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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TA만큼 위험한 날치기

한-미 FTA 미 의회 통과로 거세진 정부·여당의 비준 압박… 시한 못박은 한나라당 공세에 단호한 저지 외치는 민주당
등록 2011-10-19 13:42 수정 2020-05-03 04:26
» 황우여 한나라당 원내대표(오른쪽)와 김진표 민주당 원내대표(왼쪽)가 10월14일 국회에서 열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 처리와 관련한 원내대표 회담에 앞서 악수를 하고 있다. 한겨레 강창광

» 황우여 한나라당 원내대표(오른쪽)와 김진표 민주당 원내대표(왼쪽)가 10월14일 국회에서 열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 처리와 관련한 원내대표 회담에 앞서 악수를 하고 있다. 한겨레 강창광

“이달 안에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비준안과 14개 이행법안을 반드시 처리하겠다.”(홍준표 한나라당 대표, 10월12일 정당대표 라디오 연설)

“우리나라가 ‘덩달아 나라’는 아니다. 미국에서 비준했다고 우리나라가 덩달아 빨리 비준해야 할 이유는 없다.”(손학규 민주당 대표, 10월14일 민주당 최고위원회의)

“이달 안에 비준” vs “대책 마련 먼저”

올 것이 왔다. 미국 의회가 한-미 FTA 관련 법안을 지난 10월12일(현지시각) 통과시키자 한국도 빨리 이를 비준해야 한다는 정부와 여당의 압박이 거세다. 민주당 등 야당은 이에 맞서 재재협상을 하거나, 적어도 내년도 예산에 피해대책 관련 자금을 반영하고 장기적인 법적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황우여 한나라당 원내대표와 김진표 민주당 원내대표는 10월14일 국회에서 원내대표 회담을 열어 한-미 FTA 비준안 처리 방안을 논의했다. 회담에서 황 원내대표는 10월17일 각 상임위원회에 비준안과 관련 법안을 상정하고, 이달 안에 처리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앞서 10월13일 한-미 FTA 여·야·정 협의체에서 “민주당의 ‘10+2 재재협상안’ 추가 논의를 거쳐 되도록 이른 시간에 여야 합의로 비준안을 통과시키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정부와 한나라당은 미국 정부와 마찬가지로 내년 1월1일부터 한-미 FTA가 발효돼야 한다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다. 협정은 양국이 비준안을 처리하고 이행 확인서한을 교환한 지 60일 뒤부터 효력이 생기기 때문에, 정부·여당으로선 이달 안에 비준 절차를 마무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 원내대표는 10·26 재·보궐 선거 다음날인 10월27일부터 논의를 시작하고, 정부도 피해대책을 내놔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는 “‘10+2’와 독소조항 해소, 피해 중소기업과 농산업 피해대책을 예산과 법률로 보장, 통상절차법 확대 개편이 비준안 처리의 3대 선결 조건”이라고 강조했다.

2시간이 넘는 회담 끝에 여야는 10월17일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에서 열기로 한 ‘끝장토론’ 이후 처리 방안을 다시 논의키로 했다. 끝장토론에는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 등 정부 쪽 인사 2명과 ‘한-미 FTA 반대 범국민대책본부’(범국본) 쪽 인사 2명이 찬반 토론을 벌일 예정이다. 하지만 이 토론으로 정부와 범국본이 서로를 설득하거나 의견 차이를 좁히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재재협상 또는 피해대책 마련 뒤 비준에 무게를 둔 민주당과 비준안 자체의 폐기를 주장하는 범국본의 간극도 크다.

이 토론 결과가 어떻게 되든, 10월14일 열린 국회 지식경제위원회는 앞으로 국회에서 어떤 광경이 펼쳐질지를 보여주는 예고편이었다. 지경위 한나라당 의원들은 한-미 FTA 관련 법안을 상정해 심사하자고 요구했지만, 민주당은 정부의 피해대책 마련이 먼저라며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야당은 그동안 미국이 법안을 통과시키면 (우리도) 상정하자고 주장했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도 관련 법안을 논의할 때가 됐다”(김재경 의원), “한-미 FTA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당시 여당인 민주당이 추진했다”(김정훈 의원)는 등의 논리로 일제히 민주당을 공격했다. 이에 민주당 소속 김영환 지경위원장은 “상임위 차원에서 피해 산업 대책을 충분히 논의한 뒤 상정해도 늦지 않다. 여야 간사 간 협의를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며 산회를 선포했다.

FTA 반대, 야권 연대의 핵심 축

이날 회의는 한나라당으로선 비준안 처리 의지를 보여주면서도 민주당의 요구를 무시하지 않는 일종의 ‘치고 빠지기’로 볼 수 있다. 한나라당은 이렇게 민주당에 비준안 처리를 강조하는 한편, 정부에도 피해대책 관련 예산 수립 등 민주당의 요구를 최대한 수용하라고 압박하고 있다. 비준안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무조건 일방적으로 처리했다가는 역풍을 맞을 우려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나라당의 ‘인내’는 ‘2012년 1월1일 발효’라는 시한이 정해져 있다. 또한 민주당이 물리력을 동원하려 한다면, 당장이라도 비준안을 처리하겠다는 태도다. 한나라당 소속인 남경필 외통위원장은 “민주당이 정부·여당이 보여주는 성의와 인내에 상응해 몸싸움을 하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며 “하지만 무조건 드러눕겠다고 하면 10·26 재보선 전에라도 처리해야지 기다릴 이유가 없다. 더구나 선거 전에 민주당이 몸으로 막을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민주당의 자세에 따라 처리 속도를 정하겠지만, 내년 1월1일에 협정을 발효시키는 타임스케줄(시간표)은 맞출 것”이라고 덧붙였다.

칼날을 쥔 셈인 민주당으로선 선택지가 많지 않다. 민주당 외통위 간사인 김동철 의원은 “우리 요구에 정부가 얼마나 성의를 보여주느냐에 달려 있지만, 지금 상태로라면 몸으로 막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비준안을 강하게 반대하는 정동영 최고위원과 지역구가 농촌인 유선호·김영록 의원을 지난 10월13일 외통위에 긴급 투입했다. 비준안 처리를 강행하면 물리력으로라도 막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셈이다.

게다가 한-미 FTA는 내년 총선·대선을 가름할 야권 연대의 핵심 축이다. 민주당이 비준안 처리에 몸을 던지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한-미 FTA에 반대하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시민사회 등과의 야권 연대가 근본부터 흔들릴 수 있다. ‘한-미 FTA 강행 처리 반대 야당-시민사회 공동결의대회’는 10월12일 “불평등 한-미 FTA만큼이나 위험한 것은, 직권상정과 날치기로 점철된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의 국회 협박”이라며 “야당과 시민사회는 결코 정부·여당의 위협에 무릎 꿇지 않고 강행 처리를 막아내겠다”고 밝혔다.

서둘러 비준하는 것은 ‘주권 포기’

민주당은 한-미 FTA가 국익에 해를 끼치는 행위라는 점을 강조하며 여론전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이용섭 대변인은 10월14일 “미국에서 비준했다고 우리나라마저 국익을 팽개친 채 서둘러 비준에 나서는 것은 ‘주권 포기’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정동영 최고위원은 10월13일 외통위 전체회의에서 “대한민국 국익을 대표하는 게 맞는지, 미국의 파견관인지, 옷만 입은 이완용인지 모르겠다. 역사가 단죄할 것”이라며 한-미 FTA 재협상을 주도한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한국인의 영혼이 없다. 미국과 한통속”이라는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이에 김 본부장이 “말씀이 지나치다”고 항의했지만, 정 최고위원은 “미국의 식민지 마인드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통탄스럽다. 식민지 관료가 아니라면 어떻게 이걸 갖고 와서 국회에 (비준을) 해달라고 하느냐”며 “노무현 전 대통령이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반드시 기억하라”고 몰아세웠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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