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대 국회에 조직적으로 진출한 열린우리당 전대협 출신들… 개혁노선에 강력한 결속력 발휘할 듯
박창식 기자 cspcsp@hani.co.kr
“전대협의 힘이 과시됐다.” 17대 총선 결과에서 나타난 또 하나의 면모이다. 1980년대 학생운동의 지도부를 형성했던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하 전대협) 간부 출신으로 열린우리당에만 무려 12명의 당선자를 냈기 때문이다.
16대 국회에서 전대협 출신은 3기 의장을 지낸 임종석 의원(37·서울 성동을)이 유일했다. 16대 총선에도 새천년민주당 공천으로 이인영·허인회·우상호·오영식씨가 도전했지만 모두 낙선했으며, 비례대표 후보였던 오씨만 4년 임기 막판에 승계 성격으로 잠시 배지를 다는 데 그쳤다.
‘전대협 동우회’로 사회세력화
그러나 17대 총선에선 전대협 출신만 모두 18명이 열린우리당 공천을 받았으며, 영남권에 도전했던 최인호씨 등 6명만이 낙선했다. 전대협 1기(1987년 6월항쟁 당시 지도부) 출신으로 이인영(39·서울 구로갑), 우상호(41·서울 서대문갑), 이철우(43·연천·포천), 김태년(39·성남수정)씨가 원내 진출에 성공했다. 전대협 2기에선 오영식(39·서울 강북갑), 정청래(39·서울 마포을), 최재성(39·남양주갑), 백원우(38·시흥갑)씨가 당선됐다. 전대협 3기로는 임종석 의원의 재선 성공을 비롯해 이기우(40·수원권선), 한병도(36·익산갑), 복기왕(36·아산)씨가 금배지를 달게 됐다.
사실 학생운동 출신자의 국회 진출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열린우리당에는 김근태·이해찬·임채정·이호웅·장영달 의원 등 1960~70년대 선배그룹이 진작에 자리잡았다. 또한 송영길 의원 등 전대협 바로 앞세대를 포함한 범386 그룹의 약진 양상도 이미 알려진 바 있다. 열린우리당 당선자 152명 가운데 범학생·사회운동 출신자는 모두 50~60명에 이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대협 세대의 진출을 주목하는 것은 이들이 다른 세대 이상의 균질성과 강렬한 결속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정치노선 측면에서 볼 때 정체성이 모호한 것으로 평가받는 열린우리당 내부에서 진보 블록을 형성할 가능성이 높은 것도 사실이다.
전대협 세대의 균질성과 결속력을 이해하려면 그동안의 경과를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전대협 출신자들은 1993년 전대협 동우회를 결성한다. 이들은 “청년세대의 단결과 공론 형성 및 사회실천 활동을 목적으로” 내걸었다. 학생운동 OB그룹이 단순한 ‘올드 보이’에 그치지 않고 집단적 사회세력화의 필요성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동우회 회원은 600여명으로 제법 많은 편이다. 전대협이 과거 학생운동과 달리 운동의 대중화를 본격적으로 이뤄냈던 세대인 탓에 운동 지도부 참여자의 수도 그만큼 많았던 것이다.
동우회 회원 가운데는 30%가량이 국회의원 보좌관·비서관, 정당 실무자 등 범정치권 관여자가 차지했다. 나머지 15%는 학계, 또 15%는 개인 사업, 그 밖의 40%가 일반 직장인으로 구성됐다. 현 동우회장인 전문환씨는 “운동권 출신자라서 일반 직장의 취업이 어려운데다 정치권은 학생운동 시절의 공적 관심사를 이어나가는 데 좋은 무대가 되기도 했다”며 정치권 관여자가 많은 배경을 설명했다.
이런 가운데 1997년 대선을 통한 첫 여야간 정권 교체와 함께 전대협 세대에게 비로소 기회가 열리기 시작한다. 2000년 총선을 앞두고 여권이 새천년민주당을 창당하면서 전대협의 인력풀에 눈길을 돌린 것이다.
이에 따라 전대협 의장을 지냈던 이인영, 우상호, 오영식, 임종석씨와 삼민투위원장을 지낸 허인회씨 등이 민주당으로 영입된다. 그러나 이 무렵은 어디까지나 정치권이 ‘젊은 피 수혈’ 차원에서 운동권 출신 명망가와 사람을 스카우트한 것이었지, 전대협 세대 차원의 주체적·조직적 진출로 보기는 어렵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그러나 2002년 대선에 이르면서 사정은 급변한다. 노무현 후보가 개혁과 진보의 깃발을 분명히 들고 나섬에 따라 전대협 동우회가 노 후보 진영과 본격적으로 결합할 명분이 마련된 것이다. 전대협 동우회는 1997년 대선 때와 달리 단체 차원에서 노 후보 지지를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또한 회원들의 상당수가 ‘국민경선 2030 네트워크’ ‘노사모’ ‘개혁국민당’ ‘국민의 힘’ 등 노 후보를 지지하는 각종 정치단체에 참여해 어느덧 주력군을 형성하게 된다. 학생운동과 청년운동을 통해 훈련된 정치적 감각을 이들 외곽활동을 통해 유감없이 발휘하게 된 것이다.
2003년 초부터 총선 준비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2003년 초부터 이들은 “이제는 우리가 국회의 주역으로 나서야…”라는 결심을 굳히고 본격적인 준비에 착수한다. 이에 따라 40명 가까운 총선 출마 희망자들이 따로 모임을 만들어 몇 차례 MT를 갖고 공동의 목표와 전략 따위를 논의하게 됐다.
이인영 당선자의 말이다. “지난해 5~6월께 첫 워크숍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나는 ‘앞으로 10년 뒤면 남북간 협상을 통해 통일을 협의해야 할 상황이 될 것이다. 10년 뒤를 내다보고 민족민주 노선에 따른 정치를 해야 한다. 10년 이전까지 남북간 신뢰 구축과 남한 사회 내부의 평등, 복지 따위를 강화하고 10년 이후에는 통일 상황에서 동·서독 통일 이후와 같은 내부 차별이 없어지도록 하는 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기조발제를 했다.”
이들은 지난해 9월에는 계룡산 동학산장에 모여 2차 세미나를 실시했다. 이 자리에서도 “자주·민주·통일이라는 전대협 정신에 걸맞은 정치”가 논의됐으며, 10월30일에는 학생운동 선배인 신계륜 의원의 인솔로 광주 망월동 5·18 묘역을 함께 참배했다.
이들은 당내 경선 따위에 대비해 공동의 기획단도 구성했으며, 예비후보를 대리한 실무자들을 모아 선거법 교육도 실시했다. 올 들어 실시된 열린우리당 경선에서 이들이 예상 밖으로 다른 경쟁자들을 쉽게 물리쳤는데, 그 이면에는 이와 같이 남보다 먼저 준비 태세를 가다듬은 비밀이 담겨 있었다.
물론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걸어온 길은 조금씩 다르다. 백원우 당선자는 대학을 떠나 일찌감치 고 제정구 의원의 비서관으로 합류해 정치권에서 잔뼈를 키워온 경우로 꼽힌다. 그는 빈민운동가 출신인 제 의원 캠프에서도 시흥 지구당의 총무부장 노릇을 했다.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지구당 총무부장이라면 제일 먼저 지구당 사무실에 출근해 바닥 물걸레질부터 시작해 온갖 궂은 일을 하게 마련이다.
제 의원이 낙선하자 그는 노무현 국회의원의 비서관으로 옮겼다. 그는 노무현 캠프에서 인터넷 홍보를 주로 담당하면서 2002년 대선 이래 정치커뮤니케이션의 새로운 총아로 떠오른 미디어 정치의 감각을 익혔다. 대선 이후에는 청와대 민정수석실 행정관으로 국정실무 경험을 쌓았다.
백씨는 “국회의원 당선의 원동력 중 하나가 안티조선, 노사모 회원들의 성원이었다”며 “언론개혁 관련 법 개정에 참여하는 것은 물론이며 지역의 당원들에게도 안티조선 홍보물을 지속적으로 배포함으로써 의식의 심화를 꾀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16대 국회에서 만든 민족정기회복특별법도 친일행적 조사대상을 일본군 ‘중좌 이하’로 제한하는 등 내용이 부실하다”며 “17대 국회에서 곧바로 개정해 역사를 바로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철우 당선자는 서울시립대 재학 중 그리고 졸업 뒤에 두 차례나 시국사건으로 복역한 뒤 곧바로 고향인 연천·포천으로 내려간 특이한 경우다. 그는 “중앙집권적, 서울 집중적 모델로는 한국사회가 더 이상 발전 동력을 얻을 수 없다”며 지역운동의 새로운 모델을 찾아보겠다고 결심했다. 이에 따라 그는 고향 청년들을 모아 ‘한탄강 네트워크’를 만들어 한탄강댐 문제, 지역의 교육 문제 등을 중심으로 한 시민운동을 펼치기 시작한다. 생업으로는 가업으로 물려받은 벼농사를 지었다.
그는 시민운동을 하면서도 동료 회원들에게 “정당이 지역사회의 여론과 공론을 수렴한다는 제 기능을 못하는 상황에서 그 대안은 시민단체”라며 “우리 사회에선 시민운동을 통해 훈련된 사람이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런 토대 위에서 2002년 대선에 참여한 끝에 열린우리당 공천을 거쳐 국회에 진출하기에 이른 것이다.
추가파병 반대 · 언론개혁 · 국보법 개폐
복기왕 당선자는 명지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대학 졸업 뒤 코리아제록스에서 2년, 동성농수산이라는 회사에서 3년간 신입사원 생활을 했다. 그 뒤 “운동을 하기 위해 시간을 낼 수 있는 직업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나름의 농수산물 유통사업을 시작한다.
그러나 말이 사업이지, 사실은 트럭 1대를 몰고 새벽 4시에 농수산물 시장에서 야채류를 매입해 학교나 병원 식당에 공급하는 ‘1인 차떼기’가 내용이었다. 그것으로 생계를 해결하되, 일이 끝나는 오전 10시 이후에는 청년정보문화센터를 비롯해 청년단체 일에 몰두한 것이다. 어쨌든 남들과 달리 잠자는 시간을 줄여 새벽부터 일하고 낮에는 자기가 하고 싶은 ‘공적 활동’에 매달리는 ‘두몫 인생’을 살아온 셈이다. 그는 2002년 대선 때 고향인 충남 아산 지구당이 민주당 내분으로 붕괴되자 지구당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으면서 표밭갈이를 시작하게 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이라크 추가파병 반대 △언론개혁은 당연히 추진 △국가보안법 조속한 개폐 등의 소신을 밝힌다. “전대협 정신과 초심을 잃지 않겠다”는 다짐도 한다. 민주노동당이 제3당으로 떠오른 가운데 열린우리당이 개혁·진보적 정체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게 이들의 공통된 생각이기도 하다.
전대협 1기 의장을 지내 동우회 차원의 맏형 노릇을 해온 이인영 당선자는 이들이 원내에서도 한목소리를 낼 수 있을지 묻자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답했다. 이 당선자는 “전대협 시절에 추구했던 가치 체계를 잃어버리는 순간, 그렇다면 왜 정치를 하는 거냐는 물음에 부닥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전대협 동우회는 오는 5월9일 연례 체육대회를 열며, 이 자리에 당선자들을 초청한다고 한다. 동우회장 전문환씨는 “당선자들이 각각 17대 국회에 임하는 각오와 개혁 입법 과제에 대한 견해를 밝히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대협 세대는 그 이전의 학생운동 선배 세대와 달리 6월항쟁을 비롯해 대중운동을 성공시켰다는 ‘승리의 체험’도 공통의 자산으로 갖고 있는 듯하다. 30대 후반~40대 초반의 나이에 상당한 약진을 기록한 이면에 그러한 경험을 축적한 ‘집단의 힘’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앞길이 순탄하리라고만 보긴 어렵다. 2000년 5월 ‘젊은 피’ 수혈 차원에서 국회에 입성한 386 인사들이 이른바 ‘광주 룸살롱 사건’에 관련됨으로써 도덕적 기반에 큰 상처를 입었던 전례도 있기 때문이다. 젊은 나이에 금배지를 움켜쥔 데 따른 교만이 이들에게 가장 큰 적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이들은 “한 사람이 열 걸음보다는, 열 사람이 한 걸음을…”이라며 차분히 다지고 또 다지면서 나아간다는 또 하나의 전대협 정신을 늘 새겨두는 게 필요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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