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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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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하는 경제에 날개가 없다

등록 2008-06-24 00:00 수정 2020-05-03 04:25

외환위기 후 첫 경상수지 5개월 적자, 물가 급상승, 불어나는 가계빚… “정부 대응 능력 취약해 눈 뜨고 당할 수도”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여기저기서 경제위기설이 간간이 흘러나고 있다. “(각종 경제지표를 볼 때) 조짐이 좋지 않다”는 진단에서부터 “외환위기 직전 상황과 유사하다”(임태희 한나라당 정책위의장)는 제2의 위환위기설까지 다양하다. 임태희 의장은 △단기 외채 급증 △경상수지 적자 만성화 △새마을금고 등 제2금융권 부실 징후 등을 그 조짐으로 꼽았다.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기초)은 지금 어떤 상황일까?

위기론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지표는 무엇보다 경상수지 적자의 추세와 규모다. 경상수지는 지난해 12월부터 5개월 연속 적자를 기록 중이다.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 이후 처음이다. 올 1∼4월의 누적 경상수지 적자 규모(67억8천만달러)는 1997년(적자액 82억8천만달러) 이후 최대 수준이다. 유가 급등으로 인해 수입 금액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기획재정부는 올해 경상수지가 70억∼80억달러 적자를 기록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외환위기 당시에는 위기 직전 2∼3년간 만성적으로 경상수지 적자(200억∼300억달러)가 쌓이면서 위기를 초래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6월 내내 팔기만

물론 올해 70억∼80억달러의 경상적자라면 국내총생산(GDP)의 1%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그러나 정부가 내놓은 경상적자 전망은 하반기에 국제유가가 안정될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국제 기름값이 배럴당 150달러를 돌파하는 등 유가 급등세가 지속되고 고착화될 경우 경상수지가 흑자로 돌아설 시기는 더 늦춰지고, 적자 규모가 예상보다 훨씬 더 커질 수도 있다. 국제유가는 그동안 기획재정부의 예측을 비웃으며 계속 급등해왔다. 최근 삼성경제연구소는 국제유가가 200달러로 급등할 경우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로 돌아서고, 경상수지가 약 210억달러 적자를 기록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제 외채 쪽을 보자. 외채 증가폭은 2005년 156억달러, 2006년 722억달러, 2007년 1221억달러로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 총외채는 올 1분기에만 303억달러 늘었다. 만기 1년 이내의 단기 외채 증가 속도 역시 불안한 조짐을 보이고 있다. 단기 외채 잔액은 2005년 말 659억달러에서 지난해 말 1588억달러, 지난 4월 말 1735억달러로 급증했다. 단기외채는 총외채 가운데 40% 이상을 차지한다. 4월 말 외환보유액(2605억달러)의 60%가 넘는다. 유동외채비율(유동외채/외환보유액)은 2004년 말 38.6%에서 올 3월 말 81.6%로 증가했고, 단기외채비율(단기외채/총외채)도 2004년 말 32.7%에서 올 3월 말 42.8%로 증가했다. 반면, 지난 3월 말 현재 우리나라의 순대외채권(대외채권-외채)은 지난해 말에 비해 205억달러 감소한 149억달러를 기록했다. 그래서 외채가 대외채권보다 많은 ‘순대외채무국’으로의 전환이 임박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최근의 외채 급증 양상이 외환위기 때와 비슷한 위기 징후”라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경제 상황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주식시장 쪽을 보면, 외국인 투자자들이 6월 들어 2조원이 넘는 매물을 쏟아내면서 외국인의 팔자가 본격화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유가증권 시장에서 외국인들은 6월17일까지 2일과 5일을 빼고 계속 팔아치워 2조4700억원의 순매도를 기록했다. 2005년부터 순매도를 기록 중인 외국인은 2006년과 2007년에 이어 올 초까지 무차별적으로 한국 주식을 팔아치워 시가총액 비중을 31%대(지난 5월 말 기준)까지 끌어내렸다. 인플레이션 우려가 커지면서 외국인이 매도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심재엽 메리츠증권 투자전략팀장은 “최근 외국인의 매도를 본격적인 대량 매도 신호로 보기는 어렵다”며 “유가 급등으로 글로벌 증시가 불안한 움직임을 보이면서 외국인의 매도세가 지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외국인들은 주식을 팔아 안전한 국공채 투자로 돌리고 있다. 외국인의 국내 채권 투자는 지난해 352억달러에 달했는데, 올 들어 5월 말까지 133억달러 정도의 국내 채권을 순매수했다. 미국에 비해 한국의 금리가 높은 점도 작용하고 있지만, 경제 상황이 불안해지자 안전한 채권으로 외국인의 돈이 몰리고 있는 것이다.

돈 빌려 생활비에 보태는 사람들 늘어

경제 상황을 보여주는 소비 측면의 지표들을 보자. 물가가 가파르게 상승하고 경기가 둔화되는 와중에도 신용카드 지출은 급증세를 보이고 있다. 올해 1분기 신용카드 이용 실적은 112조5천억원으로, 1년 전에 비해 16.1%나 늘었다. 신용판매가 86조원으로 18.3% 늘었고, 이 가운데 할부판매가 18조3천억원으로 36.6% 급증했다. 현금대출도 26조5천억원으로 10.0% 증가했다.

가계빚도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가계대출과 외상구매를 합한 가계신용 잔액은 3월말에 640조5천억원(가구당 부채 3841만원)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지난해 말에 비해 9조7938억원 늘어난 것인데, 1분기 증가 폭으로 보면 2002년 1분기 이후 6년 만에 최대치다. 소득은 줄고 물가가 급등하면서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려 생활비에 보태는 사람이 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신민영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생계형 대출이 많고 신용카드 지출이 급증하는 건 고용도 나쁘고 경기도 안 좋은 상황에서 서민들이 겪는 어려운 살림살이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기업 대출금도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3월 말 전체 산업대출금 잔액은 465조8천억원으로 2007년 말에 비해 5.9%인 25조7천억원 늘었다. 2000년 이후 가장 높은 증가율이다. 김화용 한국은행 금융통계팀 과장은 “원자재 가격이 치솟고 환율이 상승하면서 기업마다 운전자금(원재료비 등)이 부족해지자 대출을 늘리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펀더멘털 지표 가운데 가장 우려되는 건 역시 물가 급등이다. 5월 수입물가는 1년 전에 비해 44.6%나 뛰어 10년 만에 최고치를 나타냈다. 특히 원자재 가격 상승률은 83.6%로, 관련 통계가 나오기 시작한 1980년 이래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LG경제연구원은 최근 올해 하반기 물가상승률이 평균 5.0%로 크게 높아지고 경제성장률은 4.0%로 둔화하면서 스태그플레이션 현상이 뚜렷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6월 물가상승률은 5.5%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물가가 급등하면 실질소득이 감소하고, 소비가 줄어들면서 내수 위축, 기업 투자 감소, 일자리 감소, 소득 감소라는 악순환에 빠져들게 된다. 특히 물가 급등이 확산되면서 원자재 가격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음식이나 개인 서비스 등에까지 인플레이션 기대심리가 확산되고 있다. 한국은행 쪽은 “상품이나 서비스의 원가가 전혀 올라가지 않았는데도 판매 가격을 올리는 경향이 있고, 원가는 500원 상승했어도 판매 가격은 1천원 올리는 사례도 있다”며 “물가가 계속 오를 것이라는 전제 아래 실제 원가상승분보다 더 높게 가격을 올리는 사례들도 있다”고 말했다.

물가가 급등하는 가운데 시중 유동성도 급팽창하고 있다. 지난 4월 말 현재 2년 미만의 정기예·적금 등을 포함한 광의의 통화(M2)는 1년 전에 비해 14.9% 늘어난 1339조4349억원으로 집계됐다. 1999년 6월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한은 관계자는 “가계의 생활자금 대출이 늘고 기업의 자금 대출도 확대되고, 특히 대기업의 인수·합병(M&A) 자금 대출이 폭발적으로 늘면서 시중유동성이 증가했다”며 “시중유동성 증가세가 꺾이지 않으면서 물가 불안을 가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민영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지금의 경제 양상은 외환위기 때와 크게 다르다. 외채 측면에서 외환위기 가능성은 낮다”며 “그러나 구제금융을 받는 외환위기 또는 대기업들이 줄줄이 부도나는 사태만이 경제위기 국면은 아니다. 추세가 좋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유가 파동이 경제위기로 이어질 수 있고, 물가·금리 측면에서 위기가 발생할 수 있다는 얘기다.

정부가 최근 국회에 제출한 4조9천억원의 추가경정 예산안은 1998년 이후 최대 규모다. 고유가에 따른 저소득층·농어민·중소상인들의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편성한 추경이지만, 가뜩이나 불안한 물가를 더욱 자극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고육책에 가깝다. 정부는 올 하반기에만 추경 자금을 합쳐 총 18조여원의 재정·세금환급분을 민간에 풀 예정이다. 시중에 돈이 풀릴수록 물가는 상승하기 마련이다.

외환위기와는 다른 경제위기

상장기업들의 2분기 실적 전망치를 보면, 삼성전자·LG전자·SK텔레콤·현대자동차 등 성장률을 이끌고 가는 수출 관련 대기업들의 실적은 아주 좋은 것으로 나타난다. 고환율에 따른 혜택을 톡톡히 보고 있는 것이다. 반면 음식·유통·도소매 등 내수 관련 기업과 우리나라 고용의 대부분을 책임지고 있는 중소기업의 실적은 매우 나빠진 것으로 예측된다. 이종우 HMC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주가, 거시경제 지표, 기업실적 순으로 불황의 영향이 나타난다”며 “하반기부터는 서브프라임모기지 부실 등 금융시장 불안이 실물경제에도 충격을 미치기 시작할 것이고, 환율 효과까지 사라지기 때문에 수출 관련 업종도 낙관할 수만은 없다. 이제 막 경기가 떨어지기 시작하는 국면”이라고 말했다.

경제가 하강 국면에 들어서면서 금융기관들의 수익성은 눈에 띄게 추락하고 있다. 국내 시중은행들마다 올 2분기 실적은 매출액과 순이익 모두 1분기에 비해 크게 감소할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지난 6월18일 한국은행에서 열린 경제동향간담회에서는 “금융기관 등 대출기업의 수익성 하락과 부실채권 확대 가능성에 대해 면밀한 모니터링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이종건 한국은행 조사총괄팀장은 “은행들의 연체 비율 자체는 낮지만, 내수에 민감한 도·소매 업체와 건설업 등 특정 업종에 연체가 집중되면서 연체 금액이 크게 변동할 수 있다”며 “은행의 수익성이 크게 악화되면 금융기관마다 비 올 때 우산을 뺏어가는 대출 회수에 나서는 상황이 올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산 가격 추락하는 ‘잃어버린 세월’

한국금융연구원의 한 연구위원은 “제2의 외환위기 같은 말은 너무 앞서나간 진단이다. 그러나 앞으로 우리가 가진 자산들이 반토막 나는 국면으로 갈 수 있다. 정부 경제팀의 대응 능력이 취약한데, 눈 뜨고 당하는 사태가 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금리, 환율, 주가 등에서 위험 신호가 나타나고 있다. 하반기에 우리 경제가 굉장히 어려울 것”이라며 “미래에셋펀드 등 해외 펀드의 손실도 크고 환매가 일어날 것에도 대비해야 한다. 무엇보다 주식·부동산 등 국내 자산 가격이 추락하면서 한국 경제가 앞으로 몇 년간 ‘잃어버린 세월’을 겪게 될 상황이 전개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IMF 전처럼 빠르게 증가하는 외채

선물환 매도로 인한 것, 97년과 달라


경제위기론이 제기되는 원인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이 외채다. 지난 2년간 외채가 급증한 주요 요인으로는 △조선업체의 선물환 매도 △국내 해외증권 투자자의 선물환 매도 △외국인의 국내 채권투자 압력 등을 꼽을 수 있다. 이와 관련해 한국은행은 최근 “외채의 규모나 성격, 지표 등에 문제가 없다”며 “하반기 중 순채무국으로 전환될 가능성도 거의 없다”고 위기론을 일축했다.
한국은행은 외채 증가 속도가 빠른 건 사실이지만, 외채의 성격이 외환위기 당시와는 판이하게 다르다고 설명한다. 즉, 외환위기 이전의 외채 증가는 경상수지 적자를 보전하기 위한 차입 증가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지금의 외채는 상당 부분 미래의 수입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얘기다.
가령, 조선업체의 선물환 순매도와 관련된 외채(약 470억달러)의 경우 나중에 선물환 만기가 도래하면 수출대금을 거둬들이는 것이므로 자동적으로 외채가 감소하게 된다. 조선업체들은 미리 선박 수주대금을 받는다. 환율 등락에 따른 손실을 피하려고 수주대금을 미리 파는데(훗날 받을 달러화를 근거로 선물환 매도), 선물환을 먼저 내다 팔면 은행들은 이를 사들이기 위해 해외에서 달러를 차입하게 된다. 2006∼2007년 해외증권 투자자의 선물환 순매도와 관련된 외채(약 590억달러) 역시 환율변동 위험을 회피하기 위한 것이다. 외국인의 국내 채권투자도 모두 외채로 분류된다.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외채 비율은 2007년 말 현재 39.2%로, 미국·독일·영국 등 선진 3개국의 평균 비율(221.3%)보다 훨씬 낮다. 한국은행은 외채 구조와 상환 능력을 나타내는 지표들은 여전히 안정권에 머물고 있다고 밝혔다. 이광주 한국은행 국제금융담당 부총재보는 “최근 외채가 늘어나면서 우려의 목소리가 높지만, 올 2분기부터 조선업체와 해외증권 투자자의 선물환 매도가 줄고 외국인의 국내 채권투자 금액 증가세도 축소될 것이므로 외채 증가 속도도 둔화되고 그 규모도 축소될 것”이라며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 등도 한국을 외채 관련 선진국으로 분류하고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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