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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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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의 협정’을 깨뜨려라

등록 2004-09-24 00:00 수정 2020-05-03 04:23

뒤늦게 국가 차원의 과거사 조사 ‘위원회’ 구성한 스페인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 김원중/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강사

바로 며칠 전인 9월10일치 스페인의 주요 일간지들은 자국의 과거청산 문제와 관련해 대단히 의미 있는 한 가지 소식을 전하고 있다. 즉, 스페인 내전(1936~39)과 그 이후 40여년 동안 프랑코 독재 체제에 의해 희생된 수많은 희생자들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수석부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범정부 차원의 ‘위원회’(la Comision Interministerial para el estudio de las victimas de la Guerra Civil y del franquismo)가 구성됐다는 것이다.

내전으로 얼룩진 스페인 현대사

‘과거사 진상조사위원회’ 정도의 성격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이 기구의 설치 목적은 “민주주의의 수호를 위해 투옥되고, 탄압당하고,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그들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며, 또한 “희생자들의 실태를 정확히 파악한 다음 종국에는 피해자들을 도덕적·사법적으로 복권시키는 법안을 마련하게 될 것”이라고 소식은 덧붙이고 있다.

스페인 정부의 이번 결정은 피해 당사자들과 그 가족, 그리고 좌파 민주주의 세력을 중심으로 사회 일각에서 그간 줄기차게 요구해온 사항을 마침내 국가가 정식으로 수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또 독재자가 죽은 지 4반세기가 훌쩍 지나도록 확고하게 유지돼온 이른바 ‘망각협정’을 다른 민간기구나 학술단체가 아닌 국가가 직접 나서 깨뜨리려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스페인 정부의 이번 결정은 우리에게도 비상한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사회 역시 현재 과거청산 문제가 범국민적 관심사이고, 이 문제를 두고 정치인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까지 두 편으로 나뉘어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대결 국면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이런 판에 우리 못지않게 치열하게 이 문제를 고민해온 스페인 정부와 국민이 드디어 오랜 주저와 공포를 떨쳐버리고 우리보다 한발 앞서 문제 해결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고 하니 어찌 그 동기와 앞으로의 행로에 관심이 가지 않겠는가?

스페인의 현대사 역시 우리 못지않은 커다란 상처를 갖고 있다. 프랑코를 비롯해 소수 정치군인들의 쿠데타로 시작된 내전(1936~39년)에서 약 100만명이 전장 안팎에서, 혹은 그 여파로 희생되는 실로 참혹한 동족상잔의 비극을 경험했다. 이어 1939년 4월 프랑코가 이끄는 국민군쪽의 승리로 전쟁은 끝났지만 그 뒤 들어선 독재정권은 평화와 화해 대신 패자에 대한 철저한 탄압을 택하여, 국가보안법 등 이른바 ‘합법적’ 방식을 통해서만도 약 2만8천명의 목숨을 빼앗고, 그 외에도 수십만명을 투옥하고, 고문하고, 강제노동에 동원했다. 여기에 경찰이나 군인들의 초법적 폭력, 사적인 보복도 거의 아무런 제재 없이 자행됐다. 한마디로 폭력은 프랑코 독재 체제의 형성과 지속에서 필수 요소였으며, 동족에 대한 탄압은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혹심한 것이었다.

1975년 11월 프랑코가 죽은 뒤 스페인에서는 독재 체제 청산과 민주주의로의 이행이 시작된다. 그러나 그 과정이 당시 독재 체제의 붕괴나 단절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군부 등 독재 추종자들이 여전히 유력한 세력으로 존속하고 있는 상황에서 시작되고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 내용은 ‘타협에 의한 과거와의 단절’이었고, 구체적으로는 독재 체제를 해체하고 서구식 의회 민주주의를 도입하되, 점진적이고 쌍방 합의에 의해 진행시킨다는 것이었다.

망각을 대가로 민주주의를 얻었으나…

이 ‘합의에 의한 민주화’는 독재 체제의 청산과 민주주의로의 이행만을 얘기한다면 대성공이었다. 스페인의 민주주의로의 이행은 비교적 평화적으로, 그리고 신속하게 이루어졌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내용도 충실해져 오늘날 스페인의 민주주의 체제는 다른 서유럽 국가들과 비교하여 전혀 손색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 성공에는 대가가 필요했으니, 내전기와 프랑코 시대 동안 저질러진 엄청난 만행과 인권유린이 망각되고 만 것이 그것이다. 민주주의로의 이행기 동안 정치 지도자들 사이에서 ‘과거사 진상조사위원회’ ‘책임자 처벌’ 그리고 ‘피해자 보상’ 문제는 아예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오로지 ‘국민적 화해’만 얘기됐을 뿐이다.

이 국민적 화해를 위해 나름대로 의미 있는 몇 가지 조치가 있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과거 문제의 진정한 해결도, 불행한 과거의 청산도 아닌, ‘일단 덮어두기’일 뿐이었고, 학자들은 이를 ‘망각협정’이라는 말로 기술하고 있다. 군부 등 프랑코 독재 세력의 힘이 여전히 건재한 상황에서 과거 불법행위 당사자들의 처벌을 시도하는 것은 자칫 그들을 다시 정치판에 불러들임으로써 어렵게 진행해가던 민주화를 무산시킬 수 있었다. 따라서 어떻게든 그것만은 막아야겠기에 당시 정치 지도자들은 과거의 아픈 기억은 당분간 잊기로, 아니 잊은 척하기로 합의를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일시적이어야 할 망각협정의 효력은 너무나도 오랫동안 지속됐다. 1978년 민주헌법 제정 등을 통해 스페인에 민주주의가 정착된 지 4반세기가 훌쩍 지난 최근까지 그 어떤 정권도 망각을 깨뜨리고 기억을 되살리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4~5년 전까지도 내전과 독재정권 시대는 사법적 측면은 차치하고 학문적 측면에서도 건드릴 수 없는 금단의 영역이 돼왔다.

그런데 이제 스페인 정부가 이 두꺼운 망각의 껍질을 깨뜨리겠다고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것이다. 이 결정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물론 아니다. 그동안 피해 당사자들과, 특히 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좌파 세력이 이 문제를 공론화하고, 잊혀지는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끈질긴 노력을 해왔고, 그 결과 최근 몇년 사이에 이 문제들에 대한 연구물들이 쏟아져나오는 등 노력의 결과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고 있던 터였다.

중도좌파 정권은 거센 반대를 이겨낼까

2003년 11월에는 프랑코의 독재 체제를 탄생시킨 1936년 7월의 사건이 국회에서 정식으로 군부 쿠데타로 규정됐고, 내전과 그 직후 프랑코 체제에 의해 집단적으로 체포·살해되어 무더기로 묻힌 ‘실종자들’의 유해를 발굴해 그들의 신원을 확인하고 예를 갖추어 다시 묻어주는 것을 돕는 내용의 법령이 통과되어 현재 이 작업이 각 지방정부 차원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번 ‘위원회’의 탄생은 그러한 오래고 지난한 노력과 투쟁이 가져다준 소중한 성과라 하겠다.

어쨌든 이제 스페인은 불행한 과거 문제를 해결하고 진정한 의미의 국민적 화해를 이루려는 멀고도 험난한 여정의 커다란 첫걸음을 막 내디뎠다. 그러나 그 과정이 결코 순탄치 않을 것임은 분명하다. 우선 이번 결정으로 그간 묻혀 있던 인권유린의 진상이 하나둘씩 밝혀지면 자연히 불법행위의 책임자들 또한 드러날 것이기 때문에 아직 생존해 있는 당사자나 그 가족들의 반발이 거셀 것이고, 프랑코 독재 정권과 직·간접으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으면서 보수세력을 대변하고 있는 제1야당 국민당도 그동안의 태도로 보아 모든 방법을 동원해 이 과정을 저지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올 봄 새로 출범한 중도좌파 정권이 이들의 거센 반대를 극복하고 이 난제를 어떻게 해결해나갈 것인지, 그리고 우리가 본받을 만한 하나의 모범 사례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눈 크게 뜨고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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