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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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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에 억류된 240만 참정권

재외국민 등 투표권 배제한 선거법 올 안 개정 안되면 효력 상실
등록 2008-12-09 14:59 수정 2020-05-03 04:25

내년 4월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가 제대로 치러지지 않을 위기에 빠졌다. 공직선거법 때문이다.
헌법재판소는 지난해 6월28일 재외국민과 외항 선원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은 현행 선거법에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 올해 12월31일까지 법을 개정하도록 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자료를 보면, 이 판결로 투표권을 얻게 될 재외국민은 약 240만 명으로 추산된다.
선거법이 올해 안에 개정되지 않으면, 재외국민의 선거 참여 제한 조항은 내년 1월1일부터 자동으로 효력을 상실한다. 당장 내년 4월 재·보궐 선거의 선거인 명부를 작성할 법적 근거와 부재자 투표 규정도 자동으로 사라진다. 대통령 선거나 총선 이외에 재·보궐선거에서도 재외국민 및 외항 선원에게 투표권을 줘야 하는지는 논란 거리가 되고 있지만, 어느 쪽으로 결론을 내든 선거법 개정을 해야만 ‘법의 공백’을 막을 수 있는 것이다.

‘재일한국인 본국 참정권연락회’를 만들어 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의 참정권 보장운동을 벌인 고 이건우씨가 2007년 6월 헌법재판소 앞에서 1인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씨는 정치권의 무관심 탓에 법 개정을 못 본 채 지난 8월 위암으로 숨졌다. 한겨레 자료

‘재일한국인 본국 참정권연락회’를 만들어 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의 참정권 보장운동을 벌인 고 이건우씨가 2007년 6월 헌법재판소 앞에서 1인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씨는 정치권의 무관심 탓에 법 개정을 못 본 채 지난 8월 위암으로 숨졌다. 한겨레 자료

내년 4월 재·보선 적용 둘러싸고 논란

하지만 헌재 결정 당시 대선과 총선을 차례로 앞두고 있던 정치권은 눈앞의 ‘표’와 무관한 선거법 개정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그렇게 잊혀진 선거법은 18대 국회 첫 정기국회의 마지막 날(12월9일)이 다가오도록 사실상 방치돼 있다. 국회는 선거법 개정을 논의할 특위조차 구성하지 못했다.

물론 일부 의원들은 개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현재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 올라온 선거법 개정안 37개 가운데 6개가 재외국민과 외항 선원의 투표권 문제를 다뤘다. 행안위는 정기국회 폐회를 11일 남겨둔 11월28일에야 법안심사소위에 이 개정안들을 일괄 상정했다. 하지만 ‘부재자 선거’로 할지 ‘재외 선거’로 할지 명칭 문제부터 선거인명부 작성, 투표 방법에 이르기까지 개정안들의 차이는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유기준 한나라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개정안은 재외국민들이 국회의원 선거 50~25일 전 재외공관장에게 직접 부재자 신고를 하도록 했지만, 같은 당 조원진 의원의 개정안은 선거 150~60일 전 재외 선거인 등록을 신청하도록 돼 있다. 재외공관에 설치한 투표소에서만 투표를 하게 할지(강창일 민주당 의원), 인터넷 투표를 허용할지(김성곤 민주당 의원)도 의견이 복잡하다. 외항 선원의 투표권은 무소속 이윤석 의원과 유기준 의원의 개정안에만 간략히 언급돼 있을 뿐이다.

무엇보다 선거구 수가 적은 재·보궐 선거 때도 재외국민의 투표를 허용할 것인지, 지방선거 때는 어떻게 할 것인지 등도 현재 발의된 개정안에선 명확히 규정돼 있지 않다. 그만큼 논의해야 할 내용이 많고 폭넓은 의견 수렴이 필요하지만 국회의 개정안 처리 속도는 더디기만 하다.

그 밖에도 △주민등록이 말소된 재외국민의 경우 어떻게 신원 확인을 할지 △그런 재외국민이 얼마나 되는지 △주민등록 전산화 작업이 이뤄지기 전인 1989년 이전 자료로 본인 확인을 할 땐 어떻게 할 것인지 △이중국적자의 경우 선거권을 부여할지 △부여하지 않는다면 이중국적 여부 확인 과정에서 해당 국가와 어떻게 협조할 수 있을지 등 정부가 대비해야 하는 내용도 방대하다. 이에 대해 법무부는 주민등록이 말소되는 등 본인임을 확인할 수단이 없을 경우 강제로 지문 날인을 통해 본인 확인을 할 수 있도록 법적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을 낸 정도다. 지문 날인은 인권 침해 논란을 낳는 민감한 문제인데, 현재 국회나 정부의 태도로는 그런 세심한 접근은 기대조차 어려운 상황인 것이다.

정치권·선관위 직무유기 비판 일어

지난 10월25일 선거법 개정 의견을 낸 중앙선관위는 어떨까. 선관위는 헌재 결정이 나온 뒤부터 ‘재외선거연구반’을 꾸려 국외 체류자 489명을 상대로 투표 방법 등을 시뮬레이션하는 등 제도 연구를 해왔다고 밝혔다. 또 ‘재외국민선거준비기획단’을 가동해 재외국민 선거를 치르는 나라 9곳을 방문해 현장조사 결과를 개정 의견에 반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쉬움은 남는다. 선관위가 국회에 제출한 내년도 예산안을 보면, 재외국민 선거 관리에 드는 경비로 올해 예산보다 4% 적은 3억1600만원을 계상했다. 선관위는 “선관위의 법 개정 의견에서 재외국민 선거 실시 대상은 대선과 총선이기 때문에 그렇다. 재·보선도 재외국민 선거를 실시하는 쪽으로 법이 개정된다면 그때 가서 예산을 신청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국회 행안위에서조차 “주무부서가 욕심을 내 예산을 배정받아도 될까 말까 한데 너무 소극적”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선관위는 또 선거·정당·정치자금제도 연구 사업 예산으로 올해와 같은 9600만원을 편성했다. 행안위 전문위원 검토보고서는 “단기적으로 재외국민 선거 실시에 따른 각국의 선거법 등을 심층 분석해 향후 실시될 재외국민 선거가 완벽하게 치러질 수 있도록 사전 준비를 할 필요가 있으므로 관련 예산으로 재외국민선거제도 연구비 1억원을 추가로 증액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국정감사와 대정부 질의 등을 통해 선거법 개정 문제를 꾸준히 제기해온 유정현 의원(한나라당)은 “헌재 결정이 나온 지 1년 반이 다 되도록 토론회나 공청회 한 번 열지 않은 건 정치권의 직무 태만이자 책임 방기”라며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정치 문화를 새롭게 바꾸는 중요한 일이므로, 지금이라도 시급히 의견을 수렴해 법 개정을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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