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정희 민주노동당 의원은 6월4일부터 일주일 동안 노무현 전 대통령 분향소가 차려진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단식농성을 벌였다. 건강이 나빠져 실신하기 직전까지 그는 이명박 대통령의 사과와 국정기조 변화 등을 호소했다. 그런데 그를 알아보고 격려하는 시민들은 “의원님 고생하는 건 잘 알지만, 사과는 무슨 사과입니까? 이젠 대통령이 물러나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 자리를 함께 지킨 민주노동당 인사들은 “조문을 하러 나온 평범한 시민들조차 ‘대통령 물러나라’고 하는데, 민주노동당이 그런 민심보다 뒤처질 수는 없지 않느냐”는 생각을 이심전심으로 나눴다.
#2. 5월24일 늦은 밤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와 심상전 전 공동대표, 조승수 의원이 노 전 대통령을 조문하려고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을 찾았다. 마을 들머리에서 노사모 회원들이 이들을 가로막았다. 유명인사인 한 회원이 격앙된 목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나가! 그동안 노무현 까니까(비판하니까) 좋았지? 이제 됐지?” 보름이 넘게 지난 6월10일 서울시청 앞 광장. 노 전 대통령 추모제를 겸한 범국민대회에서 이명박 정권의 독주를 비판하는 연설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온 노회찬 대표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노사모 회원입니다. 어제부터 광장을 지켰는데, 진보신당 깃발도 봤습니다. 추모제가 무사히 열릴 수 있도록 밤새 함께 지켜주셔서 고맙습니다.”
‘진보정치대연합’ 통해 선거 승리 목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노 전 대통령 서거로 분노한 민심을 달래고, ‘가해자의 정체’를 밝히는 데 민주당 못지않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거리에서 두 당은 욕을 먹었고, 비판받았고, 기대도 얻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국민과 언론의 주된 관심은 민주당에 쏠렸다. 노 전 대통령이 마지막 순간까지 붙든 화두, 바로 ‘진보’를 내세우는 두 정당은 이런 분위기에 밀려 오히려 입지가 좁아지는 모양새다.
지금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여론을 집중시키고 지지 기반을 강화·확대하려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다. 다른 야당, 특히 민주당과의 연대도 그런 시도 가운데 하나다. 두 당 안에선 정책 공조를 넘어 10월 재·보궐 선거와 내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과 선거연합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까지 공공연히 거론된다. 지난 17대 국회 때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의 차이가 샛강이라면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의 차이는 한강”이라고 선을 긋거나, △신자유주의·한-미 자유무역협정 반대 △비정규직 차별 철폐 △국가보안법 폐지 등 까다로운 연대 조건을 내걸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민주노동당의 초점은 ‘반이명박’ ‘반한나라당’이다. 민주노동당은 창당 9년 만에 처음으로 연 6월20~21일 정책당대회에서 이명박 정권을 아예 ‘독재’로 규정하고, ‘정권 퇴진’을 당 활동의 공식적인 목표로 결정했다. 2017년 집권을 목표로 한 로드맵도 마련했다. △10만 당원 확보 △2010년까지 지지율 20% 확보 △2012년 원내 교섭단체 구성 및 2016년 제1야당 도약 등의 단계를 거쳐 2017년 대선에서 35% 이상을 득표해 승리하겠다는 것이다.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과제가 바로 ‘반MB범국민연대기구’ 건설과 ‘진보정치대연합’ 실현이다.
그러나 연대의 구체적인 실행 프로그램은 아직 마련하지 못했다. “반이명박 투쟁전선 구축을 위한 연대·연합”인 ‘반MB범국민연대기구’는 “민주당 등 야 4당과 5대 종단, 시민단체까지 망라하겠다”는 원론만 있을 뿐이다. 이 때문에 당 안에서도 “결의나 각오의 수준만 높이는 투쟁은 무책임하다. 국민이 ‘대통령 물러나라’고 말하는 건 정서적인 차원인데, 이를 정치적 프로그램이 아니라 구호로 받아내는 건 적이 아니라 우리가 괴로운 투쟁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이가 나온다.
‘미친소닷넷’ 대표를 부대변인으로 영입
이어지는 각종 선거에서 진보 진영을 규합해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을 심판하겠다는 ‘진보정치대연합’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고 6·15 공동선언에 찬성하는 제 정당과 정치조직, 민중·시민사회 단체, 네티즌 등”이 대상이다. 일차적으로는 당의 전통적 지지 기반인 민주노총·전국농민회총연맹 등과 연석회의 정례화 등을 통해 결속력을 높이겠다는 얘기다. 통일·노동·학생 등 30여개 운동단체의 모임인 한국진보연대의 시·군·구 지역조직 건설을 당 차원에서 주도해 시민사회단체와 연대를 강화할 방침도 세웠다. 진보신당이 합당 대상이라는 태도에도 변함이 없다.
이와 별도로 민주노동당은 지난해 촛불 정국에서 큰 역할을 한 ‘미친소닷넷’ 대표 백성균씨를 최근 부대변인으로 영입했다. 인터넷상에서 민주노동당을 좀더 세련되게 알리고, 누리꾼과 소통을 강화하겠다는 의지다.
하지만 ‘원래 같은 편’인 진보 진영과 관계를 튼튼히 하는 것만으로 ‘진보대연합’이란 이름을 붙이기엔 그 폭이 너무 좁다. 이 때문에 실제 선거에선 민주당과 선거연합이 이뤄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당대회 결의문과 선언문을 살펴보면, 실제로 민주당과의 선거연합 가능성을 열어놓은 대목이 눈에 띈다. “(내년 지방선거에서) 선택적 반한나라당 정책연합·선거연합을 추진해 한나라당 후보를 심판하자.” “(2012년) 대선에서 한나라당의 재집권을 저지하고 수권 정당으로 도약하겠다.” 민주노동당은 공식적으로 이런 가능성을 부인하고 있지만, 당 안에선 범야권 후보 단일화로 치른 지난해 서울시 교육감 선거와 올해 울산 재선거, 경기도 교육감 선거 등의 사례를 들어 “이명박 정권을 심판하려면 당연한 일”이라고 말하는 이가 적지 않다.
물론 이런 논의가 지방선거를 앞두고 각 정파의 이해관계를 반영한 것일 뿐이라는 비판도 있다. 창당 과정부터 민주노동당에서 활동한 한 인사는 “정파로 나뉜 지역 세력은 대중 정치인을 키우는 것보다 기초단체장 하나 배출하는 게 조직을 연명하는 데 유리하다. 이 때문에 중앙당에 극단적인 선명성을 요구하면서 선거연합 주장을 펴는 것”이라고 쓴소리를 했다. 선거연합을 하면 당선 가능성이 후보 단일화의 기준이 되고, 한쪽이 모든 지역을 독식할 수 없기 때문에 각 정파의 유력 인사가 유리한 고지에 오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진보신당의 관심은 정책연합을 통한 영향력 확보다. 노회찬 대표가 6월22일 대표단 회의에서 “근원적 처방은 국정운영 방식과 정책 내용을 근원적으로 바꾸는 것뿐이고, 이를 하지 못한다면 남은 건 대통령을 바꾸는 것”이라며 정권 퇴진을 주장했지만, 이는 정치적인 수사에 가깝다. 진보신당은 오히려 그동안 할 수 없었던 입법활동이 더 시급한 일이라고 본다.
‘진보개혁입법연대’ 의원 23명 동참
이 때문에 조승수 진보신당 의원은 지난 6월10일 다른 야당에 ‘진보개혁입법연대’를 제안했다. 민주주의와 민생 의제에 뜻을 모으고, 함께 법안을 발의하자는 취지다. 반응은 조 의원조차 “15명만 확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예상 밖”이라고 할 정도로 고무적이다. 제안을 한 지 열흘 남짓 만에 최재성·이종걸·최문순 민주당 의원, 유원일 창조한국당 의원 등 23명이 동참 의사를 밝혔다. 7월1일엔 국회 귀빈식당에서 첫 모임을 연다. 민주노동당 의원단도 조만간 참여 여부를 결정하는데, 정치권에선 긍정적인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조 의원은 진보개혁입법연대 동참 뜻을 밝힌 의원들에게 △일제고사 폐지 및 학년별 3% 미만 표집으로 학력평가 △학원 심야교습·선행학습 금지 △벌금형을 허용하는 통신비밀보호법 개정 등에 대해 서명을 받고 있다. 비정규직보호법, 근로자파견법, 특수고용직 노동자의 지위에 관한 법 개정도 준비하고 있다. 비정규직 문제 해결은 창당 때부터 강조해온 만큼, 입법 활동을 통해 진보신당의 정체성을 명확히 드러내겠다는 취지다. 국민에게 ‘생활 속 진보’로 다가가려는 노력으로 휴대전화·인터넷 사용료 등 통신비 인하, 소득·재산에 따라 부과되는 벌금이 달라지는 일수벌금제 도입도 추진한다.
진보신당의 양대 스타 노회찬 대표와 심상정 전 공동대표는 독자 영역을 확보해 당의 지지 기반을 확대하려 애쓰고 있다. 4월부터 단독 대표를 맡은 노회찬 대표는 조승수 의원 당선 등의 성과를 거둬 당 안에서 “노회찬 체제가 안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내년 서울시장 선거 출마도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다. 걸림돌은 ‘삼성 X파일 사건’ 재판이다. 노 대표는 1심에서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아 피선거권을 박탈당할 위기에 놓였다. 현재 진행 중인 2심에서 최소한 선고유예는 받아야 출마가 가능하지만, 현재로선 전망이 불투명하다. 2심 결과도 좋지 않으면, 노 대표는 올해 안에 서울시장 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해 법원을 압박하고, 여론도 환기할 계획이다.
심상정 전 공동대표는 교육을 화두로 잡았다. 5월 말부터 20일 동안 핀란드·스웨덴·노르웨이의 공교육과 복지제도를 살피고 온 그는 6월25일 토론회를 열어 ‘교육미래위원회’를 국회 상설위원회로 설치하자고 제안했다. 공교육 개혁을 위해 정부와 국회, 교사, 학생, 학부모 등 관련자가 장기적인 교육 비전을 함께 만들고, 4~5년 단위로 세부적인 이행계획도 세워보자는 것이다. 심 전 대표는 지난해 경기 고양시에 설립한 사단법인 ‘마을학교’를 통한 교육 공동체 모델 실험에도 더욱 힘을 쏟을 계획이다.
‘한나라 대 민주’ 구도에 소외될 수도외국에 거주하는 당원들의 조직적인 활동도 활발하다. 6월20일 스위스 제네바에선 유럽 각지에 사는 교민·유학생 30여 명이 모여 ‘유럽당원협의회’ 출범식을 열었다. 당내 선거 투표권을 가진 이들은 앞으로 진보신당의 국제적인 정책 교류를 돕고, 한인 사회에 진보신당을 알리는 일을 벌일 예정이다.
궁극적으로는 진보신당의 고민도 선거연합에 닿는다. 하지만 ‘반이명박’만으로는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본다. 비정규직 문제, 한-미 자유무역협정 등 주요 현안에 이견이 있다면, ‘묻지마 연대’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홀로 서기엔 힘이 달리고, 손을 잡기엔 명분이 부족한 현실이다.
진보 진영 안에선 지금이 ‘진보적 정치연합’으로 세력을 재편할 기회라는 기대도 있다. 하지만 이들의 노력이 찻잔 속 태풍에 그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정치학 박사)는 “진보 정당이 보수 정당, 개혁 정당과 함께 자리를 잡고, 계층 갈등이나 이념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기 바란다. 하지만 지금 보고 있듯 이명박 정부의 독주가 심할수록 한나라당 대 민주당의 ‘양극화’ 흐름은 강해지고, 진보 정당이 희생하라는 압박이 거세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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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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