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협의 세종증권 인수 로비 의혹 사건과 관련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친형인 건평(66)씨에 이어 노 전 대통령의 후원자로 알려진 박연차(63) 태광실업 회장이 구속됐다. 두 사람 신병이 확보된 만큼 검찰 수사에는 더욱 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조·중·동 등 보수 언론은 ‘노 전 대통령 측근 게이트’ ‘친노 게이트’ 등 이름까지 붙여가며 이들의 혐의 내용과 검찰 수사 상황을 연일 대서특필했다. 구속된 이들에 대해서는 뇌물과 탈세, 횡령 등 혐의가 거론되고 있지만 이제 언론의 관심은 한발 더 앞서가고 있는 모양새다. 로비에 정치권의 누가 연루됐을까? ‘박연차 리스트’에는 누가 올라 있는가?
검찰 수사의 종착점이 일부 언론의 바람처럼 전 정권 핵심 관계자인지는 아직 섣불리 단언하기 어렵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성적표만으로도 검찰은 일단 안심하는 분위기다. 수사 초기에 일각에서 조심스레 거론되던, “윗사람 뜻에 맞춰 전 정권 죽이기에 검찰이 나선 것 아니냐”는 얘기들이 싹 사라졌기 때문이다. 어찌됐건 검찰이 관련 의혹을 낱낱이 밝혀야 한다는 것이 국민의 대체적인 여론이다.
지난 10월20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대검찰청 국정감사에서 주성영 한나라당 의원은 ‘삼성 떡값’을 거론하며 임채진 검찰총장의 진퇴를 언급했다. 임 총장보다 검사 임관 10년 후배인 주 의원의 이날 행동을 두고 TK 세력이 PK 총장을 밀어내려는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 한겨레 강창광 기자
그런데 이번 수사로 가장 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 것은 누구일까? 아마도 임채진(56) 검찰총장이 아닐까. 사실 임 총장은 이명박 정권 안에서 입지가 좁았다. 전 정권에서 임명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임 총장은 노무현 정부 초기인 2003년 검사장으로 승진했고 이듬해부터 무려 2년 동안 핵심 요직인 법무부 검찰국장을 지냈다. 뒤이어 서울중앙지검장과 법무연수원장을 거쳐 대선 직전인 지난해 11월 36대 검찰총장에 취임했다. 쉽게 말해, 전 정권에서 너무 잘나가던 인사였던 셈이다.
물론, 그가 전 정권 핵심 인사들과 원만하게만 지낸 것은 아니다. 검찰국장 시절엔 사법제도 개혁 등과 관련해 검찰 조직이기주의로 비칠 만한 주장을 굽히지 않아, 청와대와 법무부에서 한때 그를 서울동부지검장으로 사실상 좌천시키는 방안을 검토하기도 했다. 또 노 전 대통령도 임 총장이 좋아서 검찰총장 자리에 앉힌 것은 아니었다. 애초 청와대는 임 총장의 사법연수원 동기이자 부산고 후배인 안영욱 전 서울중앙지검장을 염두에 뒀으나, 안 전 지검장이 사법연수원을 다니며 군에 복무한 사실이 에 보도되면서 낙마했다. ‘임채진 카드’는 어쩔 수 없는 두 번째 선택지였던 셈이다.
광고
전 정권에서 임명된 고위직 대부분을 물갈이한 이명박 대통령이 임 총장을 재신임하고 유임시킨 것은 이런 점이 감안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내가 시켜준 사람’이 아닌 것은 변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총장에게 힘이 실리지 않았다. 촛불 배후 수사 발언 등으로 김경한 법무부 장관은 대내외적으로 목소리를 높였지만, 임 총장은 조용했다. 통상 검찰 인사는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이 협의해 진행하지만, 지난 3월 검찰 정기 인사에서 임 총장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북고를 나온 김 장관이 TK(대구·경북) 후배 검사들을 대거 요직에 발탁하는 무리수를 뒀지만, 임 총장은 여기에 아무런 제동을 걸지 못했다는 것이다. 서울 지역에서 근무하는 한 부장검사는 “지난 3월 인사에선 대검 참모진도 장관이 짰다는 말까지 있더라. 지금 총장은 아무런 발언권이 없는데 무슨 힘이 있겠냐”고 말했다.
임 총장의 또 다른 약점은 ‘떡검(떡값 검사) 논란’이다. 지난해 11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기자회견을 열어 “임채진 검찰총장 후보자와 이종백 국가청렴위원장, 이귀남 대검 중수부장이 삼성으로부터 금품 로비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삼성 구조본 법무팀장을 지냈던 김용철 변호사가 임 총장이 부산고 선배인 삼성 구조본 전 인사팀장 이우희씨로부터 지속적인 관리를 받아왔다고 폭로한 것이다. 임 총장은 “그런 일 없다”고 해명했지만, 의혹은 가시지 않았다. 임 총장의 지휘를 받아야 할 일선 검사들마저도 사석에서는 “설마 안 받기야 했겠어”라고 말할 정도였다.
물론 이 의혹은 공식적으로는 마침표를 찍었다. 부실한 수사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조준웅 삼성 특검이 증거 부족을 이유로 무혐의 처분했기 때문이다. 이를 근거로 대검에서는 네이버와 다음 등 5대 인터넷 포털에 임 총장을 떡값 검사라고 표현한 게시글들을 삭제해달라는 공문을 보내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하지만 임 총장에게 드리워진 ‘떡검’의 그림자는 가시지 않았다. 한 검사는 “‘떡검 논란’이라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재신임해준 현 정권 눈치를 안 볼 수 있겠냐. 그러니까 인사 등과 관련해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할 수가 없는 것 아니겠냐”고 말했다.
12월10일 대검중수부에 소환돼 15시간가량 조사를 받은 뒤 귀가하는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 한겨레 김명진 기자
광고
이렇게 힘없이 지내온 임 총장이건만, 여권 내부에서는 그에 대한 끊임없는 불만의 목소리들이 흘러나왔다. 여당 핵심 인사들은 사석에서 “도대체 임채진이 하는 게 뭐가 있냐. 너무 무능하다”는 지탄을 스스럼없이 늘어놓을 정도였다. 일반 국민 시각에서는 검찰이 촛불시위 참여자와 조·중·동 광고 불매 운동, 〈PD수첩〉 등에 대한 수사로 나름대로 정권의 코드에 맞추려 노력한 것으로 보이지만, 좀더 ‘화끈한 것’을 바라는 여권의 시각에서 임 총장은 불만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 정권 핵심을 이루는 TK 사이에서는 “PK(부산·경남)로는 안 된다. 믿을 수 있는 TK를 앉혀야 한다”는 말들이 오갔다고 한다. 임 총장은 경남 남해 출신이다. 경북고를 졸업한 정통 TK 검사 출신인 주성영 한나라당 의원이 지난 10월 국회 법사위의 대검찰청 국정감사에서 삼성 떡값을 거론하며 임 총장의 진퇴를 언급한 것도 이같은 흐름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납작 엎드려 지내온 임 총장은 이번 수사를 계기로 확실히 자리를 잡는 모양새다. 올해 내내 임 총장을 흔들어온 ‘경질설’은 쑥 들어갔다. 이미 2년 임기도 절반을 넘겼다. ‘떡검’의 그림자도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질 수밖에 없다. 이제 남은 것은 무난하게 지내다 명예롭게 임기를 마치는 일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도 남을 상황이다.
이번 수사가 검찰총장 자리를 꽉 붙들어매주기는 했지만, 이번 수사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는 좀더 지켜봐야 할 듯하다. 정치적으로 여권이 위기에 몰렸을 때 대규모 사정 수사로 국민의 시선을 돌리는 것은 과거 자주 보아온 일이기 때문이다. 노태우 정권 시절 박철언씨가 실세 중의 실세로 불리며 불법 정치자금을 받고 전횡을 휘두른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 출범 직후 검찰이 박씨를 구속하자, 국민 대다수는 검찰이 정의를 밝힌 것이 아니라 정치적 보복에 동원된 것으로 봤다. 검찰이 아무리 정치적 고려 없이 법대로 판단했다고 주장해도, 국민은 전체적인 정치·경제적 상황 속에서 검찰의 행보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먼 훗날 역사는 이번 사건 수사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광고
한겨레21 인기기사
광고
한겨레 인기기사
서울시민 홍준표…“대구 박정희 동상 가져가라, 미안함 없나”
‘한덕수 고향’ 전북 변호사 100명 “출마 반대…정치적 중립 위반”
한덕수 동창 유인태 “메시아는 개뿔…윤 정부 총리하더니 회까닥”
[단독] 국힘 ‘한덕수와 단일화 여론조사’ 준비 끝…휴대폰 안심번호도 받아
[현장] “대통령님 지키자” 윤석열 집 첫 압수수색에 지지자들 고래고래
한덕수의 ‘법카 사용법’
[단독] 홍준표 쪽→명태균 5천만원 녹음파일…“딱 받아 회계처리”
이재명 대법 선고 하루 앞, 법원행정처 “2배 빨라져… 내규 따라”
박지원, 정대철에게 “너 왜 그러냐” 물었더니 대답이…
한덕수 불러낸 국민이 도대체 누군데요…“출마 반대·부적절” 여론 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