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 사건이 발생한 지 8개월이 흐르고 있다. 지난 9월 국방부의 합동조사결과 보고서가 나왔지만 이후에도 천안함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노력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그 중심에 이승헌 미국 버지니아대 교수(물리학)가 있었다. 민·군 합동조사단(이하 합조단)의 조사 결과 발표가 있던 지난 5월 처음으로 천안함 흡착물질 의혹을 제기하면서 지금도 날선 비판을 이어가는 그가 책을 냈다. ‘물리학자 이승헌의 사건 리포트’ (창비 펴냄).
편집자 설득해 기사화한 일화
지난 6월10일 일본 도쿄대 물리학연구소에서 만난 이승헌 버지니아대교수(물리학)와 그의 책 <과학의 양심, 천안함을 추적하다>.한겨레 자료
은 전자우편으로 이 교수와 인터뷰했다. 그를 향한 질문에 직접 손으로 쓴 편지를 사진으로 찍어 파일로 전해왔다. 그의 컴퓨터는 한글 작업이 되지 않는다. 미국의 현직 교수인 그로선 영어로 모든 연구와 강의를 하는 만큼 한국어로 자료를 작성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과의 인터뷰나 보고서 전달도 영문으로 이뤄졌지만, 자신의 말이 정확하게 전달되기를 원할 때는 재차 설명하지 않고 손글씨를 써서 파일로 보내왔다.
그는 돌려 말하지 않는다. 그의 직설은 그를 취재한 경험이 있는 기자들에게는 유명하다. 이번에도 그의 책과 인터뷰에는 어김없이 “(이번 사건의 흡착물질 데이터는) 조작됐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자신의 모의실험을 근거로 댄다. “옳고 그름을 가리려면 국방부가 재실험을 하면 된다”고 몰아붙인다. 비밀주의를 앞세워 감추고 있는 정보를 모두 공개하면 될 일이라는 말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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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 오는 비판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침몰 원인이 뭐냐”는 질문에는 “내가 말할 수 있는 바는 없다. 현재처럼 정보가 통제돼 있고 실체에 접근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더 이상의 추론을 할 만한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답한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허점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오히려 자연스럽게 잘잘못을 가리자는 주장을 펴며 이번 사건을 학계에서의 엄정한 논쟁처럼 몰고 간다. 그 자신은 여전히 이번 사건이 “사실이나 거짓에 기반을 두고 이미지를 만들어 대중으로 하여금 믿게 하는 정치 영역에 과학을 끌어들인 것”이며 “결국은 과학적 진실의 싸움”이라고 생각한다.
책에는 이 교수가 본인 실험의 타당성을 입증하려고 벌인 노력이 상세히 수록돼 있다. 합조단 보고서의 오류를 지적하기 위해 미국 코넬대가 운영하는 논문 사이트(www.arxiv.org)에 자신의 보고서를 올리거나 국내외 과학자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과정을 보면 한 과학자의 열정이 그대로 묻어난다. 그중에서도 세계적 과학잡지 의 편집자를 설득해 자신의 의견을 기사화하는 장면은 생생하다. 그는 편집자에게 직접 전자우편을 보내지만 처음에는 “합조단의 실험 데이터에 무언가 이상한 점이 있다는 것은 옳다. 하지만 다른 대안이 없어 당신의 이론을 확신할 수 없다. 기사화는 불가능하다”는 답을 받는다. 이 교수는 곧바로 “정보가 통제돼 아주 일부의 데이터만으로도 이런 오류를 찾아낸 것이다. 이번 사건은 제2의 황우석 사건임을 확신한다”는 설득 메일을 다시 보낸다. 그리고 답장이 온다. 전자우편을 받은 편집자는 바로 황우석 교수 사건을 기사화한 데이비드 시라노스키였던 것이다. 이 교수는 그를 직접 만난다. 그리고 한 달 뒤 에 천안함 사건의 의혹에 대한 기사가 실리게 된다.
<과학의 양심, 천안함을 추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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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왜 이렇게 천안함 사건에 빠지게 됐을까?
천안함 사건이 벌어졌을 당시 그는 미국에 있었다. 그가 재직한 버지니아대의 연구와 학회 참석 등 일정에 쫓겨 사건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가 지난 5월 입국해 고향을 방문할 때도 천안함 사건은 그에게 관심사가 아니었다. 당시는 천안함 사건 의혹 보도가 현저히 줄어가던 시점이었다. 보수적인 자신의 부친이 정부의 조사 결과 발표가 의문스럽다는 말을 건넸다. 이상하게 여기긴 했지만 그때도 이 교수는 천안함 사건과 무관한 사람이었다. 그가 천안함을 달리 보기 시작한 건 오히려 지난 5월 말 정부의 조사 결과 발표 뒤다.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으려는 정부와 일부 보수단체 때문이다. 김용옥·박선원·신상철 등 사건에 의문을 제기한 이들이 피고소인이 되는 상황을 보면서, 진실을 둘러싸고 합리적 의심조차 말하지 못하는 불의의 상황이 그를 움직이게 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그리고 국방부가 합조단을 통해 ‘과학적 근거’를 앞세우고 있음을 알게 됐다. 물리학자답게 열역학을 앞세워 천안함을 피격한 어뢰에 적힌 ‘1번’ 글자의 문제부터 우선 파고들었다. 그다음 대상은 국방부가 발표한 흡착물질 분석 자료였다.
그의 문제 제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는 서재정 미국 존스홉킨스대 교수(국제정치학), 박선원 브루킹스연구소 초빙연구원과 함께 천안함 사건의 진실 규명을 요구하는 사이트(www.truthcheonan.info)를 만들어 활동 중이다. 사이트를 보면, 그의 문제 제기는 큰 파장을 몰고 왔지만 해결된 질문은 단 한 가지도 없다. 그뿐만 아니다. 그가 처음으로 제기한 ‘1번’ 글자 의혹은 일방적으로 거짓으로 매도됐다. 책에는 이 문제로 송태호 카이스트 교수(기계공학)와 벌인 논쟁에 대한 심정을 담았다. 송 교수와 이 교수는 폭발 뒤 고열·고압의 가스버블이 생기고 이것이 팽창을 한다는 점에서는 의견이 동일하지만, 송 교수는 버블 내부와 외부의 압력이 같은 상태로 팽창하면서 에너지가 급격히 허비돼 1번 글자가 타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했고, 이 교수는 버블 안팎의 압력이 다르기 때문에 버블이 계속 고온을 유지한 채 팽창해 몇십m까지 반경이 커진다고 봤다. 이 교수의 논리대로라면 ‘1번’ 글씨는 지워져야 한다. 하지만 당시 송 교수와의 논쟁에서 그의 반박은 언론에 거의 소개되지 않았고 학계는 침묵했다.
이 교수는 책에서 “당시 문제의 심각성에 비추어 한국물리학회 같은 공인된 과학단체에서 진실 규명을 요구하거나 직접 실험을 통해 진실 규명을 하겠다고 나서야 함에도 학계는 침묵했다”고 지적한다. “(과학자들이) 실명으로 발언하지 못하고 몸을 사린다. 연구비 때문이다”라는 직언도 서슴지 않는다. 책에서 그는 한국 대학에 있는 몇몇 물리학자들과 서신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그들이 이 교수의 실험과 분석에 동의하면서도 정작 실명으로 나서기는 꺼렸던 사실 등을 일화로 들려준다. (은 그가 접촉한 학자들에게 흡착물질 실험을 제안했지만, 실험은 물론 익명 취재조차 거절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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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 대해 그는 날을 더 바짝 세운다. 그를 음모론자로 몰고 간 한 보수 언론에 대한 입장은 명확하다. ‘인간 어뢰 개념도’를 천안함 사건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도한 보수 언론을 직접 거론하며 사실 확인도 없는 보도를 질타한다. 자신이 북한과 연관이 있는 것처럼 비친 기사의 진실도 당시 정황을 들어 반박한다. 이 교수가 지난 6월 진행한 일본 내 기자회견에서 영국의 한 기자가 그와 북한의 관련성을 물었고 이에 분명하게 “관련이 없다”고 답했으나, 기사에는 영국 기자의 질문만 등장하면서 연관 의혹이 있는 것처럼 몰아갔다는 것이다.
지금 그의 심정은 어떨까? 책은 “평범한 물리학 연구자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문장으로 마무리된다. 전자우편 인터뷰 답변도 “할 만큼 한 것 같다. 평범한 연구 생활을 하고 싶다”가 맺음말이다. 하지만 “그만하고 싶다. 이제 연구를 해야 한다”는 말은 문제 제기를 한 지난 5월부터 이 교수가 입버릇처럼 한 말이다. 그의 바람이 이번에는 이뤄질까? 그는 “물론 제 도움이 천안함 진상 규명에 필요하면 참여하겠다”며 여지를 남겼다.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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