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3대 후계 세습이 한국 진보 진영의 분열을 심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현실화하고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삼남 김정은이 인민군 대장과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자리에 오른 지 열흘을 넘긴 10월8일까지도 ‘북한 후계 세습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진보 진영 내부의 논란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특히 과 연일 지상 논쟁을 이어가고 있는 민주노동당의 태도가 예사롭지 않다.
세습 비판은 오리엔탈리즘?발단은 북한의 3대 세습에 대한 민노당의 공식 논평에서 비롯됐다. 북한의 9·28 당대표자회가 끝난 다음날 우위영 민노당 대변인은 “북한 후계 구도와 관련해 국민의 눈높이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더라도 북한의 문제는 북한이 결정할 문제라고 보는 것이 남북관계를 위해서도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은 물론 같은 진보 정당인 진보신당과 비교해보더라도 상당히 신중한 반응이었다. 민노당 내부적으로는 이마저도 부담스럽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남북이 이미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 등을 통해 상호 체제를 이해하고 존중하기로 했다는 사실과 북한 사회민주당과 교류하고 있는 현실 등을 고려할 때 세습 자체에 대한 비판과 대응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견해였다.
반면 북한의 3대 세습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도 나왔다. 당 홈페이지의 당원게시판과 자유게시판에는 당의 분명한 의견 표명을 요구하는 게시물이 올라왔다. 우 대변인의 9월30일 논평에 “국민의 눈높이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더라도”라는 문구가 포함된 배경이다.
본격적인 논쟁은 그 다음날부터 시작됐다. 10월1일 이 ‘민노당은 3대 세습을 인정하겠다는 것인가’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3대 세습에 대한 민노당의 미온적 태도를 강하게 문제 삼고 나섰다. 은 민노당의 논평 가운데 “북한의 문제는 북한이 결정할 문제”라는 부분에 주목했다. 이 부분이 3대 세습을 비판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으로 들린다는 지적이었다. 사설은 더 나아가 “북한은 무조건 감싸주어야 한다는 생각이라면 그것이야말로 냉전적 사고의 잔재”라며 “민노당이 입장을 바꿔 진보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민노당에서는 같은 날 부설 연구기관인 새세상연구소가 논쟁을 이어갔다. 새세상연구소는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을 경계하며’라는 글을 통해 북한의 3대 세습은 북한의 내정이라는 입장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3대 세습을 바라보는 남측 사회의 마음 역시 불편하다. 그러나 불편하다는 것이 그릇된 것으로 직결되어서는 곤란하다. 우리에게 불편하다고 인식되는 것이 다른 이들에게는 불편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당연하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김정은 후계 구축 작업이 대단히 불편한 일이긴 하지만, 김정은 후계 구축 작업은 인정해야 하는 북측의 내정인 것이다.”
울산시당, 절독 통지새세상연구소는 글에서 “우리에게 불편하다고 인식되는 것이 다른 이들에게는 불편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당연하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는 주장까지 했다. “북한의 문제는 북한이 결정할 문제”라는 주장 이상이었다. 민주적 정통성이 전혀 없는 세습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발언으로도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어 박경순 새세상연구소 부소장은 10월7일 연구소가 개최한 ‘당대표자회의 이후의 북한, 어디로 갈 것인가’ 토론회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26세 때 갑산파 사건에서 맹활약한 이후 당내에서 정치조직 활동을 전개했던 점에 미루어 현재 (28살에 후계자로 등장한 김정은이) 매우 어리다고 볼 수 없다”며 “진정한 진보는 용납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까지를 포용할 수 있는 톨레랑스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정작 민노당은 정치적 견해가 다른 에 ‘톨레랑스’(관용)를 보이지 않았다. 10월4일 민노당 울산시당(위원장 김창현)이 영남본부장 앞으로 보낸 ‘절독 통지문’의 일부다.
“북한의 3대 세습을 비판하지 않는다고 하여 ‘북한 추종세력’으로 단정짓고, 자신의 잣대에 어긋난다고 ‘종북’이니 ‘냉전 잔재’니 딱지를 붙여 언론사의 공식 논평으로 게재한 에 대해 강력히 문제제기를 한다.”
아울러 민노당은 “적절한 조치가 없으면 전당적으로 () 절독 사업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물론 민노당 울산시당의 절독 경고가 실행될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구체적 계획이 마련된 것도 아니고 중앙당과 협의가 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민노당의 공세가 거세자 이대근 논설위원이 10월7일 다시 경향닷컴 ‘오피니언X’에 장문의 반론을 실었다. 이 위원은 “평소 북한에 대해서만은 그렇게 정통하고 잘 아는 것처럼 말하다가도 북한에 관한 부정적 소식만 나오면 갑자기 알 수가 없다고 불가지론을 펴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며 “북한의 지배세력은 그렇게 보호받아야 할 특별한 존재인가. 자질이 있건 없건 수령이 차기 수령을 자기 아들로 지명하는 것으로 후계자가 결정되는 일을 어떻게 세습이 아닌 다른 이름을 붙일 수 있나”라고 따져물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민노당 중앙당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과의 갈등이 몇몇 인터넷 언론 등을 통해 표출되자 중앙당은 오히려 침묵을 선택했다. 오해에서 비롯된 우발적 사건이라면 적극적으로 해명하고 나서겠지만, 우위영 대변인 등 핵심 당직자의 휴대전화는 10월8일 오후 일제히 꺼져 있거나 불통이었다.
대신 그동안 북한의 3대 세습에 대해 오랜 침묵을 지켜왔던 이정희 대표가 처음으로 자신의 의견을 블로그에 밝혔다. 이 대표는 글에서 “말하지 않는 것이 나와 민주노동당의 판단이며 선택”이라고 주장했다. 북한의 3대 세습에 대한 찬반을 밝히지 않겠다고 분명히 한 것이다. 그는 “(북의 후계 문제에 대해) 진보가 왜 비판하지 않느냐는 것이 의 논리”라고 지적한 뒤 “내가 생각하는 진보는, 진보임을 인정받으려는 생각으로 시류에 맞춰 말을 보태기보다, 자신 행동의 일관성을 지키는 것이 진보”라고 말했다.
민노당 핵심 관계자가 10월6일 에 “상당수 진보·좌파 지식인이 북한의 세습을 비판하는 것은 한국 사회가 그들에게 그러한 태도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북한을 비판하는) 기회주의적 진보·좌파 지식인은 반성해야 한다”고 지적한 내용과 거의 비슷하다.
침묵 끝에 나온 이정희 대표의 글‘진보임을 인정받기 위해 한마디만 해보라고’라는 제목의 이정희 대표 글의 마지막 단락은 이렇게 끝맺고 있다. “국가보안법 법정 안의 논리가 일부 변형되어 진보 언론 안에도 스며들어온 것이 안타깝다. 말하지 않는 것이 나와 민주노동당의 판단이며 선택이다. 이것 때문에 비난받아야 한다면 받을 것이다. 지금은 진보임을 인정받기 위해 북의 권력승계를 비난하다가, 뒤에 그 후계자와 대화의 상대방으로 마주 앉게 되면 ‘능력 있는 사람’이라며 이전의 비난을 거둬들일 치사를 만들어내야 하는 궁박한 입장에 스스로 빠져 들어갈 생각이 나에게는 전혀 없다.”
참고로 830호 표지이야기 ‘만장일치 3대 승계 비판’ 기사에서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진보 진영은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해 강력히 비판하되, 대북정책은 3대 세습 여부와 상관없이 화해협력·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계속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 단계에서는 진보 진영과 정부의 ‘전략적 분업’이 필요하다는 주문이었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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