령’은 선명성도 놓친 것 같고 처음 들어도 무슨 의미인지 바로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슬로건 뒤에 ‘문재인’ 이름을 넣어도 확 와닿지 않는다.” 홍 대표는 “카피라이팅을 할 때 부정적 표현이나 부정문으로 시작하는 것은 좋지 않다. ‘빚 없는 사회’라는 슬로건은 빚이 없어 빚으로 고생했을 것 같지 않은 정세균 고문의 이미지와 잘 맞지 않고, 부정적 단어로 시작한 점이 아쉽다. 이미지화는 잘되는데, 다만 그 이미지가 남미를 연상시킬 수도 있을 듯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안철수 원장의 경우 2002년 정몽준처럼 국민 전체를 아우르는 방향의 슬로건을 고민 중일 것으로 예측했다.
*참고문헌 (이준구·청아출판사)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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