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 결단’. 휴일이었던 2월28일 청와대 ’핵심관계자’가 기자들 앞에서 던진 표현이다. 말 한마디의 위력은 대단했다. 이튿날 거의 모든 언론이 이 발언을 비중있게 보도했다. 정확한 메시지는 세종시 문제와 관련해 “지금처럼 아무런 결론을 못 내리고 계속 흐지부지하면 적절한 시점에 중대 결단을 내릴 수도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정치권과 대다수 언론은 중대 결단이 곧 국민투표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국민투표 논란은 이명박 대통령이 이틀 뒤 직접 나서서 “국민투표는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말해 일단 가라앉았다.
‘중대 결단’ 사건의 시작과 끝만 놓고본다면 청와대 ’핵심 관계자’가 오해의 소지가 있는 개인 의견을 피력해 논란이 확산됐고, 이를 수습하기 위해 이 대통령이 직접 나선 해프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의 핵심관계자가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정치부장을 지낸 이 대변인에게 그 정도의 정무적 감각조차 없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친이-친박, 여야 공박 치열할수록 반사 효과
이번 소동을 청와대의 ‘기획’으로 볼만한 증거는 희박하지만, 일련의 과정을 통해 청와대는 분명 이득을 얻었다. 우선 한나라당이 구성할 예정이었던 중진협의체에 세종시 관련 결론을 내놓으라는 우회적 메시지를 전달했다. 자칫 크게 주목받지 못할 수도 있었던 중진협의체에 대한 주목도도 높아졌다. 무엇보다 수면 아래에 잠복해있던 국민투표 방안을 공론화 하기에는 ‘중대 결단’ 애드벌룬이 제격이었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컨설팅업체 관계자는 “국민투표 논란이 불거진 과정, 그리고 이를 부인할 때에도 ‘현재로서는 검토하고 있지 않다’며 애매한 표현을 쓴 사실로 볼 때 중대 결단 발언은 전형적인 정치 행위로 봐야 한다”며 “국민투표에 대한 여론의 추이나 언론의 반응을 살피려 하는 목적이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과 세종시 이슈의 상관관계를 살펴보면 이같은 해석에 좀더 무게가 실린다. 동아시아연구원(EAI)과 한국리서치가 2월27일 공동으로 실시한 정기 여론조사를 보면, 이 대통령이 국정을 잘 이끌고 있다고 응답한 사람은 전체 응답자 가운데 절반에 육박했다(49.2%). 부정적 평가는 이보다 조금 적었다(48.4%).
주목할 부분은 흐름이다. 이 대통령의 지지율은 2월27일 조사에서 일시적으로 오른 것이 아니라 2009년 말부터 꾸준히 상승세를 보였다. 11월12일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세종시 원안 수정에 대한 대국민 사과를 할 때만 해도 이 대통령의 지지율은 40%에 미치지 못했다(39.2%). 같은 기관의 11월28일 조사 결과였다. 이 대통령의 지지율은 그로부터 넉 달 연속 상승 곡선을 그렸다. 12월19일 조사에서 40%를 넘겼고(44.1%), 1월11일에는 여기서 다시 소폭 올랐다(44.3%).
동아시아연구원은 이슈 브리핑을 통해 “최근 세종시 수정안을 둘러싼 친이-친박, 여야 간 정치 공방이 격해지는 가운데 수정안에 대한 지지 여론이 하락하고 있는데도 대통령 지지율이 상승하고 있다는 점은 대통령 국정 지지에 대한 평가가 현재 논란이 되는 세종시 이슈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음을 시사한다”고 분석했다.
MB 지지율의 첫 번째 비밀이 여기에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주도하는 세종시 수정안은 반대해도 대통령은 반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1월11일 세종시 수정안을 발표한 쪽은 정부였지만, 이를 둘러싼 논란의 중심은 여의도와 국회로 넘어갔다. 세종시 논란은 이때부터 이 대통령과 야당의 싸움이 아니라 친이-친박의 싸움이 됐다. 악재가 될 수 있었던 이슈를 한나라당이 뒤집어쓴 덕분에 이 대통령 자신은 ‘탈여의도’ 이미지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친박 그룹 관계자는 “세종시 수정안으로 박근혜 전 대표를 압박하는 이 대통령의 모습을 보면, 이 대통령은 정치를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 효과적으로 정치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세종시 이슈에 대한 여론도 좀더 꼼꼼히 볼 필요가 있다. 수정안 찬성보다 반대가 높다고는 하지만 지역별로 보면 이 대통령에게 나쁘지만은 않다. 여론조사 기관 리얼미터의 3월2~3일 조사 결과 세종시 수정안 반대(45.8%)는 찬성(42.8%)보다 높았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층이 많은 서울과 경기, 인천 등 수도권 여론은 반대였다. 전국 차원의 여론 지형만 생각할 때 보이지 않던 ‘숨은 1인치’는 바로 수도권이었다. 이 대통령이 지지층 유지나 강화를 염두에 뒀다면 세종시 논란이 오히려 효과적이었다는 이야기다.
‘세종시 이슈’, 수도권에서는 남는 장사이 대통령은 2007년 대선 때도 비슷한 전략을 취했다. 한반도 대운하 논란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쉽다. 그때도 여론조사에서는 대운하 찬성보다 반대가 늘 앞섰다. 대선 닷새 전인 12월14일 리얼미터 조사에서 대운하 찬성은 31.1%에 불과했다. 반대는 더 많았다(39.3%). 그런데도 이 대통령은 대선 이틀 전까지 한반도 대운하 공약을 집중적으로 홍보했다. 호남 유권자와 진보개혁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는 반대가 많았지만, 대구·경북 등 한나라당 지지 성향이 강한 지역에서는 찬성이 압도적으로 높았기 때문이다. 대선 직후 한나라당 내부에서는 “찬반 양론이 뚜렷하게 갈리는 한반도 대운하 이슈가 지지층 결집에는 대단히 효과적이었다”라고 분석했다.
이 대통령의 지지율 고공 행진은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침체와 비교된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의 2월19일 정기 여론조사에서 박 전 대표 지지율은 28.9%로 나타났다. 다른 대선 예비주자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역시 문제는 흐름이다. 세종시 논란이 본격적으로 커지기 직전인 2009년 11월2일 같은 조사에서 박 전 대표는 35.4% 지지율을 기록했다. 불과 석 달여 만에 6.5%가 빠진 것이다. 리얼미터의 2월 말 조사에서도 박 전 대표 지지율은 29.7%로, 일주일 전과 비교해 3.5% 떨어졌다. 리얼미터는 조사 이래 최저치라고 밝혔다.
박 전 대표의 지지율이 하락 곡선을 그리는 가장 큰 이유는 ‘세종시 피로감’이 꼽힌다.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 드라이브에 ‘원안 고수’라는 원칙으로 맞서는 모습이 인기를 깎아먹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철희 KSOI 수석 애널리스트는 “한나라당 주요 지지층을 형성하는 합리적 보수 성향의 유권자들은 세종시 이슈와 관련해 박 전 대표보다 이명박 대통령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며 “이 대통령은 최악의 경우 ‘박근혜 책임론’을 부각시키며 손 털고 나오면 그만이지만, ‘원안 고수’를 굽히지 않는 박 전 대표는 세종시 논란에 몇 달째 갇혀 지지세가 위축된 형국”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KSOI 조사를 보면 박 전 대표의 지지율은 한나라당 지지층에서 2009년 11월 조사와 비교할 때 무려 23.5%포인트나 빠진 34.7%에 그쳤다. 수도권에서도 11월보다(30.4%) 많이 내려앉은 모습이었다(23.9%). 대신 그동안 한나라당과 박 전 대표를 많이 지지하지 않던 호남과 젊은 층 지지도가 약간 올랐지만, ‘집토끼’의 이탈과 비교하기는 어렵다. 결과론이기는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이 세종시 수정안 드라이브로 자신의 지지율 강화와 박 전 대표 견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고 있는 셈이다.
친이-친박 대결 속 존재감 약해진 민주당이 대통령이 2월25일 취임 2주년을 맞아 ’개헌 카드’를 본격적으로 꺼내놓은 배경도 의미심장하다. 개헌에 대해서도 친이와 친박은 전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친이는 내각제나 이원집정부제를 선호하는 반면 친박은 4년 중임 대통령제를 주장하고 있다. 세종시 수정안과 마찬가지로 친박의 양보가 없다면 국회 통과가 난망하다. 만약 이 대통령이 세종시 수정안에 이어 내각제, 혹은 이원집정부제 개헌 논의까지 드라이브를 건다면 박 전 대표로서는 결코 동의하기 어렵다. 친이 입장에서는 개헌 카드를 통해 자연스레 ’박근혜=발목잡기’ 이미지를 부각시킬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친박 진영의 이정현 의원은 3월4일 과의 전화 통화에서 “개헌 이슈가 본격화되리라는 가정은 충분히 가능하지만 아직 구체적 안이 제시되지 않아 입장을 정하기는 어렵다”면서도 “다만 개헌 논의를 특정 정파가 주도하는 순간 또 다른 개헌을 예고한다”고 말했다. 개헌 논의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지만 추진 방식은 ’특정 정파’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공감대를 확보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특정 정파’란 친이계를 겨냥한 것으로 풀이된다.
세종시 수정안 드라이브를 중심으로 이명박 대통령의 ’정치’를 이해할 때 추가해야 할 것은 민주당이다. 세종시 논란이 친이-친박, 즉 한나라당 집안싸움 양상으로 전개되며 가뜩이나 존재감이 희박한 민주당은 더욱 소외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동아시아연구원의 2월27일 조사에서 이 대통령의 지지율 상승세와 반대로 민주당·한나라당 등 주요 정당의 지지율은 정체되거나 하락 추세로 돌아섰다. 한나라당은 32.7%의 지지를 받아 1월 대비 1.3%포인트 하락했다. 민주당은 더 심각하다. 1월 대비 4.3%포인트나 하락해 17.9%에 머물렀다. 여권 내부 갈등이라는 호재에도 제1야당인 민주당 지지율이 오히려 더 떨어진 것이다.
표면적으로 볼 때 세종시 수정안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발목이 잡혀 있는 쪽은 이명박 대통령이다. 여당 내 야당인 친박의 완강한 반대를 떠올릴 때 그렇다는 말이다. 물론 실제로도 친박이 수정안 통과의 최대 걸림돌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정치적 소재로 볼 때 세종시를 둘러싼 갈등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악재라기보다 호재다. 자신의 지지층은 결집한 반면, 박근혜 전 대표의 지지층은 처음으로 동요하기 시작했다. 친박의 강한 반발은 제1야당인 민주당을 견제하는 효과까지 가져왔으니, 이 대통령에게는 이래저래 ‘남는 장사’였다고 할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3월5일 대구·경북(TK)을 방문한 것도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이 자리에서 이 대통령은 대구를 연구·개발(R&D) 특구로 지정하는 행정적 준비 작업에 착수하라고 지시했다. 이 대통령은 이날 “R&D 특구가 과학 비즈니스 벨트와 연계한 지역 특화 발전 전략이 될 것”이라며 “세종시로 인해 대구·경북이 손해보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이 대통령은 “대구·경북 발전을 위해서는 머리속에서 정치적 계산을 다 버려야 한다”며 “지역발전에는 정치 논리가 없다”고 말했다.
정치적 계산 버리는 정치적 계산?세종시 수정안 추진 과정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있는 TK 지역을 위해 이 대통령이 직접 선심성 보따리를 풀어놓은 것이고, 이는 동시에 박 전 대표의 핵심 지지 기반인 TK를 직접 공략하기 시작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대통령 본인은 “정치적 계산을 다 버려야 한다”고 말했지만 세종시 논란을 정치적으로 계산할 때 가장 수혜를 입은 쪽은 박 전 대표도, 민주당도 아닌 바로 이 대통령 자신이었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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