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의 주요 변수, 촉구 발언하는 여권과 경계령 내린 한나라당…일단 성사되면 무작정 반대하기엔 곤란한 분위기 형성될 듯
▣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오는 12월 대선의 주요 변수로 꼽히는 남북 정상회담을 놓고 정치권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1월2일 에 출연해 “남북 정상회담 가능성이 상당히 커진 것으로 생각한다”고 밝힌 것을 시작으로 여권 인사들의 남북 정상회담에 관한 언급은 부쩍 늘었다. 대통령 자문기구인 동북아시대위원회의 이수훈 위원장도 같은 날 인터뷰에서 “여건이 조성되고 남북이 서로 주고받을 것이 분명해지면 남북 정상회담은 성사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명숙 국무총리,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 천정배 의원 등도 최근 앞다퉈 남북 정상회담 추진을 촉구했다.
관련 없는 사안도 정상회담 얘기로
이에 따라 한나라당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남북 정상회담 경계령’이 내려진 듯한 모습이다. 남북 정상회담에 관한 언급 빈도도 눈에 띄게 늘었다. 구체적으로 윤곽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일정한 흐름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가 군불을 때면서 서서히 분위기를 만들어가려 한다는 것이다.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사안도 남북 정상회담 얘기로 흘러간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정상회담의 ‘정’자도 거론하지 않은 이재정 통일부 장관이 뭇매를 맞았다. 이 장관은, 1월3일 한나라당 최고중진 연석회의에서 ‘주사파의 전형’ ‘북한의 요구에 의해 임명된 장관’ ‘북한의 대남선전부 책임자’ ‘친김정일 좌파’로 찍혔다. 전날 기자간담회에서 “북한이 핵실험까지 간 여러 배경을 본다면 빈곤 문제도 하나의 원인이 아니겠느냐” “평화 문제를 해결하려면 핵 문제와 빈곤 문제를 병행해서 노력하는 길밖에는 없다” “같은 민족으로서 북한의 빈곤에 대해 책임을 감수해야 한다”고 한 발언이 불씨가 됐다. 전체적인 기조는 대북 식량 지원의 당위성을 강조하면서 지난해 10월 핵실험으로 중단된 쌀 차관 지원이 재개될 수 있도록 북한이 핵 폐기에 나설 것을 주문한 것이었지만, 한나라당은 이를 ‘남북 정상회담용’으로 해석했다.
정형근 의원은 최고중진 연석회의에서 “이 장관 논리는 북핵 문제에 진전이 없음에도 파격적 대북 지원으로 남북 정상회담을 이끌어내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그는 지난해부터 줄곧 ‘남북 정상회담 주의보’를 발령해왔다. 정 의원은 지난해 11월 김만복 국정원장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의제 문제 때문에 이견이 있었지만, 현재 남한의 386 핵심 참모와 북한의 핵심 참모가 제3국에서 마무리 회동을 갖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이날 연석회의에서는 “통일부 장관을 역임한 모 인사가 지난해 북한의 핵실험이 실시된 10월 이후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다고 들었다”며 다른 ‘선’을 지목했다. 그가 지목한 인사는 평양에서 열린 윤이상음악제에 참석한 박재규 경남대 총장(윤이상 평화재단 이사장)이다. ‘공포탄’이든, ‘실탄’이든 일단 쏘면서 계속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사례도 있다. 지난해 12월21일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회 행사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군 복무기간 단축’ 발언도 결국은 ‘남북 정상회담용’으로 이어졌다. 한나라당 정보위원장인 김정훈 의원은 1월4일 “노무현 대통령은 올봄 평화협정 체결을 주제로 한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위해 미국이 북한과의 정전협정을 종전협정으로 바꾸게 하고, 군 복무기간 단축을 비롯한 군축안을 제시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성명을 냈다. 국회 법사위원장인 안상수 한나라당 의원도 지난해 12월 노 대통령이 ‘남북 정상회담 → 평화협정 체결 → 군비 축소 → 징병제 폐지’ 시나리오를 가지고 “대선 판도를 뒤집을 우려가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손학규만 이례적으로 찬성
한나라당의 전반적인 기류는 ‘남북 정상회담 불가론’이다. 다음 정권으로 넘기라는 얘기다. 남북 정상회담은 변수 중에서도 그 영향력을 점치기 힘들 정도로 폭발력이 있는 것이라서, 한나라당 입장에서는 변수를 없애거나 줄이는 것이 유리하다. 홍준표 의원은 “북한이 한나라당의 집권을 막자는 입장을 발표한 상황에서 남북 정상회담을 한다면 결국 반한나라당 연합일 뿐”이라며 강하게 반대했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정상회담이 성사되면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손을 잡고 한나라당의 집권을 막으려는 회담을 하는 게 된다.
대선주자 가운데는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가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할 수만 있다면 언제, 어디서든 적극적으로 하는 게 좋다”며 당의 기류와는 상반된 태도를 명확하게 밝혔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부정적이다. 이 전 시장은 “북핵 문제를 해결한다는데 누가 정상회담을 반대하겠는가. 그러나 이 시점에서 남북 정상이 만난다고 해서 해결될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의 기류가 “정략적인 남북 정상회담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라면, 이 전 시장은 “실효성이 있겠느냐“는 쪽이다. 한나라당의 전반적인 강경한 기조와는 거리를 두면서 향후 정세 변화를 대비해 운신의 폭을 넉넉하게 두려는 의도가 읽힌다.
남북 정상회담은 미리 일정을 알히고 진행 경과를 투명하게 밝히기 힘든 측면이 있다. 현재 정부가 남북 정상회담을 준비하고 있다는 구체적인 움직임은 감지되고 있지 않다. 익명을 요구한 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접촉부터 회담까지 최소 3개월이 걸리는데 아직까지 기초적인 접촉도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현 시점에서는 개최 가능성이 낮아 보이지만, 지난해와 비교하면 북핵 문제를 둘러싼 국제 정세가 협상 국면으로 바뀐 것은 사실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남북 정상회담 개최 가능성을 높게 보는 이유도 북핵 문제를 둘러싼 국제 정세의 극적인 전환 가능성을 염두에 둔 때문으로 풀이된다. 2년 뒤 대선을 고려해 조지 부시 정부가 북핵 문제를 해결해야 할 필요성이 커졌고, 동북아의 핵무장을 우려하는 중국과의 관계 등을 고려할 때 북한도 조만간 변화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면, 6자회담에서도 가시적인 진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불가론에 편승하면 수렁에 빠질 수도
현재는 한나라당이 불가론을 주장하고 있지만, 막상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되면 문제가 달라진다. 사립학교법 개정 반대 때처럼 무작정 ‘남북 정상회담 결사 반대’를 주장하기가 곤란할 수 있다. 정상회담의 핵심 의제는 북핵 문제와 6자회담이 될 텐데, 대선 일정을 이유로 남북 정상회담을 미루자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기는 힘들다. 이는 가 최근 전국 성인남녀 1천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신년 특집 여론조사(95% 신뢰수준, 표본오차 ±3.1%포인트) 결과에서도 잘 드러난다. 북핵 문제 해결과 한반도 평화 체제 구축 방안으로 ‘남북 정상회담 등을 통한 평화 합의’(37.3%)가 ‘북-미 수교’(18.8%)와 ‘한-미-일 협력’(14.5%), ‘한국군 전력 강화’(12.5%)보다 우선적으로 꼽혔다.
한나라당과 한나라당의 대선주자들이 남북 정상회담의 성사 가능성, 대선에 미칠 파장 등을 면밀히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불가론에 편승했다가는 어쩌면 깊은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힘들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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