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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문화우위’ 시대 열리나

등록 2004-07-01 00:00 수정 2020-05-03 04:23

정치인들 문화코드 읽기로 변신 시도… 문화 · 관광산업연구회 설립에 연극 · 영화 제작까지 구상

박창식 기자 cspcsp@hani.co.kr

코미디언 이주일(본명 정주일)씨는 1992년 대선에서 정주영 국민당 후보의 연설원으로 활약했다. 1992년 14대 총선에선 지역구에 출마해 국회의원도 했다. 배우 최불암(본명 영한)씨는 1992년 대선에 정주영 국민당 후보를 지원했으며, 그 뒤 국민당 전국구 국회의원을 지냈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는 한나라당이 강신성일, 신영균씨 등을 영입해 국회의원 후보로 내세웠다. 이들은 의정활동에서 주목받지 못하다 16대 임기 종료와 함께 정치권에서 퇴장했다.

‘액세서리 공천’은 사라지고…

‘정치와 문화’의 과거사는 정치권이 문화예술인의 인기를 활용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즉, “정치권이 자체의 행동·사고 구조를 바꾸지 않은 가운데, 문화예술인을 장식품으로 차용한” 셈이다. 문화에 대한 ‘정치 우위’가 관철된 것으로 해석해도 좋을 듯하다.

2002년 대선과 노무현 정부의 출범 과정에선 부분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는 문화모임’(노문모·문성근 명계남 이창동 박재동씨 등)은 유세장과 사이버 공간에서 노무현 바람을 일으키는 견인차 구실을 했다. 그 결과 이들은 참여정부 첫 조각에서 이창동씨를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입각시키는 데 성공한다. 일시적인 장식품 구실, 그리고 한두 사람이 국회의원 배지를 다는 것으로 보상받던 과거사와는 달랐다.

2004년 17대 총선에선 인기 문화예술인을 끌어들이는 ‘액세서리 공천’이 여야 각 당에서 자취를 감췄다. 국회 의사당에는 ‘딴따라 국회의원’이 사라졌다. 그 대신 17대 국회에서는 정치권이 “내 모습을 바꿔야 산다”며 문화를 향해 달려가는 새로운 조류가 등장했다.

원혜영, 우상호, 채수찬, 배기선(이상 열린우리당), 권오을, 남경필(이상 한나라당) 의원 등 20명의 의원은 국회 연구단체로 문화·관광산업연구회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이 모임은 대중문화 콘텐츠 산업에 관심을 집중하는 것으로 타기팅을 구체화하고 있다. “영화 , 드라마 가 일본에서 바람을 일으키는 등의 한류 열풍을 접하고, 정치권의 새 역할을 이 분야에서 찾으려는 것”이라고 원혜영 의원은 밝혔다. 관광산업도 일부 관심 대상으로 넣었다.

이 모임은 대중문화 산업 최고경영자(CEO)들의 단체인 문화산업포럼(공동대표 송승환 PMC 대표·이장우 경북대 교수 등)과 파트너십을 유지하면서 운영하려는 것도 또 하나의 특징이다. 문화산업포럼은 영화, 가요, 게임, 출판 등 떠오르는 대중문화 콘텐츠 산업의 중견 CEO와 학계 이론가 45명이 2002년에 결성한 단체다.

정치권과 산업계가 만나게 된 과정도 흥미롭다. 원혜영 의원 등이 산업계 CEO들에게 먼저 공동 작업 가능성을 타진해 제휴가 이뤄졌다고 한다. 민간 분야가 자신들의 정책민원 때문에 국회의원을 쫓아다니던 종전 흐름과 다른 셈이다.

이장우 교수는 “과거에는 문화인들이 정책민원을 들고 국회의원을 만나려 쫓아다녀도 잘 만나주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다”며 “그러나 최근에는 국회의원들이 먼저 공동 작업을 타진해오고 있다”고 ‘대중문화 산업의 성장’에서 배경을 찾았다.

문화·관광산업연구회는 문화산업포럼과 정례적으로 공동 세미나를 하고 “산업계 전문가들이 의견을 개진할 토론의 장과 의원들이 공부하고 체험할 수 있는 학습의 장을 마련하겠다”(발기문)고 밝혔다. 이장우 교수는 “정치인들이 성장하는 대중문화 산업에서 자양분을 섭취해가려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연구회는 이런 과정을 거쳐 문화산업 발전을 위한 정책을 개발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한나라 의원들, 정치풍자 단막극 만든다

한나라당 의원 20여명은 “정치를 아름답게, 국회를 부드럽게, 국민을 기쁘게”라는 모토를 걸고 국회의원들로 ‘극단 여의도’ 창단을 준비하고 있다. 대표에 박찬숙, 제작·기획은 이재오, 간사에 나경원 의원이 내정됐다. 9월 정기국회 이전에 정치풍자 단막극을 무대에 올릴 계획이라고 이재오 의원은 밝혔다.

이재오 의원은 영화 를 만든 강제규 감독, 영화 의 장선우 감독과 자주 만나고 있다. 이 의원은 통일의 전 단계로 남북한 주민들이 휴전선 부근에서 자유도시를 운영한다는 가상 시나리오를 토대로 영화를 한 편 제작해보자고 제안해 공감을 얻었다고 한다. 장 감독은 구상을 듣고 “단군이 건설한 전설의 도시인 신시(神市) 프로젝트라고 이름을 붙이자”고 답했다.

이 의원은 실제로 시나리오 한편을 검토하고 있으며, 자신도 별개의 시나리오 집필을 구상하고 있다. 그는 “이 영화에 관한 한 내가 제작자로 나설 생각”이라고 하는데, 그 경우 제작비 펀딩도 그의 몫이다.

기자는 미심쩍어 이 의원과의 인터뷰에서 “한나라당의 보수성 때문에 혹시 반공영화를 만들려는 것은 아닐지”라고 물었는데, 이에 그는 펄쩍 뛰면서 “반공영화를 만들면 관객이 들겠냐. 그 반대로 1970~80년대 재야·통일운동을 벌이던 나의 정체성으로 되돌아가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1970년대에 국어 교사였던 그는 교사들의 체제저항적 연극운동(극단 ‘상황’)을 주도하다가 해직·투옥됐으며, 그 뒤 서울 민통련 의장 등의 재야활동을 한 바 있다.

3선 의원인 그는 15, 16대 국회에서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 맞서 폭로전을 선도함으로써 ‘대여 저격수’ 이미지가 쌓였다. 그러나 그는 이제 ‘투쟁의 시대를 마감하고 문화 정치로’의 변신을 선언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저격수로서의 시대적 임무는 끝났다. 투쟁 과정에서 나 개인적으론 희생을 치렀지만 어쨌든 이제 권력형 부정비리는 발붙이기 어려워졌다. 그렇다면 이제는 국민에게 감동을 주는 새로운 정치를 해야 한다. 그것이 문화다. 한나라당이 20~30대에 약한데 그것을 바꾸기 위해서도 문화 정치가 필요하다.”

원혜영·이재오 의원 등은 ‘정치와 문화의 접목’을 공통의 키워드로 내걸고 있다. 이들은 “정치가 문화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도 말한다. 배경은 사실 단순하다. 갖가지 비리 게이트를 중심으로 사생결단식 투쟁의 정치가 마감돼가는 터에다, 영화 등이 순식간에 관객 1천만명을 동원하는 시대가 됐기 때문이다. 정치권이 시대의 변화와 대중의 취향에 눈높이를 맞춰야 한다는 점에서 때늦은 감마저 있다.

골프 안 치고 술 안 먹으면…

그러나 정치와 문화를 어떻게 접목할 것이냐라는 구체적인 방법론에 들어가면 모호한 구석도 있다. 이를테면 원혜영 의원 등은 산업계 CEO들과의 파트너십을 통한 ‘학습’을 출발점으로 잡고 있다. 공부하는 거야 기본이되, 공부를 통해 정치를 어떻게 바꿀 것인지가 다소 막연하기에 아직 초보적인 문제의식이라는 느낌을 준다.

‘이재오 방식’은 다소 ‘과격’해 보인다. 국회의원이 직접 영화 제작, 연극 공연에 참여한다면 ‘본업인 정치는 또 언제 할 건지’라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이 의원은 “남들처럼 골프 치고 술 먹고 다니지 않으면 시간을 충분히 뺄 수 있다”고 말한다.

어쨌든 이들의 움직임에는 ‘문화에 대한 정치 우위’에서 ‘정치에 대한 문화 우위’로의 시대변화 코드가 담긴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이들이 좀더 적절한 ‘접목 방법’을 찾아내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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