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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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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식 개각의 비극, 더 그르치거나 더 놓치거나

김태호 국무총리 후보 앞세운 8·8 개각 분석…
차기 대권주자들 관리하고 개헌 포석 마련한다는 노림수는 성공할까
등록 2010-08-20 13:48 수정 2020-05-03 04:26
부산·경남을 정치적 기반으로 삼고 있는 김태호 국무총리 후보자의 등장으로 한나라당 내부의 대권 구도는 지역 경쟁의 다자간 대결로 흐를 가능성이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부산·경남을 정치적 기반으로 삼고 있는 김태호 국무총리 후보자의 등장으로 한나라당 내부의 대권 구도는 지역 경쟁의 다자간 대결로 흐를 가능성이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식상하다. 도대체 몇 번째인가. 툭하면 총리를 바꾼다. 더 짜증나는 것은 그를 두고 ‘참신한 대권주자’라고 우기는 견강부회다. 대통령이 대권주자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발상부터가 반민주적이다. 지금까지 정식으로 총리직을 지낸 인물은 모두 38명이다. 이 중 대권주자는 숱하게 많았다. 그러나 제대로 된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된 인물은 없다. 그들의 시도가 한심할 따름이다.

도대체 왜 대통령은 총리직을 대권주자 배출의 통로로 삼는 것일까? 대한민국의 헌정 체계를 보면, 대통령이 차기와 관련해 인물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이 몇 가지 없다. 여당 대표를 시키거나 총리로 발탁하는 것이 그나마 의미 있는 수단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어느 날 갑자기 낯선 인물을 대통령 마음대로 여당 대표 자리에 앉힐 수 없다. 따라서 총리직 임명이 유일한 방안이다. 수식도 그럴싸해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 하니 그 사람의 위상을 드높이면서도 권력은 나눠주지 않아도 된다. 대통령으로선 금상첨화 아니겠는가.

총리 임명은 어용 대권주자 양성의 통로?

총리직은 문자 그대로 ‘어용 대권주자’ 양성의 가장 유력한 통로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아직 성공한 케이스는 없다는 사실이다. 이들의 실패는 단순히 불운이 아니라 정치의 중요한 특성 때문이다. 즉, 정치 리더는 ‘임명’이 아니라 ‘선거’를 통해 성장한다는 원리다. 임명은 한 사람에게 잘 보이면 되지만, 선거는 다수에게 잘 보여야 한다. 완전히 다른 게임이다.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모든 정통성은 선거에 의해 창출되고 유지된다. 따라서 대통령이 아무리 총리직에 앉혀 그를 키우고 지원해도 총리 경험만으로 대통령이 되기 어려운 것은 민주주의의 게임 법칙에 지극히 합당한 것이다.

8·8 개각도 이런 비극의 재판이다. ‘40대 총리 탄생’ 운운하는 등 김태호 국무총리 후보에 대한 기대가 충만하다. 하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김태호 대망론’은 이명박(MB) 대통령 주변 일부 정치공학자들의 탁상공론일 뿐이다. 언급했듯이 총리직만으로 대권이 영글기 힘들다. 체급도 헤비급은 고사하고 미들급도 안 되는 플라이급이다. 물론 성장 가능성은 있지만, 일시적 반짝 효과 외에 한나라당의 대권 판도를 뿌리째 뒤흔들 유력 변수로 작용하긴 어려워 보인다.

8·8 개각의 포인트는 두 가지다. 하나는 대권주자 집단관리 프로그램이다. 이는 과거 김영삼(YS) 정부 시절에 한 번 시도된 바 있다. 당시 신한국당은 대권주자를 자칭 ‘용’(龍)이라 일컬으며, 다수의 대권주자를 묶어 ‘팔룡’(八龍)이니 ‘구룡’(九龍)이니 하는 식으로 관리했다. 대권주자 집단을 형성하고 그 안에서 서로 경쟁하게 하는 한편, 이를 통해 일반 국민의 관심을 제고해나가는 것이었다. 아주 잘 기획되고 연출된 프로그램이라 시작은 좋았다.

당내 대선후보 선출 과정과 관련해 집단관리 프로그램의 이점은 제법 많다. 경쟁이 치열할수록 관심이 집중되기 때문에 집단관리는 흥행에 유리하다. 다양한 색깔의 주자들이 펼치는 대중적 행보를 통해 당의 기반이 확대될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대통령의 힘이 극대화되는 점이다. 이런 관리 체제에서는 대통령이 언제든지 새로운 인물을 대권주자군에 집어넣을 수 있다. 특정인을 견제할 수도 있다.

대권주자들이 올망졸망 경쟁하는 구도에서는 누구 하나 감히 대통령과 각을 세우는 ‘튀는 행보’를 하기가 쉽지 않다. 자기 말고도 대안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경쟁하는 가운데 특별히 부각되는 인물이 없으면 대통령이 최종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다. 대통령을 따르는 친위 세력이 있으면 마지막에 대통령이 사실상 낙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렇게 되면 레임덕이 최소화되는 효과도 얻을 수 있다. YS가 당시 대권주자들을 향해 “독불장군에겐 미래가 없다”고 일갈할 수 있던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었다.

지역 경쟁 대권 구도가 박근혜에게 미칠 영향

대권주자들은 지역 기반을 가져야 한다. ‘특정 지역에 연고가 있고 지역민이 지지를 보내는 후보’(Favorite Son)의 성격을 가져야 하는 건 일종의 필요조건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김태호 국무총리 후보는 부산·경남(PK)이 기반이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대구·경북(TK)이다. 이 밖에 잠재적 대권후보로 거론되는 정운찬 전 국무총리는 충청, 김문수 경기지사는 경기, 오세훈 서울시장은 서울이다. 이처럼 지역별로 연고나 기반을 가진 대권주자들이 각축하는 다자 구도의 형성이 MB가 의도하는 바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구도에서 박근혜 전 대표의 입지다. 지역 경쟁 구도라면 박 전 대표는 TK 주자로 국한된다. PK가 김태호에게 관심이나 애정을 표시하면 다시 말해 그것은 그동안 박 전 대표에게 쏠렸던 지지가 빠져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박 전 대표가 아직 수도권에 안착하지 못한 상황에 더해 영남의 TK·PK 대권주자 분립은 박 전 대표에게 뼈아픈 것이다.

박 전 대표에게 적신호는 김태호 총리 후보의 경쟁력이 아니다. 그의 등장으로 더 분명해진 ‘지역 경쟁의 다자 대권 구도’가 핵심이다. 아직은 박 전 대표가 여론 지지율에서 크게 앞서고 있지만 서서히 지역 경쟁 구도가 정착되면 그의 지지율도 출렁일 것이다. 게다가 그간 야권의 대권주자가 사실상 부재한 터라 야권 성향의 표가 박 전 대표에게 향했던 점을 감안해야 한다. 대선이 가까워질수록, 야권의 대권주자 면면이 부상할수록 야권 성향 표는 야권 후보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이래저래 박 전 대표에게 닥친 도전의 파고는 만만치 않아 보인다.

이번 개각의 또 다른 포인트는 개헌 가능성이다. 정치가 가능성의 예술이니 이재오 특임장관 후보에게도 대권의 문은 열릴 수 있다. 그러나 역대 2인자들의 운명이 그랬고, 거의 절망적인 국민 지지율을 감안하면 그 가능성은 난망이다. 아무리 ‘내 맘대로’의 MB라 할지라도 필패의 도박이다. 결국 이재오의 특임장관 임명은 개헌을 위한 카드인 것이다.

MB의 개헌 의지나 여권의 개헌 준비는 이미 상당한 수준이다. 국회의장이 임명한 특위에서 시안까지 공식 발표한 상태다. 이제 남은 것은 추진이다. 개헌이야말로 퇴임 뒤 준비나 현 여권의 안정적 장기 집권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내각제를 통해 보수 지배의 장기 집권 체제를 구축한 일본의 경험은 이 땅의 보수에게 너무나 매력적이다. 어, 어 하는 사이에 권력을 빼앗긴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집권기의 아픔은 쓰라리다. 학습 효과 때문에 불안한 승부를 피하고 싶은 열망은 더 강해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유신을 한 것도 이런 불안 때문이었다.

2008년 12월4일 이명박 대통령(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전국 시도지사회의에서 참석 인사들과 대화를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2008년 12월4일 이명박 대통령(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전국 시도지사회의에서 참석 인사들과 대화를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이재오 특임장관 임명은 개헌 위한 카드

개헌의 또 다른 추동력은 여권 핵심부, 특히 친이의 기저에 깔린 심리, ‘박근혜 공포’다. 이런저런 방법을 동원해 박 전 대표를 꺾으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것이 없다. 게다가 박 전 대표의 높은, 거의 압도적인 지지율은 난공불락으로 여겨질 것이다. 더불어 총선 공천에 대한 걱정이 태산이다 보니, 내각제나 이원집정부제에 대한 유혹에 점점 빠져드는 것이다. 개헌의 성패는 야권, 특히 민주당의 태도에 달려 있다. 만약 야권이 반대하면 개헌은 어렵다.

그렇다면 지금 야권의 태도는 어떤가? 공식적으론 정략적 개헌에 반대한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정치권 밖 진보 진영 내에서도 내각제 주창자들이 있지만, 민주당 내에서도 내심 찬성하는 세력이 없지 않다. 정권 교체보다 정치적 생존을 우선시하는 세력을 두고 하는 말이다.

지금의 민주당 내에는 여러 세력이 공존하고 있다. 정말 각양각색이다. 이 중에서 지난 2년 동안 당을 장악했던 당권파 내지 주류의 배후에 있는 원로·중진 그룹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들의 성향은 중도이거나 보수다. 자신들이 대권 게임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한계를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순리대로 정치판에서 퇴장할 생각은 안 한다. 그렇다면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활로는 ‘전부 아니면 무’(All or Nothing)의 대권 승부가 아니라 나눠 먹는 공생이기 쉽다. 공생의 제도적 장치가 내각제 아니던가. 따라서 이들은 이해관계 때문에 여권의 개헌에 호응하고 싶어한다. 물론 대놓고 맞장구를 칠 수야 없겠지만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개헌 논의에 참여하는 쪽으로 움직일 것이다.

10월3일로 예정된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원로·중진 그룹이 내각제에 찬성하는 당내 세력에게 당권을 맡기는 데 성공한다면 개헌을 위한 최상의 세팅이 이뤄지는 셈이다. 그러나 만약 전당대회에서 ‘호남을 넘어서는 한편 개헌에 반대하는’ 선명 진보세력이 당을 장악한다면 개헌은 물 건너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재오 특임장관 후보가 야권의 원로·중진 그룹과 대화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의 등장은 개헌을 위한 포석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민주당의 전당대회는 개헌의 분수령이라 하겠다.

민주당 전당대회가 개헌 분수령 될 것

YS의 대권주자 관리는 완벽하게 실패했다. 자신의 인기가 떨어지고, 기획자이자 매니저였던 아들 김현철이 구속되면서 구심점을 잃었다. 신한국당 내의 YS계는 지리멸렬해졌고, 민정계가 이회창 후보를 지원했다. 이인제 후보가 탈당하고, 자신마저 쫓겨나면서 YS의 집단관리 프로그램은 참담하게 실패했다.

또 하나 MB가 기억할 것이 있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 3당 합당에 앞서 당시 노 대통령과 YS, 김종필 공화당 총재가 노 대통령 임기 중 내각제 개헌 문서에 서명까지 했으나 실패한 이유다. YS의 반발은 표면적 이유일 뿐, 사실은 DJ의 반대 때문이었다. 만약 막강 실세 박철언이 오매불망하던 대로 DJ가 개헌에 호응하고 나섰다면 판이 완전히 다르게 진행됐을 것이다.

요컨대, 대권주자 집단관리가 훌륭한 기획이긴 하지만 실제로 성공하기란 쉽지 않다. 개헌은 야권 파트너(민주당 대표)가 누구냐에 따라 일차 성패가 갈린다. 따라서 MB의 두 마리 토끼 잡기가 기대와 달리 허망하게 실패하고, 무참하게 꺾일 가능성은 크다. 기획이나 의도대로 된다면 정치가 아니다. MB의 시도가 성공하기 힘든 또 다른 이유다.

MB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노자의 이 말 아닐까. ‘위자패지, 집자실지’(爲者敗之, 執者失之), 자꾸 뭘 쓸데없이 하려고 하면 더욱 그르칠 뿐이요, 자꾸 잡으려고 하면 더욱 놓치게 될 뿐이다. 그가 알아듣기는 할까.

이철희 한국사회여론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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