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최고사령관.’
김정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국방위원장이 숨진 지 일주일 만인 2011년 12월24일, 북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기관지인 5면에 실린 ‘정론’(칼럼)의 제목이다. 200자 원고지 27매가 넘는 긴 글이다. 김정은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을 ‘백두산 천출 위인’으로 표현한 이 칼럼은 말미에 “심장으로 선언한다”며 이렇게 적어놨다.
“우리는 김정은 동지, 그이를 우리의 최고사령관으로, 우리의 장군으로 높이 부르며 선군혁명 위업을 끝까지 완성할 것이다. … 김정은 동지이시여, 인민이 드리는 ‘우리 최고사령관 동지’의 그 부름을 안으시고, 김일성 조선을 영원한 승리에로 이끄시라!”
치밀하게 짜인 한 편의 ‘연속극’
눈여겨볼 대목은 따로 있다. 칼럼이 실린 날짜다. 김정일 위원장을 ‘최고사령관’에 추대한 인민군 중대정치지도원대회가 열린 게 이날로 꼭 20년 전인 1991년 12월24일이다. 당시 정세는 의 표현처럼 “지구상의 첫 사회주의국가에서 70여 년 동안 날려온 혁명의 붉은 기가 내리워”졌고,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군대가 총 한 방 쏘아보지 못하고 무맥하게 와해되고 있을 때”였다. 북한의 든든한 ‘배후’였던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소련)이 그보다 불과 보름여 전에 공식 해체됐다. 그 20년 전의 기억을 떠올려, 은 이날 김정은 부위원장에게 ‘최고사령관’이란 칭호를 부여한 게다.
2011년 12월19일 낮 12시 김정일 위원장 사망 소식을 발표한 이후 12월28일 영결식이 열리기까지 열흘 동안, 을 비롯한 북쪽 매체의 보도 내용은 치밀하게 짜인 한 편의 ‘연속극’을 떠올리게 한다. ‘3대 세습’이란 희대의 각본을 짜맞추려고 동원한 ‘상징 조작’의 치밀함은 북한 사회의 현실을 새삼 웅변해줬다. 가히 선전·선동의 극치였다.
이 기간 동안 바뀐 김정은 부위원장에 대한 호칭부터 살펴보자. ‘주체혁명 위업의 위대한 계승자’란 표현은 시작에 불과했다. ‘당 중앙위원회 수반’과 ‘최고사령관’, ‘우리 혁명무력의 최고영도자’란 표현이 등장하더니, ‘우리 당과 우리 인민의 최고영도자’란 호칭이 나왔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 당과 국가, 군대의 최고영도자’란 수사가 등장하기에 이른다. 사실상 북쪽의 모든 권력을 틀어쥔 모양새다. 이기동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은 12월28일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주최 토론회에서 “김정은으로 권력이 넘어가는 과정이 너무 빠르게 진행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데, 북 상황에서 이런 현상은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그의 설명을 좀더 들어보자.
“(김일성-김정일 세습 때를 보면) 북의 권력 세습은 3단계로 나눠 이행한다. ‘후계자 유일 지도체계’에서 출발해 ‘후계자 유일 영도체계’를 거쳐, ‘수령 유일 영도체계’를 확립해간다. 세습 과정에서 권력 공백이나 누수를 최소화하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진 과정이다. 첫 단계인 ‘후계자 지도체계’는 ‘수령’이 살아 있는 동안, 후계자가 그의 사상과 영도를 받들어 당과 국가의 전반적 사업들을 지도하는 시스템이다. ‘후계자 영도체계’는 ‘수령’이 사망한 뒤, 후계자가 수령의 영도체계를 물려받지 않은 상황에서 수령을 대신해 당과 국가의 전반적 사업을 이끌어가는 시스템이다. 마지막으로 ‘수령 영도체계’는 후계자가 수령의 영도체계를 물려받아 후대수령으로서 당과 국가의 전반적 사업을 이끌게 된다. 세습의 완성이다.”
국정 운영에서 노동당 위상 높아질 듯
돌이켜보자. 김 위원장이 후계자로 공식 확정된 것은 1974년 2월 노동당 5기 8차 전원회의 중앙위원회에서였다. ‘후계자 지도체계’의 시작인 셈인데, 김 위원장 사망 이후 ‘37년 권력’이란 얘기가 나오는 것은 이 시점부터 사실상 ‘공동 집권’을 한 것으로 여긴 셈법이다. 이 무렵 그에겐 ‘당 중앙’이란 호칭이 붙었지만, 권력 세습에 대한 비판을 의식해 그 ‘정체’를 부러 외부에 공개하지는 않았다. 1994년 7월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부터 1997년 노동당 총비서 취임을 전후로 ‘후계자 영도체계’와 ‘수령 영도체계’ 시기가 갈린다는 게 북한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북쪽의 ‘3대 세습’은 2008년 8월 김 위원장의 뇌졸중 발병 이후 본격화했다는 게 정설이다. 이기동 연구위원은 “(김정은의 생일인) 2009년 1월8일 후계자 지도체계가 출범했고, 이듬해인 2010년 9월28일 제3차 노동당 대표자회를 통해 후계자 지도체계를 당 중앙군사위를 중심으로 확립했다”며 “이때부터 실질적인 2인자로 활동하다가, 김 위원장 사망 직후 그를 중심으로 당과 국가의 전반적 사업을 이끌어가는 ‘후계자 영도체계’가 자리를 잡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마치 국가 주요 기관의 건물이 정전이 되면, 바로 비상전력 시스템이 가동되는 것과 같은 이치인 셈”이라고 비유했다.
김정일 위원장 때에 견줘 ‘초단기 속성 과정’으로 최고권력을 세습받은 김정은 부위원장 체제의 ‘불안정성’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북쪽 권력 엘리트층의 ‘기득권’ 유지와 ‘공멸 방지’ 심리가 적어도 단기적으론 새 체제의 안정화에 주력하는 쪽으로 쏠릴 것이란 데 이견은 많지 않다. 빠른 속도로 ‘실질적 리더십’을 장악하려는 김 부위원장의 다음 과제는 뭘까? ‘제도적 리더십’을 안착시키는 게다.
‘우리 당과 국가, 군대의 최고영도자’란 수사가 드러내듯 김 부위원장은 이미 북쪽의 모든 권력을 장악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후계자 영도체계’를 지나 ‘수령 영도체계’로 나아가려면 넘어야 할 산이 많이 남아 있다. 북한의 권력은 당 중앙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당 영도체계’와 국방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국가 영도체계’로 나뉘어 있다. 이 두 가지를 법과 제도에 따라 공식적으로 승계하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 김 부위원장이 노동당 총비서와 국방위원장 직책을 언제 떠맡느냐에 북한 전문가들의 관심이 모이는 이유다.
이와 관련해 최완규 북한대학원대학교 부총장은 “이번 북의 권력 승계 과정에서 권력의 중심추가 군에서 당 쪽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최 부총장은 “김일성 주석은 군권에 비해 당권이 상대적으로 취약했기 때문에, 권력 승계 과정에서 김정일 위원장에게 당권을 틀어쥐게 만들었다”며 “하지만 김 위원장이 (김 주석 사망 뒤) 강력한 당권을 기반으로 군권을 장악해나가는 과정에서, 군 쪽으로 다시 권력의 중추가 넘어갔다”고 말했다. ‘선군정치’로 대표되는 군 중심의 권력이 당 쪽으로 기운다면, 북쪽이 조금 더 ‘정상국가’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란 해석이 가능하다. 이 또한 ‘3대 세습’이란 기이한 권력 승계가 낳은 ‘역설’이라 부를 만하다.
‘총알도 중요하지만 사탕도 중요하다’
“김정은 체제 이행 과정에서 노동당이 ‘킹메이커’ 역할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북한 전문가인 루디거 프랭크 오스트리아 빈대 교수도 최근 미국 존스홉킨스대에 딸린 ‘한미연구소’에 기고한 글에서 비슷한 전망을 내놨다. 프랭크 교수가 1997년부터 2010년까지 김정일 위원장에 대해 북쪽 매체가 사용한 호칭을 분석해 내놓은 자료를 보면, 2000년대 중반까지 가장 자주 등장한 것은 ‘지도자’(영도자)란 표현이었다. 하지만 김정은 세습체제가 가동되기 시작한 2008년을 기점으로 ‘당 총비서’란 표현을 사용하는 빈도가 더욱 급격히 늘면서, 장군·최고사령관·지도자 등의 표현이 거의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두고 프랭크 교수는 “향후 북 체제가 당을 중심으로 굴러갈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풀었다.
권력 세습이 제도적으로 마무리되더라도, ‘김정은 체제’의 안착을 위해선 한 가지 숙제가 더 남는다. ‘수령 유일 영도체계’를 완성하려면 이른바 ‘인격적 리더십’을 확보해야 한다. 그 전제는 ‘민심’을 얻는 일이다. 민심은 강력한 지도력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성과를 내야 얻을 수 있다. 카리스마도, 업적도 없는 20대 젊은 지도자에겐 버거운 과제다. 어떻게 해야 할까?
김정일 위원장은 최근 몇 년 새 부쩍 이른바 ‘인민생활 향상’을 강조해왔다. 2009년을 전후로 북쪽에서 ‘총알도 중요하지만 사탕도 중요하다’는 표현이 등장한 배경이다. 이 보도한 김정일 위원장의 마지막 현지 지도는 사망 이틀 전인 12월15일 이뤄졌다. 이날 김 위원장은 김정은 부위원장과 함께 평양 통일거리에 자리한 하나음악정보센터와 개점을 앞둔 광복지구상업중심에 들렀다. 특히 관심을 끈 것은 평양의 3대 백화점으로 꼽히던 광복백화점을 확장해 우리의 대형마트처럼 꾸민 광복지구 방문이었다. 김 위원장의 마지막 대외활동 역시 ‘인민생활 향상’을 위한 행보였던 게다.
이와 관련해 눈길을 끄는 ‘상징 조작’이 하나 더 있다. 이 12월25일치 5면에 올린 장문의 ‘정론’이다. 이 매체에 따르자면, 2011년 12월16일 밤 9시13분 김정일 위원장이 ‘수표’(서명)한 문건 하나가 내려왔다. “양력설을 맞아 평양 시민들에게 청어와 명태를 공급하는 문제”에 대한 지시 사항이었다. 북쪽의 공식 발표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김 위원장이 숨을 거두기 불과 11시간 전의 일이다. 그런데 12월18일 똑같은 문건이 다시 하달됐다. 이번엔 김정은 부위원장 명의였다. 그리고 이튿날인 12월19일 김 위원장의 사망 사실이 발표됐다.
‘김정은 시대’ 앞날의 방향성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김 위원장 명의의 마지막 문건과 김 부위원장 명의의 첫 문건이 똑같이 ‘인민생활 향상’에 관한 내용임을 강조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실제 열흘의 장례 기간 동안 북쪽 매체들은 이른바 ‘더운물 봉사매대’를 비롯해 강추위 속에 조문을 나온 주민들을 위한 김정은 부위원장의 ‘은정 깊은 조치’에 대해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뜨거운 물에 타먹을 사탕가루(설탕)며 산꿀·콩우유 가루와 빵·과자 등이 김 부위원장의 ‘직접 지시’에 따라 조문장으로 보내졌단다. 이것만으로 ‘김정은 시대’의 앞날을 내다보는 건 지나치게 성급하다. 다만 그 방향성만은 얼핏 가늠해볼 수 있을 듯싶다. 하긴 이것 말고 ‘민심’을 얻을 방법이 달리 뭐가 있는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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