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당의 어제와 오늘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대표다. 권 전 대표는 기자 출신으로 언론노조 활동을 거쳐 1995년 만들어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초대 위원장을 지냈다. 1997년 대선에 민주노동당의 전신인 국민승리21 후보로 출마했다. 2000년 1월 창당된 민주노동당의 초대 대표를 맡아 10석(지역구 5석·비례대표 5석)으로 원내 진입에 성공한 2004년 17대 총선까지 대표를 지냈다. 하지만 2008년 분당의 중심에도 그가 있었다.
권 전 대표는 지난 9월26일 열린 민주노동당의 대의원대회에서 이정희 대표 등 주류가 제출한 국민참여당과의 통합 안건을 부결했다. 반대 토론자로 나섰고 대회에 앞서 대의원들을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9월2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만난 권 전 대표는 “진보정당이 소멸하는 길로 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며 “진보신당과 통합하는 만큼은 아니겠지만 여전히 새로운 통합 진보정당을 만들 가능성은 열려 있다”고 말했다.
-국민참여당과의 통합 안건이 부결됐다. 하지만 참여당과의 통합에 찬성하는 대의원이 거의 3분의 2에 육박했다.
=통합에 찬성하는 당원이나 반대하는 당원 모두 지향점은 같다. 진보정당을 통해 평등한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경제적 민주주의를 실현하자는 것이고 평화와 통일, 생태와 환경 문제를 진보정당을 통해 풀자는 것이다. 2012년 총선에서 승리하고 대선에서 정권을 교체하는 데 유리한 지형을 만들자는 것도 같다. 진보정치의 성과와 한계를 당원들이, 그리고 진보 진영 전체가 심도 있게 논의할 기회였는데 참여당과의 통합 문제로 좁혀진 사안에 몰입돼버렸다. 그러다 보니 찬반으로 갈려 당원들이 격렬하게 대립했다. 빨리 수습하고 통합 진보정당으로 나아가야 한다.
-경과야 어찌됐든 바라는 결과가 나온 것 아닌가.
=아쉽다. 그리고 아프다. 통합 진보정당을 만드는 이유가 내년 총선을 위한 것이라면 2008년 18대 총선 패배의 원인이 무엇인지 정확히 진단해야 한다. 진보정치의 10년이 실패했나? 국민의 외면을 받고 있나? 그렇지 않다.
-2004년 전성기에 비하면 초라해진 건 분명하고 통합 논의가 지지부진해지자 시민들의 관심도 멀어지고 있다. 2008년 패배에 대해 어떻게 진단하나.
=당의 분열이다. 분당에 기인한다. 분당되지 않았더라면 원내 교섭단체(20석)를 구성했거나 그에 가까운 당선자를 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성적을 거뒀다면 진보정당의 패배, 진보정치의 축소라고 할 수 있겠나. 역사적 맥락을 살펴봐도 그렇다. 진보의 의제들, 무상급식과 무상보육, 부유세는 모두 민주노동당의 간판 같은 정책이었다. 보편적 복지는 이 시대의 화두가 되지 않았나. 민주노동당이 구체적인 정책을 만들고 일관성 있게 발전시켜왔다면 오늘날 같은 상황에서 어땠겠나. 참여당과 통합하겠다는 분들의 대전제는 ‘민주노동당이 실패했다’ ’참여당과 통합함으로써 총선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인데 동의할 수 없었다.
-대의원대회에서 “참여당과 통합하면 진보정당은 소멸할 것이며 야권 연대도 어려워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근거는 뭔가.
=실제 진보정당의 소멸, 청산으로 갈 위험이 있다. 노동 없는 진보정치는 있을 수 없다. 노동은 진보정치의 바다이고 대지다. 바다 없이 물고기가 살 수 있나, 땅 없이 나무가 자랄 수 있나.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의 근간이다. 참여당과 통합할 경우 민주노총이 분열하고 와해된다. 그렇게 되면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도 없어진다. 하나의 대오인 민주노총이, 민주노동당 노조, 진보신당 노조, 사회당 노조, 심지어 한나라당 노조로 갈라질 수도 있다. 민주노동당의 또 하나의 근간인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도 마찬가지다. 실제 참여당과의 통합 문제가 불거지면서 민주노총과 전농 내부의 대립도 심각한 수준이었다. 또 하나는 민주노동당이 참여당과 통합해 새로운 정당을 만들게 되면, 비(非) 민주노동당-국민참여당 성격의 또 다른 진보정당이 생길 수 있다. 이 정당은 독자성이 더욱 강해 야권 연대에는 아예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여러 개의 진보정당들이 누가 진짜냐 가짜냐로 갈등하고 경쟁하게 된다면 진보정치가 소멸하는 것 아닌가.
2008년 민주노동당이 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으로 나뉘었는지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힘들다. 당의 노선과 운영 방식 차이로 갈등이 내재해왔고, 2007년 권 전 대표의 대선 출마와 부진한 득표 이후 폭발했다. 그는 지난 6월 민주노동당과의 통합을 결정할 진보신당의 대의원대회를 앞두고 “내년 총선에 출마하지 않고 진보정당 통합의 밑거름이 되겠다”며 “과거의 과오를 모두 나에게 묻어달라”고 밝히기도 했다.
-권 전 대표의 호소가 진보신당 당원들을 설득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 같다.
=그렇지 않다. 진보신당 독자파의 상당수가 통합에 찬성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내게 직접 연락한 대의원도 많았다. 그런데 민주노동당에서 참여당과의 통합 문제가 불거지자 다시 돌아선 사람이 꽤 있다.
-진보신당 대의원대회 결과를 보면 진보신당 내에 민주노동당과의 통합을 바라는 의견이 다수였으나 안건 통과에 필요한 3분의 2는 넘지 못했다. 진보신당과의 통합이 무산된 만큼 참여당과의 통합을 통해서라도 예상되는 야권 연대 과정에서 협상력을 키우기 위해 몸집을 키우려 했던 것 아닌가.
=진보정당 대의원대회 결과는 정말 아쉽다. 하지만 새로운 통합 진보정당은 진보신당만을 대상으로 한 게 아니었다. 과거 국민승리21에는 참여했지만 민주노동당에 합류하지 않은 여러 단체와 인사들이 있다. 진보신당 대의원대회의 결론이 그렇게 났지만 여전히 통합에 동의하는 당원이 많다.
-통합에 동의하더라도 당의 진로와 관련해 대의원대회에서 결정이 내려진 마당에 움직일 명분이 마땅치 않은 것 아닌가.
=조승수 대표를 포함해 통합에 동의하는 진보신당 당원들이 조만간 당적을 정리하고 통합연대로 합류할 예정이다.
-노회찬·심상정 전 대표처럼 진보신당을 탈당한다는 말인가.
=그렇다. 민주노동당 바깥의, 새로운 통합 진보정당을 바라는 세력들도 통합연대에 합류해 준정당 성격을 띠게 되면 민주노동당과 통합하는 절차를 밟을 수 있다. 전태일 열사를 기려 해마다 열리는 노동자대회(11월13일)에서 새로운 통합 진보정당의 발족을 알릴 수 있기를 기대한다.
권영길 전 대표는 과의 인터뷰에서 처음으로 조승수 진보신당 대표의 탈당과 새로운 통합 진보정당 발족 시기와 방식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혔다. 민주노동당의 대의원대회를 이틀 앞둔 9월23일 “대중적인 통합 진보정당 건설에 매진하기 위해 진보신당을 탈당한 노회찬·심상정 전 진보신당 대표는 물론, 조승수 현 대표와도 자주 만나 의견을 나눠왔다”고 덧붙였다.
-조 대표를 포함해 통합에 찬성하는 진보신당 당원들의 탈당이 결정됐나.
=다음주 중반으로 확정된다. 여러 차례 만나 의견을 주고받았다.
-통합연대가 준정당 성격을 띤다고 하더라도 당 대 당 합당은 힘든 것 아닌가.
=굳이 선거관리위원회가 인준하는 식의 정당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우리가 정당으로 대우하면 된다. 진보신당 대의원대회 이전에 새로운 진보정당의 당명은 어떻게 할지, 당 운영은 어떻게 할지 등을 결정해놓은 방안이 있다. 이를 준용하면 된다.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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