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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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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심상정 다시 불뿜다

2년전 한-미 FTA 격론, 온라인서 연장전… “신선했다” 긍정 평가
등록 2008-12-05 17:15 수정 2020-05-03 04:25

‘승부사’ 노무현과 ‘똑순이’ 심상정이 한판 승부를 벌였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문제를 놓고 ‘토론의 달인’ 노무현 전 대통령과 심상정 진보신당 공동대표가 벌인 논쟁은 지난 2006년 협정 체결 전 온 나라가 들썩였던 것만큼이나 날이 서 있었다.
시위를 먼저 당긴 건 노 전 대통령이었다. 그는 11월10일 자신의 인터넷 토론 사이트 ‘민주주의 2.0’에 글을 올려 “한-미 FTA를 살려갈 생각이 있다면 먼저 비준을 할 것이 아니라 재협상을 준비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심 대표가 즉각 맞대응했다. 그는 11월12일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민초들이 노 전 대통령께 기대했던 것은 이명박 정권에 대한 재협상 ‘훈수’가 아니라 한-미 FTA 협정 체결에 대한 ‘고해성사’였을 것”이라며 노 전 대통령에게 토론을 제안했다. 노 전 대통령의 반박과 심 대표의 재반박이 한 차례씩 이어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 심상정 진보신당 공동대표 (왼쪽부터/ 한겨레 박종식·<한겨레21> 류우종 기자)

노무현 전 대통령· 심상정 진보신당 공동대표 (왼쪽부터/ 한겨레 박종식·<한겨레21> 류우종 기자)

‘재협상’ 훈수 두자 ‘고해성사’ 요구

한-미 FTA에 대해 ‘재협상 대비’와 ‘폐기’를 각각 주장한 두 사람은 금융위기의 원인, 시장 개방, 신자유주의 등을 놓고 치열한 공방을 이어갔다. 특히 심 대표는 “노 전 대통령은 제조업을 경시하고 금융허브를 발전 동력으로 삼고자 했던 무모함을, 금융 자유화를 제도 선진화로 잘못 이해한 ‘한-미 FTA’의 과오를 인정해야 한다”고 날을 세웠다. 노 전 대통령은 “지금의 금융위기가 한국의 동북아 허브 정책, 또는 한-미 FTA 때문에 생긴 것이 맞느냐”고 맞받았다. 한-미 FTA 추진 당사자인 노 전 대통령과, 협정 체결에 반대해 단식·노숙 농성까지 마다지 않은 심 대표의 정면 대결이었기에 이들이 어떤 논쟁을 언제까지 이어갈지 누리꾼들의 관심은 폭발적이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애초 의도한 ‘재협상 대비’가 아니라 ‘협정 찬반’으로 논쟁이 흘러가자 제동을 걸고 나섰다. “(협정 찬반) 여론이 엎치락뒤치락 춤을 추더니 마지막 협상을 타결하고 나자 지지로 돌아섰다. 이쯤 하면 승복하는 것이 민주주의 아니냐. 승복이 안 되더라도 싸움은 그치는 게 민주주의 아니냐”며 ‘토론 종결’을 선언한 것이다. ‘세기의 토론’을 보고 싶었던 기대감은 아쉬움이 되고 말았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과 진중권 중앙대 교수가 각각 “(심 대표의 글은) 근거 없는 우월감을 바탕으로 비난하려고 쓴 무례한 글”(유시민), “(유 전 장관은) 쓸데없는 도덕적 열등감에서 벗어나라”(진중권)며 ‘장외 독설전’을 편 탓에 실망감도 더해졌다.

심상정 대표의 토론 제안 배경은 비교적 단순하다. 여간해선 세간의 주목을 받기 어려운 원외정당의 대표가 볼 때, 한-미 FTA 논쟁에서 가장 효과적인 ‘저격 대상’은 당사자인 노 전 대통령이다. 게다가 17대 국회에서 경제통으로 이름을 떨쳤던 심 대표에게 한-미 FTA는 ‘전공’이나 다름없다. 이지안 진보신당 부대변인은 “원외인 진보신당한테 ‘틈새 이슈 발굴’은 생존 전략에 가깝다. 금융위기 때문에 그동안 심 대표가 주장한 한-미 FTA의 문제점에 동의하는 사람이 늘고 있지만, 그와 관련한 의견은 여전히 분분하다. 그래서 심 대표가 노 전 대통령한테 공개 편지를 보내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런 글이 나왔다. 협정 폐기 주장을 펴려면 노 전 대통령만큼 효과적인 비판 대상이 어딨겠느냐”고 말했다.

자칫 폐기될까 우려해 발언 나서

그럼 노 전 대통령은 왜 갑자기 ‘재협상 대비론’을 꺼내들었을까. 그가 스스로 “정치적인 이유로 한-미 FTA에 대한 입장을 번복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 대로, 차명진 한나라당 대변인은 노 전 대통령이 글을 올리자마자 “내 속으로 낳은 자식을 내 애가 아니라고 우기고 있다”고 논평을 냈다. 최재천 전 민주당 의원은 “노 전 대통령의 주장은 겉으로는 미국 대통령이 바뀌면 추가협상을 요구해올 수 있으니 국익을 다시 검토하자는 거지만, 그 정도 논쟁은 이미 협정 체결 전에 충분히 있었던 것”이라며 “재임 때 국회에 선 비준을 계속 요구해놓고 이제 와서 이런 주장을 하는 건 정치적인 입장 변화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런 반응을 예상했으면서도 노 전 대통령은 왜 불속으로 뛰어든 걸까.

가장 유력한 풀이는 ‘이명박 대통령을 못 믿어서’다. 노 전 대통령은 “우리가 먼저 비준을 하고 재협상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한-미 FTA를 폐기하자고 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밝혔다. 현 정부의 잘못된 대응으로 자칫 한-미 FTA가 궤도 이탈을 할 수 있다는 우려인 셈이다. 노 전 대통령 쪽 김경수 비서관의 설명은 이렇다. “노 전 대통령이 글을 쓸 때는 한나라당이 비준동의안 처리를 밀어붙이는 상황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재임 당시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을 만나 ‘협정 비준을 하고 안 하고가 중요한 게 아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이 남아 있으니 비준은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그런데 쇠고기 수입은 비준과 관계없이 풀어버리고, 비준까지 먼저 하겠다고 나오는 게 답이냐는 생각을 한 것 같다. 또 오바마 미 대통령 당선 뒤 자동차 때문에 재협상 얘기가 나오는데, 만약 미국이 자동차 협상을 들고 나온다면 우리가 수용할 범위는 어느 정도인지, 금융이나 다른 부문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이익은 어떤 것인지를 정부와 국회가 논의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지안 부대변인도 “언뜻 보면 노 전 대통령이 자신의 생각을 바꾼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그는 자신이 역사에 남길 가장 큰 성과인 한-미 FTA가 이명박 대통령의 조기 비준 요구 때문에 망가질 수 있다고 보고 이 대통령한테 ‘훈수’를 둔 것”이라고 풀이했다.

민주당 내부에서 재협상 관련 논의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도록 물꼬를 터준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정세균 민주당 대표는 “(한-미 FTA와 관련한) 당의 입장은 선 대책, 후 비준”이라고 밝혔지만 이는 한나라당과 예산안 및 쟁점 법안을 연계 처리하려는 ‘협상용 카드’ 성격이 짙다. 민주당 안에서도 재협상 찬반은 물론 협정 자체의 찬반 의견이 엇갈린다. 이런 사정을 모를 리 없는 노 대통령이 본격적인 당내 토론을 촉발시키려고 직접 총대를 멨다는 것이다.

이해는 달라도 이슈화엔 성공

흥미로운 대목은 “토론에 응하기는 좀 그렇다. 다만, 심 대표의 글에 대한 저의 견해를 쓰겠다”는 노 전 대통령의 ‘까칠한’ 반응이다. 그는 심 대표의 글을 조목조목 반박하면서도 굳이 자신의 반응이 ‘토론’이란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치 않았다. “심 대표의 글은 단지 저를 비판하는 글일 뿐”이라고 규정거나, 심 대표의 사과 요구에 “예의에 맞는 일도 아닐 것”이라고 쏘아붙이기도 했다. 검사들의 독기 오른 발언에도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지요?”라며 웃음 속에 칼을 숨겼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이런 상황을 이해할 열쇠 하나는 2006년 8월 노 전 대통령과 국회 한-미 FTA 특위가 연 간담회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특위 위원이었던 심 대표는 1시간 가까이 노 전 대통령과 협정 찬반 문제를 놓고 격론을 벌였다고 한다. 참석자들의 전언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은 “지금까지 우리가 많은 개방을 했지만, 이 모든 것을 한국 사람들은 다 이겨냈고 실패한 적이 없다. 한국 사람의 손은 신의 손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심 대표가 “그건 종교적 낙관 아닙니까?”라고 들이받았다. 노 대통령은 “인신공격용 발언은 안 해주었으면 좋겠다”며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화를 냈고, 간담회가 끝난 뒤엔 심 대표와 악수도 하지 않은 채 나가려던 것을 비서들이 붙잡아세웠다고 한다. 노 전 대통령으로선 강렬한 불쾌함으로 기억될 만한 일이다.

이번 인터넷 논쟁은 비록 ‘끝장’을 보진 못했지만, 두 정치인이 공개적인 공간에서 자율성과 책임을 전제한 채 토론을 벌여 ‘신선함’을 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잊혀진 노래’인 줄 알았던 한-미 FTA를 다시 공론장으로 끌어내 누리꾼들이 활발한 토론을 하게 만들기도 했다.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은 한 언론 기고문에서 “그런 논쟁이 심화되는 것이 국민 교육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정치 발전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 본다”고 평가했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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