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4월20일, 황장엽 전 북한노동당 서기가 서울에 왔다. 1년 뒤인 1998년 5월28일, 는 리영희 전 논설위원과 황장엽 전 서기의 특별대담을 실었다. 당시 대담은 서울 남산 근처 안기부 안가에서 진행됐다. “난 김일성의 이론서기로 7년 이상 일했어. 현 단계에서 자본주의 이념을 지지하지는 않아요. 우리는 유물론자요.” 깐깐한 목소리로 거침없이 말하던 그를 기자는 또렷하게 기억한다.
이후 그는 일련의 저술에 몰입했다. 등을 펴냈다. 망명 이후 10여 년 동안, 그는 주체사상과 ‘인간 중심 철학’을 구분해 설명하려고 애썼다. ‘유물론자’이자 ‘자본주의 비판자’인 그가 북을 버리고 남을 택한 뒤, 인간 중심 철학의 전파에 열성을 낸 과정은 주체사상의 흥망성쇠를 웅변한다.
북한의 황금기 ‘천리마 운동’의 이론화한국전쟁 이후 1950년대 말까지 김일성은 소련파·연안파 등을 숙청했다. 소련 또는 중국과 연관된 정치세력의 청산으로 권력 장악에 완전히 성공했다. 그러나 소련·중국식 사회주의와 구분되는 ‘독자적 사회주의 이념체계’가 필요했다. 황장엽이 그 일을 도왔다. 전쟁 시기에도 모스크바대학에 유학해 있던 황장엽은 북한 최고의 엘리트였다. 그는 김일성 체제가 자리잡은 1958년 1월, 노동당 중앙위 김일성 서기실(비서실) 이론서기로 임명됐다. 황장엽에 따르면, 이론서기 4명 가운데 경제학자가 3명이었다. 오직 황장엽만 철학자였다. 주체사상은 ‘사람 중심 사상’이라는 철학적 논구에서 시작되는 이론이다. 주체사상의 탄생에 그가 기여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그의 기여는 주체사상 형성의 초기에 그쳤다.
서기실은 김일성의 연설원고를 만들고, 그의 연설 속기록을 다시 정돈해 간행하는 일을 맡았다. 황장엽이 서기실에서 일한 1960년대는 북한의 황금기였고, 이를 대표하는 것이 ‘천리마운동’이다. 방인혁 서강대 연구교수는 “단순히 생산력을 증대하자는 것이 아니라, 당 지도자가 인민대중과 고락을 함께하면서 그들의 창조성·자주성을 끌어올리려는 ‘사상운동’이었다”고 설명한다. 이 과정에서 북한은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경제적 성장에 성공했다. 김근식 경남대 북한대학원 교수는 “그 성과에 대한 자신감을 기초로 서구의 자본 투자를 유치하는 등 개혁·개방의 초기적 시도가 이뤄지기도 했다”고 말했다. 어느 탈북자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천리마운동이 한창이던 1960년대에는 사람들이 서로 도와주고 협조하며 한 가족처럼 살았다. 1960년대 북한은 사람이 살 만한 나라였다.”(에서 재인용)
황장엽이 ‘저작권’을 주장하는 ‘사람 중심 사상’은 바로 천리마운동의 이념이었다. 방인혁 서강대 연구교수는 “망명 이후 황장엽이 북에 대해 유일하게 칭찬한 것이 바로 천리마운동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천리마운동을 주체사상으로 정식화하는 작업은 김일성이 아니라 김정일이 주도했다. 그리고 김정일은 황장엽을 좋아하지 않았다.
1974년 정치국 정치위원이 된 김정일은 1982년 ‘주체사상에 대하여’, 1986년 ‘주체사상 교양에서 제기되는 문제에 대하여’, 1996년 ‘주체철학은 독창적인 혁명철학이다’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주체사상의 핵심을 정리한 논문인데, 그 논리 구성을 보면 ‘어느 사회과학자’의 질문에 답하거나 그의 오류를 바로잡는 형식이다. 방인혁 교수는 “그 상대가 바로 황장엽이었다”며 “1970년대 중반 이후 김일성이 황장엽의 보호막이 되어주지 못하면서 김정일과 황장엽이 직접 논쟁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황장엽은 1980년부터 당 사상 서기였다. 그는 북한 사회과학자의 대표 격이었다. 황장엽이 남으로 망명한 것은 김정일의 1996년 논문 발표 직후였다.
사회주의와 국가주의 요소가 뒤섞여
망명 이후 황장엽은 주체사상의 철학적 기초가 된 ‘사람 중심 사상’을 ‘인간 중심 철학’으로 바꿔 이름 붙이고, 이를 한국 사회에 적극적으로 소개했다. 한국의 보수파들도 반기는 그 내용의 핵심은 “인간이 실천적 활동의 주체가 되어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되, 전체 사회의 이익이 궁극적으로 나의 이익이라는 통찰”에 있다. 논리 구성은 주체사상과 크게 다를 바 없다. 황장엽의 인간 중심 철학을 수용하는 한국 우파들도 어느 면에서는 ‘주사파’인 셈이다.
황장엽의 인간 중심 철학에는 사회주의와 국가주의 요소가 뒤섞여 있다. 예컨대 “민주주의를 정치 분야의 원리로만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경제 분야에서도 인민 대중이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할 때, 그는 한국의 기업 운영방식을 비판하면서 일종의 ‘집산주의’를 주장하고 있다. 반면 “인민에게 충실히 복무하기 위해 헌신분투하는 사람은 일부 절차를 어기는 경우가 있더라도 근본적으로는 민주주의자”라고 말할 때, 그는 독재자를 옹호하는 논리로 빠져든다.
한국 철학계에서 그의 사상이 온전히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일제 시기 사회주의 경제학자였던 백남운은 공산주의 계급투쟁을 거부하고, “휴머니즘을 동반한 인간적 사회주의”를 추구했다. 이 때문에 그는 박헌영 계열과 갈등했다.
황장엽이 입론한 주체사상의 원형은 한국에도 있다. 이승만 정권의 초대 문교부 장관인 안호상은 독일에 유학한 철학자였다. 그는 개인보다 국가를 중시하는 ‘일민주의’를 제창했다. “일민주의는 영명하신 우리 맨 높은 지도자이신 이승만 대통령 각하께옵서 만드신 것으로, 일민주의에 바탕을 두고 무력·경제·정치·사상 전쟁을 치러야 한다. 민족의 운명은 기술개발을 통한 산업건설과 무력건설에 달려 있다.” 그의 일민주의는 주체사상과 거의 똑같다.
박정희 시대에는 또 다른 철학자 박종홍이 대통령 특별보좌관으로 일하며 ‘반공 민주주의’를 제창했다. 그는 ‘국민교육헌장’의 제정에 깊이 관여했다. “우리의 창의와 협력을 바탕으로 나라가 발전하며,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스스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 정신을 드높인다”는 그 내용 또한 주체사상의 자주성·창조성에 버금간다.
‘일민주의’ ‘반공 민주주의’와 비슷한 길안호상·박종홍과 황장엽의 철학을 비교 분석한 김석수 경북대 교수(철학)는 “황장엽의 논리는 이승만·박정희(시대의 한국 철학자)가 추구한 ‘한국식 민주주의’가 파시즘화돼가는 과정과 유사한 길을 걸었다”고 평가한다. 한국 우파가 귀하게 여긴 것도 국가주의·사회주의·인본주의가 묘한 긴장을 이룬 황장엽의 추상적 이론이 아니었다. 황장엽은 인간 중심 철학의 방향으로 북한을 개조하려면 “일체의 대북원조를 허용하지 말고, 한국이 미국에 의거하여 북한의 독재체제를 붕괴시키고 민주주의에 기초한 민족의 통일을 이루는 것이 유일하게 옳은 길”이라고 주장했다. 황장엽이 ‘인간 중심 세상’을 북한에 만드는 꿈을 꾸는 동안, 한국 우파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 화해협력 정책을 비판하는 도구로 그를 앞세웠다.
1998년 5월의 봄날, 대담 자리에 나온 황장엽은 남산 안기부 안가의 소파에 앉아 말했다. “그저 집안에 앉아서 죽지는 않을 것이오.” 2010년 10월의 가을날, 황장엽은 서울 논현동 국정원 안가의 욕실에 앉아 세상을 떴다. 그의 사상과 이념은 쉴 곳을 찾지 못했다.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그의 말과 글을 빌려 제 이익을 취했다. 이명박 정부는 그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