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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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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 전투’를 향해 뛰어라

등록 2005-03-09 00:00 수정 2020-05-03 04:24

대통령 4년 중임제 등 여야 의원들 공감대 확산… 시기와 구체적 내용 놓고 내년 싸움 준비

▣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여야 의원들이 최근 개헌론에 대한 군불때기를 지속하고 있어 그 배경과 결과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2월2일 김덕룡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국회 교섭단체 연설을 통해 “당리당략을 떠나 개헌 문제에 대한 연구를 진척시켜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할 때만 해도 곧 잦아들 개인 의견 정도로 평가하는 분위기가 대세였다. 그러나 김 대표 발언 이후 여야 의원들은 서로 주거니 받거니 개헌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공감대를 급속히 확산해가고 있다.

87년 상황과 지금은 다르다

“개헌 문제를 적극 논의하기 위해 국회에 초당적 연구기구를 설치하고 모든 정당간 대표회담도 검토해야 한다”(2월4일, 한화갑 민주당 대표), “정부 안에 개헌 연구기관을 설치해 내년 초까지 개헌안을 마련하자”(2월14일, 이석현·정장선 열린우리당 의원), “4월 국회에서 중립적인 학자들이 중심이 돼 헌법 연구를 시작해야 한다”(2월27일, 남경필 한나라당 원내수석부대)…. 10여일 간격으로 개헌 조기 공론화 주장이 터져나온 셈이다.

정치권에서 개헌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되는 이유는 크게 3가지로 요약된다.

먼저, 1987년 6월항쟁의 결과물로 이뤄진 현행 헌법이 시대의 변화에 뒤처졌다는 인식이다. 87년 개헌 당시에는 대통령의 장기 집권과 권력 남용을 막는 게 지상 과제였다.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한 ‘5년 단임 대통령제’를 핵심으로 한 현행 헌법은 이런 시대적 열망이 담겨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네 차례 대통령 선거를 치르고 정권이 바뀌면서 장기 집권에 대한 우려는 사라진 반면, 대통령이 자신의 국정운영 결과에 대해 국민의 직접 심판을 받지 않는 5년 단임제의 한계가 노정됐다는 게 정치권의 중론이다.

한나라당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소의 윤건영 소장은 “1987년 개헌 이후 18년이 지나면서 당시 국가 상황과 지금 상황이 많이 달라졌고, 대통령 단임제 등 그때 중요했던 문제가 지금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상황이 됐다”면서 “이제 시대 변화에 맞춰 현실적으로 헌법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해찬 총리도 3월3일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5년 단임제는 우리가 병폐를 많이 겪었고,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면서 “4년 연임제로 하거나 다른 형태로 바뀌는 게 타당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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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국론 분열, 국력 낭비 등 비효율을 부추기는 불합리한 선거 주기를 변경할 최적기라는 현실적 판단도 작용하고 있다. 그동안 정치권에서는 5년 주기의 대통령 선거, 4년 주기의 총선과 지방자치제 선거가 계속 엇갈리면서 해마다 선거 국면이 지속되는 데 따른 문제점이 계속 제기돼왔다. 하지만 대통령 임기 변경, 국회의원의 임기 단축 등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개선 방안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지 못했다. 그런데 현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는 2008년 2월, 17대 국회의원 임기도 2008년 6월로 끝난다. 4년 중임 대통령제로 개헌할 경우 현역 의원들의 임기를 4개월만 단축하면 앞으로 대선·총선을 동시에 실시할 수 있는 순환주기가 마련되는 셈이다.

셋째, 개헌 논쟁의 직접 이해 당사자들이 개헌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는 점이다. 노 대통령은 2002년 11월 대선에서 임기 내 분권형 대통령제로 개헌을 공약했고, 당선 뒤에는 “17대 총선 이후 분권형 대통령제로 국정을 운영하다가 2006년 개헌 논의를 시작해 임기를 1년쯤 앞둔 시점에 마무리하는 게 좋다”며 일정표까지 제시했다. 노 대통령은 현재 이해찬 총리에게 정부 운영권을 상당 부분 부여하는 분권형 실험을 거듭하고 있다. 야당의 잠재적 대권주자인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도 2004년 4월 “4년 중임제 개헌이 개인적 소신”이라고 밝혔다. 여권의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정동영 통일부 장관, 여권의 이명박 서울시장·손학규 경기지사 등 대권을 넘보는 정치인들도 중임제 개헌에 긍정적이다. 논의만 무성할 뿐 결과물이 없었던 개헌 논의가 구체적 결실을 맺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은 셈이다.

여권의 한 핵심 인사는 “과거 3김 시대에는 개헌 논의가 곧 권력을 둘러싼 정치적 담합이라고 비판받았지만 이제 학계, 일반 국민 사이에 그런 우려가 상당히 줄었다”며 “18년 동안 묶여 있던 헌법을 손볼 기회”라고 말했다.

영토와 경제 조정권 등 논란

하지만 결과를 낙관하기는 이르다. 구체적 결실을 맺기까지는 걸림돌이 많기 때문이다.

당장 개헌 시기에 대한 셈법이 다르다. 최근 개헌론을 제기한 여야 의원들은 당장 공론화하자는 쪽이다. 미리 준비해야지, 대선이 임박해 ‘게임의 룰’을 바꾸려면 유력 대권주자들의 반발, 정계개편 논쟁, 국민 저항이 촉발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최대 변수인 노무현 대통령이나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개헌 논의를 늦추자는 쪽이다. 청와대의 한 핵심 인사는 “정치권에서 나오는 조기 공론화 주장은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강화하기 위한 개별적 행동”이라며 “내년 지방선거 이후 논의를 시작해 2006년 말 정기국회나, 2007년 초에 개헌안을 마무리하는 게 최선”이라고 말했다. 이해찬 국무총리가 3일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내년 상반기에 지방 선거가 끝나고 2006년 하반기에 논의해도 시간이 부족하지 않다”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박근혜 대표를 비롯한 한나라당 주류들도 섣불리 달려들면 당의 내분을 자초하고, 여권의 정계개편 구상에 휘둘릴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 등으로 공론화 시기 선택을 고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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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의 구체적 내용은 더욱 큰 문제다. 여야 정치권에는 4년 중임 대통령제로 권력 구조를 개편하는 개헌안에 대한 공감대가 폭넓다. 이목희 열린우리당 의원은 “직선 대통령제를 선호하는 국민 정서, 정치권의 이해관계 등을 감안할 때 4년 중임제 개헌이 가장 현실적 대안”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영남권 중진들과 자민련, 민주당 일각에서는 내각제 개헌을 주장하는 기류가 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한나라당이 대통령 직선제로 재집권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할 경우 내각제 개헌론에 전격 가세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권력구조 개편 외에 개선 필요성이 제기돼온 △영토조항(제3조) △국회의원의 면책특권(제44조)과 불체포특권(제45조) △경제 민주화를 위한 국가의 규제 및 조정권(제119조) 등도 첨예한 논쟁을 예고하는 주제들이다. 여야 모두 남북 관계의 진전, 사회·경제적 민주화 등 변화된 현실을 반영해 이 조항을 손봐야 한다는 총론에는 동의한다. 박세일 전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은 지난 1월 “사회경제, 인권, 남북 관계 등 비합리적인 헌법 조항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각론에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먼저 대한민국의 영토를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영토조항은 실존하는 북한 체제와의 공존 및 평화통일 정책과 충돌한다. 하지만 여야 모두에게 ‘뜨거운 감자’다. 대안 마련이 쉽지 않은데다 사회 전반에 정체성 논쟁과 보혁 대결을 촉발할 민감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의회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보장하는 장치인 불체포특권, 면책특권이 무책임하게 악용되고 있다는 비판도 거세지만, 야당은 권력에 의한 의회 말살 의도라며 난색을 표시한다.

“본 전투는 내년”

경제 민주화를 위해 국가가 경제 전반에 대해 규제와 조정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한 헌법 119조는 이미 기싸움이 치열하다. 좌승희 한국경제연구원장은 “국가 균형발전, 대기업 규제, 경제 민주화 등 대한민국 경제의 기본 질서를 규정한 헌법 119조는 사실상 경제사회주의적 조항으로 자율적인 기업 성장을 가로막고 관치경제를 합리화하는 낡은 시대의 헌법 규정”이라며 “폐지하거나 근본적으로 수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좌 원장은 “개헌 논쟁이 본격화될 때를 대비해 합리적 헌법학자, 경제계 인사들과 함께 대응방안을 마련 중”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보수적 헌법학자와 변호사들이 출범시킨 ‘헌법포럼’도 현행 헌법의 ‘국가경제’ 개념을 폐기하고 ‘시장방임 경제’ 개념을 강화하기 위한 논쟁에 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 헌법학자인 권형준 한양대 교수는 “서구 사회가 수정자본주의로 굳어졌고, 우리도 경제적 약자에 대한 배려는 무시할 수 없는 화두가 됐다”면서 “개헌 논쟁을 자유시장 경제 이념을 강화하는 쪽으로 몰고 갈 경우 국민적 저항이 거세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여야 정치권은 앞으로도 개헌에 대한 군불때기를 지속하면서 유리한 여론 조성을 위해 힘을 쓸 것으로 보인다. 여권의 한 핵심 인사는 이와 관련해 “여야 모두 올 한해 동안 당 정책연구소를 중심으로 구체적인 개헌안을 준비하면서 내년에 벌어질 정면 대결을 준비할 것”이라며 “본 전투는 내년”이라고 전망했다. 이미 열린우리당의 열린정책연구원(원장 박명광 의원)은 올 연말까지 권력구조 개편 문제에 대한 답을 내놓겠다며 연구작업에 돌입했다. 한나라당의 여의도연구소도 “조만간 헌법 연구팀을 발족할 계획”이라고 윤건영 소장이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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