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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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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핵실험은 내부 단도리용?

‘협상용’ 카드였던 기존의 핵실험·압박과 달리 이번엔 북한 내부 정치적 이유에 따른 강경 조처인 듯
등록 2009-06-04 15:20 수정 2020-05-03 04:25

“우리나라의 평화적 위성 발사를 걸고든 적대세력의 악랄한 책동이 극히 위험한 단계에 들어서고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적대세력의 갖은 제재와 봉쇄 속에서 살아온 우리에게 이따위 제재가 절대로 통할 리 없다.”
지난 4월29일 오후 4시50분 북한 외무성은 대변인 명의로 도발적인 성명을 내놨다. 앞서 4월5일 북은 로켓(인공위성)을 쏘아올렸고, 4월13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이를 비판하는 의장성명을 만장일치로 채택한 바 있다. 그로부터 2주여 만에 북이 이에 대한 공식 의견을 밝힌 게다. 한 달여 전 나온 성명을 새삼 들춰보는 이유가 있다. 최근 북은 ‘말’과 ‘행동’을 고스란히 일치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2차 지하 핵실험을 실시한 다음날인 지난 5월26일 평양에서 열린 군중집회에서 참석자들이 핵실험 성공을 축하하며 박수를 치고 있다. 사진 연합

북한이 2차 지하 핵실험을 실시한 다음날인 지난 5월26일 평양에서 열린 군중집회에서 참석자들이 핵실험 성공을 축하하며 박수를 치고 있다. 사진 연합

사전에 핵실험 움직임 전혀 파악 못해

“1990년대에 우리는 이미 조선 정전협정의 법률적 당사자인 유엔이 우리에게 제재를 가하는 경우, 그것은 곧 정전협정의 파기, 즉 선전포고로 간주될 것이라고 선언한 바 있다. …유엔안전보장리사회가 즉시 사죄하지 않는 경우 우리는 첫째로, 공화국의 최고 리익을 지키기 위하여 부득불 추가적인 자위적 조치들을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여기에는 핵시험과 대륙간탄도미싸일 발사 시험들이 포함되게 될 것이다. 둘째로, 경수로 발전소 건설을 결정하고 그 첫 공정으로서 핵연료를 자체로 생산보장하기 위한 기술개발을 지체 없이 시작할 것이다.”

이번에도 ‘빈말’이 아니었다. 온 나라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급서로 충격에 빠져 있던 지난 5월25일 오전 9시54분께 함북 길수군 풍계리 인근에서 진도 4.5 안팎의 인공지진파가 감지됐다. 6자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져 있던 지난 2006년 10월9월 같은 지역에서 감지된 진도 3.5의 인공지진파는 북한의 1차 핵실험이었다. 이날 오후 북 은 “공화국의 자위적 핵 억제력을 백방으로 강화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으로 또 한 차례의 지하 핵시험을 성과적으로 진행했다”고 발표했다.

허를 찔린 정부는 허둥댔다. 사전에 핵실험 움직임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 북은 핵실험 강행 직전 중국과 미국 쪽엔 따로 통보를 해둔 것으로 전해진다. 우리 쪽엔 어디서도 사전 통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날 오후 청와대에서 급히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주재하고 “정부는 어떤 상황에서든 흔들리지 말고 의연하고 당당하게 대응하되, 빈틈없는 안보태세로 국민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의연하고 당당한 대응’이란 뭔가?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는 한 국책연구소 외교·안보전문가는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이튿날 정부는 ‘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PSI) 참여를 공식 선언했다.

북은 왜 2차 핵실험이란 ‘강수’를 둔 것일까? 백학순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5월26일 평화재단(이사장 법륜 스님) 주최로 서울 대한출판문화회관에서 열린 전문가포럼에서 “북한의 강공 드라이브 배경에는 기본적으로 소련이 무너진 이후 북한이 생각한 21세기 생존과 번영 전략이 자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미 1990년대 중반 노동당 중앙위에서 토론 끝에 나온 결론은 한국전쟁을 조속히 종료하고, 미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등 관계를 정상화하는 것에 사활이 걸려 있다는 점이었다”며 “이를 위해 미국이 무시할 수 없는 핵 카드를 들고 나왔던 것”이라고 말했다. 예의 ‘협상용 압박카드’론이다. 백 위원의 말을 조금 더 들어보자.

대외 압박용 수단치고는 속도 너무 빨라

“(1993~94년) 제1차 핵위기 때는 제네바 기본합의, (2002년 10월 제임스 켈리 미국 특사의 방북을 계기로 다시 불거진) 제2차 핵위기 때는 9·19 공동선언을 통해 북-미는 핵위기를 풀었다. 비슷한 내용의 반복이었다. 북으로선 핵을 가지고 있으면 좋은데 정치·경제적 비용이 크다. 따라서 협상으로 포기하되, 그에 상응하는 것을 받아내겠다는 전략이었다. 핵을 포기하는 대신 관계 정상화와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는 등의 안전보장을 해달라는 것이다. 여기에 에너지·경제 지원 등의 내용이 포함됐다. 두 차례 협상의 공통된 결론이다. 하지만 2005년 9·19 공동선언 이후 6자회담의 상황은 북의 비핵화에만 초점이 맞춰지면서 관계 정상화·평화체제 구축 등이 ‘행동 대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비핵화’의 기술적인 문제, 이를테면 검증이나 시료 채취, 사찰 등의 문제가 쟁점으로 떠올랐다. 북으로선 자기들의 전략이 제대로 투사되지 않는다고 봤을 터다. 결국 이런 수준에서 벗어나 원래 수준, 즉 9·19 공동선언의 수준으로 되돌려 협상의 판을 근본적으로 다시 짜려고 최대의 압박을 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지하 핵실험 시설이 있는 함북 길주군 풍계리 일대를 찍은 위성사진. 5월25일 북한이 실시한 2차 핵실험으로 만들어진 인공지진파는 1차 실험 때보다 규모가 큰 진도 4.5를 기록했다.

북한의 지하 핵실험 시설이 있는 함북 길주군 풍계리 일대를 찍은 위성사진. 5월25일 북한이 실시한 2차 핵실험으로 만들어진 인공지진파는 1차 실험 때보다 규모가 큰 진도 4.5를 기록했다.

그럼에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위기를 키워가는 북의 발걸음이 지나치게 빨라 보인다. 미국과의 협상이 유일한 목적이라면, 조금은 ‘기다림의 미덕’을 보여줄 수도 있었던 터다. 실제 북은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취임 이전부터 압박과 공세를 시작했고, 오바마 행정부가 대북정책을 검토하고 있는 사이 로켓(인공위성) 발사에 이어 2차 핵실험까지 내달았다. 상당수 전문가들이 “추가 핵실험을 예상하긴 했지만, 북이 이 정도로 빨리 움직일 줄은 몰랐다”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기동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은 이렇게 반문했다.

“북한이 오바마 행정부에 거는 기대가 없었을까? 대북정책을 검토하는 기간, 한 6개월 정도는 관망해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오바마 행정부 출범 직후부터 말의 수위를 높이더니 로켓(인공위성)을 발사하고, 그 50일 뒤에는 핵실험까지 했다. 북한으로서도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정책 방향에서 ‘좋은 징조’를 봤을 텐데, 그래도 강경한 대응에 나선 이유가 뭘까? ‘협상용 압박’을 넘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다고 봐야 한다.”

1차 핵실험으로 북은 ‘사실상의 핵 보유국’ 지위를 얻었다. 미국도 이를 묵시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터다. 추가 핵실험은 국제사회의 강경 대응만 부를 뿐이란 사실은 북도 잘 알고 있다. 게다가 오바마 행정부는 출범 이전부터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신호를 북쪽에 보내왔다. 이기동 연구위원은 “그럼에도 2차 핵실험을 강행한 배경을 찾으려면 관심 끌기나 협상용이라는 일반적인 해석보다는 내부 정치적 측면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눈여겨볼 대목은 핵실험의 ‘시기’다. 북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노 전 대통령 서거에 애도의 뜻을 밝히는 조전을 보냈다는 사실이 보도된 날 핵실험을 전격 단행했다. 일부에선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시점을 노려 핵실험의 효과를 극대화하려 했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미 현충일(5월30일)에 맞춰 ‘메시지’를 보낸 것이란 지적도 나왔다. 노 전 대통령의 투신이란 ‘내우’에 직면한 이명박 정권에, 핵실험이란 ‘외환’까지 겹치게 해 어려움을 가중시키려는 의도였을 것이란 ‘해석’도 없지 않다. 그런가? 현실은 되레 ‘외환’이 ‘내우’를 상쇄시키는 측면이 강해 보인다. 남과 북 강경파의 적대적 공생, 낯설지 않은 상황인 게다.

주체사상 확립 ‘5·25교시’ 내린 날 핵실험

따져보자. ‘5월25일’은 북한에서 의미심장한 날이다. 특히 최근의 후계구도 논의와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1967년 그날,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15차 전원회의가 열렸다. 그 이전까지 북한에선 ‘과도기’ 논쟁이 한창이었다. 소련 모델을 따라야 한다는 쪽과 중국 모델을 따라야 한다는 쪽이 팽팽하게 대립각을 세워왔다. 그날, 1967년 5월27일 김일성 주석은 이른바 ‘5·25 교시’를 내놓는다. “중국을 따르는 자는 좌경 모험주의자, 소련을 따르는 자는 우경 기회주의자”로 규정한 김 주석은 “우리는 주체의 방식대로 가야 한다”는 결론을 제시했다. 끝이었다. 논쟁은 이로써 막을 내렸다. 이날로 ‘주체’는 ‘유일사상’의 지위를 차지하게 됐다. 이기동 연구위원의 말이다.

“김일성 유일체제가 확립되고, 북 내부가 ‘보수화’의 길로 접어든 계기가 바로 ‘5·25 교시’다. 이후 북에선 마르크스레닌주의 전집은 물론 서양의 소설과 철학·경제학 서적들이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후계구도 논의가 본격화하는 지금 북으로선 그 어느 때보다 내부 결속이 절실하다. 5월25일은 그런 면에서 북 지도부가 중시할 수밖에 없는 날이었다. 이처럼 핵실험 강행의 배경에 북 내부 상황이 크게 작용했다면, 북의 강경한 태도는 앞으로도 당분간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핵실험 직후부터 미국을 중심으로 유엔안보리에선 대북 추가 제재 결의안 논의가 무르익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마저 제재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는 모양새다. 안보리의 새 결의안을 북은 ‘도발’의 새로운 명분으로 삼을 게 뻔하다. 어디까지 나아갈까? 4월29일 외무성 성명이 이미 예고한 바다. 남쪽의 PSI 전면 참여를 빌미로 ‘정전협정 무효화’는 이미 선언했다. 남은 건 세 가지다.

첫째, ‘대륙간탄도미싸일’(ICBM) 발사 실험이다. 2차 핵실험까지 한 마당에 로켓(인공위성)이라는 ‘허울’까지 벗고 탄도미사일을 쏘아올린다면 그 파장은 만만찮을 게다. 둘째, 핵연료 자체 생산이다. 재처리 시설을 가동해 플루토늄을 추출하는 것은 물론 경수로의 연료인 고농축우라늄(HEU) 생산도 공식화할 수 있다는 얘기다. 셋째, 서해상에서의 군사적 충돌이다. 앞선 두 차례 ‘서해교전’은 그나마 남북 사이에 ‘대화의 끈’이 이어져 있는 상태에서 발생했다. 더는 아니다. 그래서 걱정이다.

기다리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 없는 정부

미국의 ‘딜레마’는 이어지고 있다. 오바마 행정부가 핵실험 이후 한편으론 유엔안보리를 통한 제재 결의안 마련에 골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도발적 행위를 중단하라’는 것 외엔 지극히 말을 아끼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입장’이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기실 테러지원국 재지정 문제는 북에 큰 타격이 되지 않는다. 애초 북이 테러지원국 해제를 요구한 것은 가시적인 이득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적대관계를 청산하겠다는 미국의 ‘의지’를 확인하기 위한 시금석이었을 뿐이다. 금융제재는 ‘위력’을 발휘할 테지만, 종국에 해답은 ‘대화’뿐이다. 오바마 행정부가 부시 행정부의 ‘실패한 정책’을 답습할 가능성은 극히 낮기 때문이다.

한반도가 다시 격랑에 휩쓸리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보인다. ‘첫 단추’를 잘못 뀄으니, 단추를 계속 채워나갈 수는 없다. ‘명분’과 ‘계기’도 없이 고개를 숙일 수도 없는 일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처지다. 그저 ‘의연하고 당당하게’ 북-미가 대화를 재개할 때를 기다릴밖에.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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