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적 생존력 있는 상황에서 섣불리 행동하지 않고 정치적 선택지 넓히자는 계산
▣ 류이근 기자ryuyigeun@hani.co.kr
▣ 사진 이종찬 기자rhee@hani.co.kr
“화합을 보여주는 그림용이다.”
박근혜와 이명박. 두 사람이 지난 9월7일 만났다. 경선이 끝난 지 꼭 19일 만이다. 경선에서 박근혜 전 대표를 도왔던 한 인사는 둘의 만남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하지만 언론은 크게 주목했다. 큰 주목을 받지만 큰 의미를 두기 어려운 모임? 자리가 갖는 상징적 의미가 있겠으나, 의미를 이끌어낼 만한 얘기들이 오가기 어려운 형식적인 자리가 될 게 빤하다는 예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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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은 크나 의미는 크지 않은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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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선 뒤 처음으로 한 명은 승자, 다른 한 명은 패자가 돼 만났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한나라당의 대통령선거 후보가 됐고, 박근혜 전 대표는 후보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만남은 승자인 이 후보에게 필요했다. 이 후보는 만남 직후 “(대선에서) 승리하려면 박 대표의 도움이 절실하고, 정권 교체를 이루자는 논의를 했다”고 말했다. 단순히 예의를 갖춘 표현만은 아니다.
패자가 그냥 패자가 아닌 까닭이다. 투표에서 이긴 패자였다. 박 전 대표는 투표에서 이 전 시장을 656표 차이로 눌렀다.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8.82%포인트(표로 환산해 2884표) 차이로 져, 결국 2228표 차이로 쓴잔을 마셨다. 많은 한나라당 지지자들에게 감동을 준 흠 없는 경선 승복으로 박근혜의 정치적 자산도 하나 더 늘었다. 박근혜의 많은 지지자들은 아직도 “이기고도 진 선거”라고 말한다.
박근혜는 힘을 가진 패자다. 경선을 통해 한나라당의 ‘당심’이 박근혜의 편이라는 게 확인됐다. 특히 한나라당의 텃밭이자 주류인 영남에서 박근혜의 위력은 대단했다. ‘민심’을 얻어 한나라당의 후보가 된 이 후보는 베이스캠프인 당 중심으로 치러야 할 대선 전에 당심을 가급적 빨리 장악해야 한다. 그를 지지하지 않은 절반 이상의 당원과 대의원을 끌어안아야 한다. 아직 결론 내리긴 이르지만 박근혜의 지지자 가운데 3분의 1에서 절반 가까이가 이명박 쪽으로 옮겨가는 걸 망설이고 있는 것으로 여러 여론조사 결과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박근혜와의 만남은 이명박의 필요에 의해 언젠간 성사될 거였지만, 두 사람 모두에게 어색한 만남이었다.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가 만남을 주선하는 모양새였다. 언론 관심의 초점도 박근혜가 무슨 말을 했는지에 모아졌다.
박근혜는 이명박과의 만남에서 “후보께서 지지도도 높으시고 한나라당의 후보가 되셨으니 여망을 꼭 이뤄서 정권을 되찾아주시기 바란다”고 말했으나, 어떻게 “돕겠다”는 말을 뱉진 않았다. 아직 책임질 상황을 만들지 않고 좀더 지켜보겠다는 의미로 읽힐 만하다. 박근혜는 경선 직후 캠프 해단식에 이어 대구 지역 방문에서도 이명박이 원하는 ‘답’을 내놓지 않고 있다. 박 전 대표는 ‘이명박 후보를 도와 정권 교체에 앞장서겠다’는 패자의 의례적인 수사도 내놓지 않았다. 앞으로 더욱 빠르게 이 후보를 중심으로 한나라당이 결집돼 움직이겠지만 둘 사이의 묘한 긴장은 쉽게 풀리지 않을 거 같다. 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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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아니면 살기식의 경쟁을 1년 넘게 펼치면서 두 사람 사이엔 앙금이 켜켜이 쌓였다. 현실적으로 두 사람의 정치적 이해와 계산 또한 다르다. 무엇보다 박근혜가 이명박에 얹혀 가지 않고서도 독자적인 정치 생존이 가능한 정치력을 가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굳이 이명박의 우산 아래 들어갈 필요가 없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 거론됐던 이명박 캠프의 선거대책위원장 자리에 박근혜가 앉는 그림은 현실성이 없다. 박근혜 캠프의 핵심 인사 중 한 명이었던 김무성 의원은 “선대위원장 한다는 건 뭘 몰라도 한참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말했다. 이 말을 무리하게 확장해서 해석할 필요는 없겠지만, 박근혜가 어떤 직함을 갖고 이 후보를 돕는 적극적인 역할을 하진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박근혜가 당장 할 수 있는 건 없다. 리스크를 떠안으면서까지 뭔가 할 필요도 없다고 박근혜 쪽 인사들은 말했다. 자칫 무리한 정치적 행보와 발언으로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사실 박근혜의 정치적 행보는 한동안 이명박의 종속변수다. 이명박이 대선을 어떻게 헤쳐가느냐에 따라 박근혜의 선택이 달라진다. 이 후보는 지지율이 거의 50%대에 육박하고 있지만, 여전히 불안한 이미지를 다 씻지 못했다. 검증이란 혹을 떼지 못했기 때문이다. 통합민주신당 쪽의 검증 공세로 또 한 차례 홍역을 치를 수 있다. 낙마를 거론하는 이들도 있다. 가정이지만 그때 박근혜의 이름이 ‘대안’으로 다시 거론될 가능성이 높다. 박근혜 캠프에서 일했던 의원과 참모들 대부분 이런 얘기를 입 밖에 내길 꺼린다. 상대를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야를 오는 12월19일 대선 이후로 넓히면 박근혜의 정치적 선택지는 더욱 넓어진다. 그에겐 ‘다음’이 있다. 52살로 대권을 노리는 정치인치곤 젊은 편이다. ‘3김’만큼은 아니지만 영남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적 토대도 굳건하다. 만약 이명박이 대선에서 승리하지 못한다면, 탄핵 때처럼 당은 다시 그에게 손을 내밀 가능성이 크다. 이명박이 대통령이 된다고 가정하더라도 그의 당내 지분을 쉽게 침범할 순 없다. 이름을 밝히길 꺼린 박근혜 캠프의 한 인사는 “박 대표가 당장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면서도 “우린 멀리 보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은 권력 교체기의 긴장 국면
박근혜는 이명박과의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나가야 하는 숙제를 받았다. 이명박도 마찬가지이다. 두 사람은 가급적 거리를 둘 가능성이 높다. 권력의 경쟁자는 가까이하기 어려운 법이다. 멀리서 보면 두 사람이 한 우산 아래 정권 교체라는 같은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두 사람을 한나라당이란 같은 당 간판 말고는 이을 고리가 거의 없다. 경선 이전보다 더 먼 관계가 돼버렸다.
지금은 긴장 국면이다. 이명박 쪽이 후보 확정 이후 당을 ‘접수’하는 데 박근혜 쪽이 불만을 터트리고 있다. 김무성 의원은 “이명박의 사당화가 돼선 곤란하다. 반대파도 껴안아야 한다”고 말했다. 당권-대권 분리를 내세우며, 이명박 쪽이 당권을 장악하는 과정에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2004년부터 2년3개월 동안 사실상 ‘친박이냐, 아니냐’로 의원들을 분류할 만큼 한나라당은 ‘박근혜당’이었다. 이제 한나라당은 대선 전까지 ‘이명박당’으로 굴러갈 것이다. 흔히 권력 교체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듯, 최근 당의 대선 후보가 돼 당으로 들어온 이명박의 당권 장악에 대한 반작용은 클 수밖에 없다. 박근혜 캠프에서 뛰었던 한 의원은 익명을 전제로 “이 전 시장의 최근 당직 인사는 황제적 발상의 단면”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갈등은 시간이 지나면서 희석될 것이다. 박근혜는 ‘때’를 기다릴 것이다. 권력의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가 대선 전 섣부르게 행동하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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