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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고집’을 어찌하리오

‘박연차 외풍’ 맞은 민주당… 지도부는 “‘불출마 선언’ 기회”, 정 전 장관 쪽은 “정말 필요한 시기”
등록 2009-04-03 04:48 수정 2020-05-02 19:25

“(박연차 수사를 통해) 정권이 당이 존립 근거를 위협하고 있다. 야당을 죽이겠다는 상황이다. 당내 갈등이 계속돼서는 안 된다. 정동영 전 장관이 곧 결단하시기를 기대한다.”(윤호중 민주당 전략기획위원장) “당이 최대의 위기로 몰렸는데, 지도부는 제대로 돌파하지 못하고 있다. 강한 지도력이 필요한 시점이다.”(박영선 민주당 의원)
정동영 전 장관의 출마 선언으로 내우(內憂)에 빠져 있던 민주당에 ‘박연차 정국’이란 외환(外患)이 겹쳤다. 정세균 대표도, 정 전 장관도 당이 최대의 위기에 처했다고 입을 모은다. 해법은 정반대다.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정·관계 로비 의혹이 불거지며 어려운 처지에 빠진 민주당에 또 하나의 위기 요인은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이다. 정 전 장관은 여전히 전주 덕진 출마 의사를 굽히지 않고 있다. 2007년 3월25일 정세균 민주당 대표(오른쪽)와 손을 맞잡고 있는 정 전 장관. 사진 한겨레 이종찬 기자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정·관계 로비 의혹이 불거지며 어려운 처지에 빠진 민주당에 또 하나의 위기 요인은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이다. 정 전 장관은 여전히 전주 덕진 출마 의사를 굽히지 않고 있다. 2007년 3월25일 정세균 민주당 대표(오른쪽)와 손을 맞잡고 있는 정 전 장관. 사진 한겨레 이종찬 기자

하나의 대명제는 ‘당력 결집’인데…

당 지도부는 정동영 전 장관이 불출마 선언을 할 좋은 명분과 기회가 왔다고 본다. 윤호중 위원장은 “현재 상황에서 정동영 전 장관이 ‘당을 먼저 생각하라’는 당명을 거스르기 힘들 것으로 본다”며 “대승적인 판단을 내리고 당을 위해 헌신해주실 것을 요청한다”고 말했다. 노영민 대변인이 3월27일 정례 브리핑에서 “당이 중대한 위기에 처해 있다. 당력을 결집해서 외환을 극복해야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내우는 안 된다”고 밝힌 이유다. 노 대변인은 “당 지도부의 입장”이라고 강조했다. 정세균 당대표 쪽에서는 정 전 장관의 결단을 촉구하기 위해 당 중진들과 함께 뜻을 모으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정세균 대표의 한 측근은 “정 대표가 그간 당의 전·현직 중진들을 대부분 직접 만나거나 전화를 통해 의견 수렴을 했다”며 “필요하다면 당 중진들이 모두 모여 논의하는 방안도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정 전 장관을 도덕적으로 압박하겠다는 뜻이다.

반면 정동영 전 장관 쪽에서는 “정동영이 정말로 필요한 시기가 왔다”고 주장한다. 정동영계의 한 의원은 “이런 상황에서는 지도부가 곧바로 비상 상황을 선포하고 민주당 전체 의원들이 의원 사퇴서를 낼 각오를 하는 정도의 베팅을 걸 수 있어야 한다”며 “명분보다는 행동을 먼저 생각할 때”라고 말했다. 정동영 전 의원의 한 측근은 “오늘(3월27일) 아침에도 정 전 장관이 ‘지금은 알몸으로라도 나가야 할 시기다. 모든 것을 걸고 우리의 가치를 지켜야 할 상황이다’라고 말했다”며 “수사 상황을 살피며 좌고우면해서는 안 된다”고 강경론을 폈다. 갑작스런 출마 선언으로 쏠리는 비난의 화살을 ‘반이명박 전선을 함께 만들어야 한다’는 현실론으로 막아보자는 것이다. 정 전 장관의 복귀를 지지하는 이종걸 의원도 “지금 검찰의 수사가 이광재·서갑원 등 친노계 의원들을 정면으로 겨냥하고 있기 때문에 정세균 대표는 정치적으로 심한 부담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라며 “이런 상황에서는 정 전 장관도 정치 일선으로 복귀해 함께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공천 결과 발표 뒤, 탈당 → 출마 선언

당 주류의 반응은 차갑다. 최재성 의원은 “정 전 장관이 선거대책위원장을 맡겠다고 하는데, 이는 본인의 정치적 위상을 정말 오해한 것”이라며 “지난 대선에서 정 전 장관이 받은 표는 지지표라기보다는 ‘반이명박표’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 지금 국면에서 정 전 장관이 이명박 정권과의 투쟁 전면에 나서는 게 민주당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민주당 지도부에 남은 시간이 많지는 않다. 한나라당은 늦어도 4월1~2일까지는 재보선 지역 후보를 확정할 예정이다. 한나라당의 한 공천심의위원은 “3월26일부터 4~5배수로 추려놓은 우리 당 후보와 상대 당 후보를 놓고 여론조사를 시작했다”며 “3월 말 또는 늦어도 4월1~2일에는 후보자 공천을 마칠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도 한나라당이 후보를 발표한 뒤에는 곧바로 후보자를 공천해야 한다. 늦어도 재보선 후보자 등록일(4월14일) 일주일 전에는 공천을 완료해야 한다. 정동영 전 장관은 민주당의 공천 결과가 발표된 이후 탈당과 전주 덕진구 출마 선언이란 수순을 밟게 될 것으로 보인다. 정동영 전 장관은 3월 말부터 서울을 떠나 전주와 전북 지역 일대를 돌며 사실상 선거운동에 들어갔다. 민주당의 한 재선 의원은 “정동영 전 장관이 출마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최대한 말을 아끼고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며 “정 전 장관이 노리는 것이 당에서 온갖 핍박을 받고 나가는 모양새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모습을 앞장서서 만들어줄 필요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정 전 장관도 탈당은 부담스럽다. 당이 침몰 위기에 놓인 상황에서 무소속 출마를 선언하면 민주당과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히기 좋은 상황이다.

민주당 일부에서 ‘당내 갈등을 조기 진화하는 전략으로 정동영 전 장관에게 공천을 주자’는 타협안이 나오고 있는 이유다. 한 초선 의원은 “지금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정동영 이슈’를 최대한 빨리 죽이고 박연차 수사와 언론 탄압 등 전면적인 투쟁이 필요한 곳으로 힘을 쏟는 것”이라며 “정 전 장관에게 전주 덕진구 공천을 주는 대신 선거대책위원장 등을 맡아 전면으로 나설 생각을 하지 말고 조용히 지낼 것을 요구하는 것을 생각 중”이라고 말했다. 다른 재선 의원도 “정 정 장관이 정치적 고향으로 내려가겠다고 하는 것은 정치 인생의 마무리를 그곳에서 하고 싶다는 바람이라고 이해해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런 생각에 뜻을 같이하는 의원들이 7~8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들은 조만간 모임을 열고 이런 뜻을 당 지도부와 정 전 장관 쪽에 전달하자는 말을 하고 있다. 민주당 내부 사정에 밝은 한 인사도 “박연차 수사가 본격화되면서 당 지도부도 정 전 장관 문제에만 매달릴 수 없다는 판단을 하는 것 같다”며 “조만간 ‘공천 절대 불가’라는 방침이 바뀔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공천·영향력 모두 쥐려는 욕심이 문제”

정세균 대표가 전략적 공천을 결정하기 전에 정 전 장관과 2차 회동을 할 가능성이 높다는 말도 나온다. 이때는 1차 심야회동과는 다른 상황논리가 적용될 가능성도 있다.

민주당의 한 전 의원은 “정 전 장관이 정치 일선 복귀와 동시에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고 싶은 ‘두 마리 토끼’를 욕심내면서 이 모든 문제가 빚어지고 있다”며 “민주당 안팎에서 이를 용인할 사람은 없다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태희 기자 herme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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