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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단추’에 길들여진 의원들

등록 2006-07-27 00:00 수정 2020-05-03 04:24

전수조사에서 135명 중 23명 외엔 실명 대신 익명 응답… 국가 중대사일수록 당론에 기대어 몸사리고 얹혀가려는 구습 심해

▣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판사는 판결문으로 말한다고 한다. 판결을 내리기 이전과 이후, 어떻게 판결을 할지 그리고 왜 그렇게 판결했는지에 대해 말을 하지 않는 것이 관례로 굳어져 있다. 판사가 판결과 관련해 언론에 오르내리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다른 직종으로 확대하면,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 기자는 기사로 말한다 정도가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정치인은? 입으로 말한다.

정치는 말로 시작해 말로 끝난다는 정가의 속설이 있을 정도로 정치에서 ‘입’의 비중은 크다. 그런데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은 ‘단추’로 말하려는 경향이 있다. 국회 본회의장에서 찬반 어떤 단추를 누를지 ‘미리 알려고 하지 마라’는 의원들이 적지 않다. 특히 국가 중대사나 사회적으로 치열하게 논란이 일고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그런 경향이 더욱 심해진다.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태도를 밝히고, 그런 자세에 대해 지지자들에게 평가를 받으며, 논쟁을 통해 설득하고 자신의 주장을 확산시키려 애쓰는 모습은 아직 먼 나라 이야기다.

‘정보 부족’ 호소… 민주노동당 외엔 당론 부재

은 7월14~21일 일주일 동안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와 함께 한미 FTA 문제를 포함해 2006년 하반기 경제정책에 관한 국회의원 전수조사를 했다. 마침 2차 한미 FTA 협상이 막 끝난 터라, 한미 FTA 문제에 국한해 보도를 전제로 의원들의 이름을 걸고 조사에 임해줄 것을 주문했다. 한국과 미국 정부의 협상이 얼마나 오래갈지, 어떻게 결론이 날지 가늠하기는 힘들지만, 협정을 맺게 된다면 17대 국회에서 비준동의안을 처리하게 될 테고 현재의 국회의원들이 이에 찬반 투표를 하게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장삼이사들의 의견은 ‘여론’에 그치지만, 국회의원들의 정치적 소신은 정책이 되어 장삼이사들의 삶을 바꾼다.

7월21일까지 집계한 결과, 의원 295명(7월26일 서울 성북을 등 4곳의 재·보궐 선거 이후 정원 299명이 채워진다) 가운데 135명만이 조사에 참여했다. 절반 이상은 의원실 방문, 여러 차례의 전화 독촉에도 ‘모르쇠’로 일관했다. 실명으로 참여한 의원은 23명에 불과했다. 전체 의원의 8%에 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실명 조사’에 대한 부담 때문에 조사 자체를 기피할 우려가 크다는 지적에 따라 ‘익명 참여’의 길을 열어두었는데, 조사에 응한 의원들 대부분이 편한 길을 택한 셈이다.

왜 그럴까. 조사 과정에서 만난 많은 의원들이 “판단할 근거가 없다”고 어려움을 털어놨다. 설문의 주요 내용이 한미 FTA의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추진 과정의 문제점 등에 초점이 맞춰졌음에도 결국 찬반을 묻는 성격을 짙다고 본 의원들은 ‘정보 부족’을 호소했다. 명색이 국회의원임에도, 언론을 통해 보도된 내용 이상을 알지 못한다고 답했다. 그러니 답을 하기는 하되, 이름을 걸고 할 만큼 자신은 없다고 했다. 이번 조사에서 설문에 응한 의원들 대부분은 “정부가 한미 FTA 협상을 추진하면서 협상 준비 정도와 협상 과정 등을 국회와 국민 앞에서 성실하게 알리고 있지 않다”(127명·94.1%)라고 답했는데, 설문 무응답자와 익명 참여자가 많은 탓도 이와 무관치 않다.

한미 FTA에 대해 비교적 명확한 입장을 보이고 있는 민주노동당을 제외하면, 모든 정당의 당론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점도 작용한 듯하다. 열린우리당의 한 의원은 “내 생각은 분명하지만 아직 당론이 정해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밝히면 나중에 부담스러울 수 있어 익명으로 답했다”고 말했다. 17대 국회가 정치개혁을 표방했고 그 핵심은 정책정당이었음에도, 공식적인 당론이 정해지기 전까지는 입장을 유보하고 당론이 정해지면 거기에 얹혀가는 ‘구습’이 여전한 탓이다. 이번 조사에 열린우리당 의원들의 참여가 가장 저조하고 특히 실명으로 참여한 의원이 적은 것은, 정부와의 관계를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민주노동당은 의원 9명이 전원 조사에 응했고 절반가량이 실명으로 참여했다.

도·농지역 지역구 눈치에 원리주의 공격 두려워

또 다른 이유는 지역구 눈치보기다. 실제 대도시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지역구가 도·농 복합 지역이어서 다음 총선을 생각하면 한미 FTA의 직접적 피해자가 될 수 있는 농민 유권자들의 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이유다. 한나라당의 한 의원 쪽은 “한미 FTA가 국가 전체로는 이익이라고 해도 이익을 보는 쪽과 손해를 보는 쪽이 명확히 갈리는 사안 아니냐”며 “반대하는 쪽은 조직적으로 뭉쳐 있기 때문에 실명으로 찬성할 경우 시달릴 수 있다”고 말했다. 실명으로 자신의 의견을 뚜렷하게 밝힌 의원들 가운데 지역구로부터 자유로운 비례대표 의원(송영선·장복심·박재완·배일도·윤건영·이계경)과 서울·인천·광주·울산 등 대도시에 지역구를 둔 의원들이 많았다.

시사주간지 은 최근호에서 한미 FTA 협상 대표단의 면면을 소개하면서 헤비급과 미들급의 대결에 비유했다. 그런데 양국의 의회 모습은 더하면 더했지 덜한 것 같지는 않다. 협상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매 단계에서 상세한 보고를 듣고 의견을 제시하는 미국 의회와, 협상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잘 모르고 정치적 입장을 밝히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하는 한국 의회의 모습은 분명 큰 차이가 있다.

박재창 숙명여대 교수(정치행정학부)는 이와 관련해 “정치 선진국에서 의원들이 언론을 통해 정책적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입장이 다른 쪽을) 설득시키고 (자신의 의견을) 확산시키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정치 과정”이라며 “다만 정책에 대한 입장은 가변적임을 전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상황의 변화에 따라 혹은 토론을 하면서 타협과 수용의 과정을 거쳐 변할 수도 있는데, 정치적 입장을 밝히면 원리주의적으로 공격하는 분위기가 의원들의 ‘입’을 막는 데에도 일조한다는 지적이다.



가장 황당한 미응답 이유 “바빠서…"

하반기에 투표권 행사할 경제정책 문항들이 그렇게 벅찼나

은 한미 FTA 관련 국회의원 전수조사를 하면서, 응하지 않을 경우엔 간단하게나마 이유를 밝혀달라고 했다. “우린 원래 그런 거 안 해요”가 많았다. 현직 혹은 전직 직위 때문에 개인 의견을 밝히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밝힌 의원도 상당수였다. 묵묵부답이 가장 많았고, “벌써 보냈다”며 익명에 편승하는 의원도 일부 있었다.
이해찬·김진표·정세균·유시민·천정배 의원 등 전·현직 각료들은 전직, 혹은 현직 총리, 장관이라는 이유로 빠졌다. 임채정 국회의장처럼 입법부의 수장이거나 정부와의 관계를 고려해 설문에 응하지 않은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 정도는 어느 정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하지만 “‘전 대표 비서실장’을 지낸 무게 때문에 당론이 정해지기 전에는 개인 의견을 밝히기가 부담스럽다”는 이유에는 갸우뚱할 수밖에 없다. 대변인이라서, 정책위에 참여하고 있어서, 통일외교통상위 위원이어서 빠진 의원들도 많았다.
박근혜·박영선·박병석 의원 등은 “설문조사에 응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청래 의원은 개인 홈페이지를 통해 의견을 밝히는 쪽이 ‘안전’하다고 답했다. 정의용·황진하·홍준표·정몽준·박진·서갑원 의원 등 20~30여 명은 해외 체류 중이었다. 통신수단이 발달했고 국내 보좌진과 ‘핫라인’이 있는 만큼, 의지만 있다면 참여 못할 조건은 아니다.
가장 황당한 답변은 “바빠서…”였다. 박세환·전여옥·서상기·양형일·장향숙 의원실 쪽은 “행사 참여 중이거나 수해 복구 중”이라고 답했다. 설문은 한미 FTA 6개 문항을 포함해 하반기 경제정책 관련 15개 문항이었다. 평소 관심이 있었던 내용이라면 10분 이내에 작성이 가능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하반기 국회에서 의원들이 찬반 단추를 눌러야 할 법안에 관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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