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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명동백작’을 기억하는가

등록 2004-09-23 00:00 수정 2020-05-03 04:23

<font color="darkblue">EBS 작가 정하연씨와 함께 명동 예술인들의 달콤하고 어지러운 향내를 찾아나서다 </font>

▣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역시 명동이었다. 금요일 늦은 오후 서울 명동은 한창 북적이고 있었다. 사람들의 물결을 헤치며 발길을 재촉하는데 이색적인 펼침막이 눈길을 붙잡았다. ‘EBS 명동백작의 방영을 축하합니다- 명동상가번영회’ 의 작가를 만나러 가는 길이어서였을까. 더 많은 사람들이 명동에 들러 밥과 술을 팔아주길 바라는 그 상술이 밉지 않았다.

희한한 멋쟁이 어른으로 가득차

9월17일 (EBS 토·일 밤 11~12시)의 작가 정하연(59)씨를 명동에서 만났다. “요즘 예술가들은 다 따로따로 흩어져서 글 쓰고 그림 그리고 음악하고 그러죠. 옛날엔 명동 전체가 작업실이었어요. 이곳에서 하나둘 모여들어 술마시고 토론하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친구가 되고 서로 자극받아서 작품 만들고 그랬어요.” 50년대 이곳에서 노닐던 어른 예술가들은 몰랐겠지만, 정하연씨 역시 명동의 ‘꼬마 백작’이었다.

“전 8살 때부터 명동에 출입했지요.” 명동은 어머니의 일터였다. 한국전쟁 직후 그의 어머니는 명동에서 달러 장사를 했다. 수완을 발휘해 돈을 좀 모은 어머니는 증권회사를 차렸고, 증권회사가 망하자 다방을 차려 재기를 노렸다. 명동 바닥을 훤히 꿰뚫는 어머니를 둔 덕분에 어린 아들은 수도극장(지금의 스카라극장)·중앙극장·계림극장·한일극장 등 명동·종로 일대의 극장들은 모두 공짜로 드나들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영화와 연극에 몰두했던 아들은 특히 여성 국극에 너무도 심취해 “왜 나를 남자로 낳아서 국극 배우를 할 수 없게 했냐”며 어머니를 원망할 정도였다고 한다.

어린 눈에도 명동은 희한한 멋쟁이 어른들로 가득 찬 곳이었다. 한순간도 담배를 집에서 놓지 않았던 공초 오상순은 집도 절도 가족도 없는 듯 청동다방을 떠나는 법이 없었고, 황순원·김동리·서정주 등 이름난 문인들도 명동을 수시로 찾았다. 운이 좋은 날엔 임춘앵·김진진 같은 국극 스타배우나 현인·남인수의 사인도 받을 수 있었다. 송옥양장점은 당시 최고의 부자들이 양복을 빼입는 곳이었고, 한일관·삼오관 등 한식집은 오랜만에 나들이 나온 서울의 중산층 가족이 외식을 즐기는 곳이었다. 그뿐이었는가. 돌체·갈채·모나리자·포엠·동방살롱·은성·한성 등의 다방·술집 들은 그 당시 예술가들을 휘감았던 고독·인내·자조·양심·청춘·낭만·가난 등의 단어들처럼 명동 거리 곳곳에 박혀 있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건물은 두채밖에 없습니다.” 옛 동방살롱 앞에 서서 정하연씨는 작은 한숨을 쉬었다. 50년대에 사업가 김동근씨가 예술인들을 위해 지어준 동방살롱은 3층의 콘크리트 건물로서 당시로선 최신식 건물이었다. 1층엔 차와 간단한 술과 안주를 파는 살롱이 있었고 2층엔 집필실, 3층엔 회의실이 있었다. 매일 살롱에 들러 출근도장을 찍는 사람들은 물론이요, 때때로 문인들의 출판기념회가 열렸고, 연말엔 댄스파티·가면무도회 같은 이벤트도 벌어졌다. 1957년 김동근씨가 어린 아들과 함께 밤섬에 뱃놀이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사고를 당해 요절한 뒤, 동방살롱은 이 사람 저사람 손을 떠돌다 오늘날은 치킨집과 호프·당구장으로 바뀌었다. 한때는 연극인 이해랑씨가 집을 판 돈으로 카페·주점을 운영하다 워낙 외상술 먹는 손님이 많아 역시 망하고 쓰린 속으로 손을 턴 곳이기도 하다.

꼬마 백작의 신춘문예 신고식

명동이 문화예술인들의 ‘에너지발전소’였다면 옛 국립극장은 ‘용광로’쯤에 해당할 것이다. 영화·연극·무용 등 각종 공연들이 하루도 빠짐없이 열렸던 국립극장은 문화예술인을 끌어모으는 거점이었다. 1936년 ‘명치좌’라는 이름의 영화관으로 문을 연 뒤 해방 뒤엔 ‘시공관’으로 불렸고, 1957~73년엔 ‘국립극장’으로 역할을 했다. 1973년 국립극장이 장충동으로 이전하면서 정부는 이 건물을 대한투자금융에 매각했다. “국립극장이 사라지면서 명동의 문화적 활기도 함께 죽어버렸지요.” 정하연씨는 국극이 열리는 날이면 표를 얻으려는 사람들의 행렬이 길 건너 유네스코회관 터까지 이어졌다고 회고했다.

옛 국립극장이 있는 블록 끝 모서리 건물은 이젠 1층이 맥도널드 매장으로 변했다. 이곳은 ‘은성’이라는 대폿집이 있었던 자리로 은성의 주인인 탤런트 최불암씨의 어머니가 넉넉한 인심으로 가난한 예술인들을 품어주었던 곳이다. 1968년 극작가로 데뷔했던 정하연씨도 신춘문예에 당선된 원고를 들고 은성을 찾아 신고식을 치렀다고 한다. 은성에 모여 있던 선배들이 한잔두잔 사주는 술에 대취해 원고조차 놓고 가버릴 정도로 정신을 잃었던 곳이다.

그때만 해도 그랬다. 명동에 나오면 커피 한잔 시켜놓고 하루 종일 다방에 앉아 있다 저녁이 되면 누가 술값을 내는지도 모르는 채 술을 마시고 집에 돌아가곤 했다. 가난은 참혹했지만 명동에 오면 그 비참함을 잠깐이라도 잊을 수 있었다. 비록 해진 셔츠 자락을 들키지 않기 위해 벌겋게 단 난로 앞에서도 오버코트를 벗을 수 없었고, 소금을 찍어 먹으며 안주를 대신할지언정 내일, 희망, 꿈, 예술 이런 막연한 것들을 들이대며 당당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늘상 뭐 대단한 것들을 떠들었던 것도 아니다. 시인 김수영은 원고료를 타도 친구들한테 술 한잔 거나하게 사지 않고 부인에게 봉투째 갖다바치는 것이 흉이 됐고, 당장 손가락을 빨아도 돈만 생기면 양복에 쏟아붓는 박인환의 모던보이 노릇도 입방아에 올랐다. 머리를 며칠째 안 감고 손톱 손질도 안 해 꼬질꼬질한 행색으로 남자들과 어울려 고독과 절망을 읊조리던 전혜린도 남자들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자조, 소문과 질투 같은 밑바닥 감정도 명동의 빼놓을 수 없는 냄새였다.

암울한 70년대, 거리는 봉인되다

“모든 게 다 있었던 곳이죠.” 정하연씨는 맥도날드 건너편, 미용실과 옷집으로 뒤덮인 골목을 가리켰다. 갈채, 청동다방, 돌체 같은 음악다방과 한국 최초의 스탠드바가 있었던 곳. 그 골목으로 들어가려던 21세기 어느 날 끝내는 눈물을 쏟고야 말았다는 정하연씨의 목소리가 젖어들었다. “박정희가 집권하면서 그랬어요. 입으로 먹고사는 놈들은 다 없애버리겠다고. 60년대까지는 그래도 입으로 먹고사는 놈들이 좀 있었지요. 파출소 앞에서 박정희를 욕해도 끌려가 맞지는 않았으니까요. 70년대엔 아무도 말할 수 없는 시대가 됐고, 이 무렵 명동도 변했지요. 땅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더 이상 이곳은 가난한 문화예술인을 품어줄 만큼 넉넉한 곳이 아니었어요.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우리는 그때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잃었던 거예요. 카오스를 통해 질서가 온다는 진리를 체득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긴 거지요.”

명동이 잃어버린 건 상인들의 넉넉한 인심, 예술인들이 피워내던 달콤하고도 어지러운 향내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가 압축 성장기를 거치며 잃어버린 정신이었다. 그래서 의 작가와 함께 곱씹는 명동의 추억은 달고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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