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와 문재인의 ‘숙명의 대결’이 시작됐다. 총선에서 부산·경남(PK) 전투를 한 달 앞두고 본격화한 싸움은 12월 대선까지 닿아 있다. 여야의 유력 대선주자가 ‘정치철학’을 놓고 주고받은 얘기들에는 시퍼렇게 날이 서 있다.
기습적이었다.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은 3월7일 관훈클럽 초청토론회에서 문재인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을 작심한 듯 공격했다. 박 위원장은 ‘정치인 문재인의 잠재력과 확장성’에 대한 질문에 “도대체 정치철학이 뭔가”라고 답했다. “문재인 후보는 노무현 대통령의 비서실장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노 대통령이 추구하는 가치나 정치철학, 정책에 대해 가장 잘 알 수 있는 분이다. 그런데 최근 보면 노 대통령이 국익을 위해 추진했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라든가, (제주) 해군기지에 대해 반대하고 있다. 이런 부분은 이해하기 어렵다.” 최근 한명숙 민주당 대표 등을 향했던 “야당의 말 바꾸기”라는 공격 수위가 ‘정치인 문재인’에 대해서는 “정치철학 부재”로 높아진 것이다.
‘야당심판론’ 대 ‘정권심판론’
반격도 거셌다. 문 상임고문은 이날 오후 늦게 ‘민주통합당 부산 사상구 국회의원 후보 문재인’ 명의로 낸 보도자료에서 박 위원장의 ‘불통의 리더십’을 정조준했다. 그는 “한-미 FTA나 제주 해군기지나, 국민들이 문제를 제기하면 귀를 열고 소통하면서 문제를 풀어가는 것이 정치철학이다. 거꾸로 그냥 무시하고 마구 밀어붙이는 것이 박근혜 비대위원장의 정치철학인지는 모르겠다”며 “밀어붙이기로 일관하는 것이 옳은 태도이냐? 소통을 거부하는 권위주의 정치철학이 아니냐?”고 말했다. 한발 더 나아가 ‘역사관’ 문제로 확전을 꾀했다. 문 상임고문은 “박 위원장은 유신독재와 유신체제 시절의 인권유린에 대해 한 번도 잘못된 것이 있다고 시인한 적이 있느냐?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소신이 있는지 거꾸로 제기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런 정면 충돌에는 ‘야당심판론’(새누리당) 대 ‘정권심판론’(민주당)이라는 총선 구도가 깔려 있다. 민주당은 ‘MB 정부 심판론’을 내세워 박 위원장을 “이명박 대통령이 운전하는 자동차 조수석에 앉은 사람”이라고 공격하고 있다. 이른바 이 대통령과 박 위원장의 ‘공동책임론’이다.
그러나 박 위원장은 ‘야당의 말 바꾸기’를 거론하며 역으로 야당을 몰아붙이고 있다. 문 상임고문에 대한 공격에는 총선 선거전에서 ‘박근혜 대 친노’ 구도가 불리하지 않다는 판단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2월20일 “그분(친노)들 스스로가 폐족이라고 부를 정도로 국민의 심판을 받은 분들이 다시 모여서 지난 정권에서 추진했던 정책들에 대해 계속 말을 바꾸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심판 대상”이라고 말했다. 한-미 FTA에 대한 민주당, 특히 친노 인사들의 태도 변화를 겨냥한 것이었다. 관훈클럽 토론회에서도 “적어도 지금 야당은 나한테 공동책임론을 얘기할 자격이 없다. 나를 당 안팎에서 ‘여당 내 야당’이라고 부른다. 광우병 촛불시위, 미디어법, 세종시, 신공항 등 중대한 문제에 대해 내 입장을 분명히 밝혀왔다”고 말했다. 이명박 정권의 실정에 자신은 책임질 게 없다는 주장이다.
문 상임고문은 ‘말 바꾸기’ 공격의 표적이 된 사안에 대해 건건이 반박했다. 한-미 FTA에 대해서는 “독소조항이 있으니 재협상을 통해 삭제 또는 수정해야 한다”고 했다. 제주 해군기지에 대해서는 “참여정부가 결정했다는 것을 공사 강행의 명분으로 삼지 말라”며 강정마을이 사업에 적합한지 재검토할 것을 요구했다. 문 상임고문은 지난해 9월 강정마을 해군기지에 대해 “참여정부가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점이 있다”고 사과한 바 있다. “일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주민들과 소통하고 설득하는 절차를 밟아나갔어야 하는데, 지금도 여전히 과거식으로 일방적으로 밀어붙여서 상황이 악화했다”는 것이다.
문 상임고문에게 득될 게 없다는 지적도
두 사람의 공방은 이번 총선의 최대 승부처인 PK 선거판에서 초반에 상대의 기세를 꺾으려는 기싸움 성격이 짙다. PK 선거판은 이미 ‘박근혜와 문재인의 싸움’으로 규정돼 있다. 박 위원장은 영남에 교두보를 만들려는 문 상임고문을 반드시 막아야 하고, 문 상임고문은 반대로 박 위원장을 넘어야 한다. 영남 지역 선거 성적표에 따라 두 사람의 대선 가도는 달라진다. 박 위원장의 이번 발언은 상승 추세인 문 이사장의 지지율과 파급력이 자신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 ‘선공’을 날린 건 문 상임고문이었다. 그는 사태로 정수장학회 문제가 불거지자, 정수장학회를 ‘장물’이라고 규정하며 박 위원장의 결자해지를 촉구해왔다. 정수장학회는 참여정부 시절 국가정보원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진실화해위원회에서 국가가 강탈한 것으로 인정했고, 최근 법원도 위법성을 인정했다. 박 위원장은 “법에 어긋난다거나 잘못된 게 있었으면 벌써 오래전에 끝장이 났겠죠”라고 말했다. 문 상임고문은 “국정원, 진실화해위원회, 법원 결정을 부정하는 것을 납득하기 어렵다. 형식상 (정수장학회의) 이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관련이 없다는 것은 무책임한 자세”라고 반박했다.
적진에서 싸우는 장수로서 문 상임고문이 박 위원장에게 적극적인 공세를 폈고, 그동안 침묵하던 박 위원장이 문 상임고문에게 작심하고 화살을 날린 셈인데, 정치적 타격은 문 상임고문이 더 클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박 위원장의 공격은 참여정부의 실정에 대해 책임론을 제기한 것인데, 박 위원장에게 도전하는 처지인 ‘정치 신인’ 문 상임고문으로서는 별로 득이 될 게 없다는 것이다.
박 위원장은 문 상임고문 지역구에 공천을 받은 손수조 새누리당 후보 띄우기에도 열심이다. 그는 “손 후보의 당찬 모습이 참 아름답다. 그런 젊은 패기로 선택을 받으면 지역 발전을 위해서도 좋은 역할을 해낼 것”이라고 손 후보를 추켜세웠다. ‘문재인 후보의 당선 의미를 축소하기 위해 공천한 게 아니냐. 져도 좋다는 마음 아니냐’는 질문에는 “공천할 때는 당선될 거라고 기대하고 한다”고 말했다.
크게 앞서는 문 상임고문 지지율
최근 여론조사에서는 문 상임고문이 손 후보에 크게 앞서고 있다. 엠브레인 3월5~6일 조사에서는 44.5% 대 25.1%, 같은 날 리서치앤리서치 조사에서는 46.1% 대 23.8%,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3월5일 조사에서는 47.1% 대 34.2%였다. 새누리당 부산 사상구 당원협의회가 3월7일 “손 후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결의문을 내는 등 새누리당 지역 당심도 호의적이지만은 않다. 문 후보 쪽은 “분위기가 괜찮은 건 맞지만, 방심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지은 기자 jieu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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