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부 누리집(unikorea.go.kr)에는 ‘일일남북교류현황’이란 항목이 있다. 개성·금강산·기타 지역으로 나눠 북쪽 지역에 있는 남쪽 인원과 차량, 선박 등의 수치를 이틀치씩 비교해 공개한다. 4월26일치 자료를 보니, ‘개성 지역’에 체류 중인 남쪽 인원은 모두 176명, 차량 수는 532대다. 전날에 견줘 아무런 변화가 없는 수치다. 나머지 항목은 모두 ‘0’으로 표시돼 있다. 개성은, 남북관계의 마지막 보루인 게다. 적어도, 이날 오후 6시께 류길재 통일부 장관이 ‘대한민국 정부 성명’을 발표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보였다.
4월26일 오후 개성공업지구 입주기업 대표들이 서울 무교동 입주기업협회 사무실에서 개성공단 잔류 인원 전원 철수 결정을 뼈대로 한 류길재 통일부 장관의 성명 발표 모습을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보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오늘 북한은 우리 정부가 개성공단 문제 해결을 위해 공식적으로 제의한 당국 간 실무회담을 거부했습니다. 북한이 개성공단에 대해 통행을 차단하고, 근로자들을 일방적으로 철수시킴으로써 지난 10년 동안 운영돼온 개성공단 가동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북한의 부당한 조치로 개성공단에 체류하는 우리 국민들의 어려움이 더욱 커지고 있는바, 정부는 우리 국민 보호를 위해 잔류 인원 전원을 귀환시키는 불가피한 결정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류 장관이 발표한 이날 성명의 내용은 단호했다. 앞서 두 차례 대화 제의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북쪽이 개성공단 잠정폐쇄 조치를 발표한 지 사흘 뒤인 지난 4월11일 내놓은 성명에서 류 장관은 “개성공단 정상화는 대화를 통해 해결돼야 하며, 북쪽이 제기하기를 원하는 사안들을 논의하기 위해서라도 대화의 장으로 나오기를 바란다”고 에둘러 말했다. 4월25일엔 통일부 대변인 명의로 내놓은 성명에서 “개성공단 근무자들의 인도적 문제 해결과 개성공단 정상화를 위한 책임 있는 남북 당국 간 실무회담 개최를 공식 제의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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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겨보면, 첫 번째 대화 제의는 ‘모호’했다. ‘대화의 장’으로 나오란 말은, ‘대화 제의’이기도 했지만 그간의 ‘원칙’을 재확인하는 것이기도 했다. 두 번째 대화 제의는 더 구체적이었지만, 대신 ‘조건’이 붙어 있었다. “북한이 이번에 우리 쪽이 제의하는 당국 간 회담마저 거부한다면, 우리로서는 중대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밝혀둔다”는 ‘경고’였다. 정부는 ‘4월26일 오전까지 입장을 회신해달라’며 시한까지 못박았다. 호의적인 반응을 기대할 수 있었을까? 북쪽의 반응은 이날 오후 2시15분께 을 통해 전달됐다.
국방위원회 정책국 대변인 담화 형태로 발표한 ‘회신’에서 북쪽은 사뭇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개성공단을 ‘6·15 통일 시대의 고귀한 전취물’이라고 평가하면서도,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종말의 시간을 앞두고 있다’고 표현했다. “(지금까지는) 남쪽 인원들에 대한 강제 추방과 개성공업지구 완전 폐쇄와 같은 중대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의 노력과 인내력은 한계에 부닥치게 됐다”고도 썼다. 그러곤 이렇게 덧붙였다.
“그처럼 개성공업지구에 남아 있는 인원들의 생명이 걱정된다면 식자재가 쌓여 있고 의료보장 대책이 세워져 있는 남측으로 모든 인원들을 전원 철수하면 될 것이다. 철수와 관련하여 제기되는 신변 안전 보장 대책을 포함한 모든 인도주의적 조치들은 우리의 유관기관들에서 책임적으로 취해지게 될 것이다. …(남쪽이) 현실을 외면하고 계속 사태의 악화를 추구한다면 우리가 먼저 최종적이며 결정적인 중대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애써 찾아보면, 한 가닥 ‘희망의 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북쪽은 담화문의 앞부분에서 “대화 제의가 진정이라면, 그것을 실천행동으로 입증해 보여야 한다”고 적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4시간 남짓 만에 정부가 내놓은 ‘실천행동’은 ‘잔류 인원 전원 귀환 결정’이었다. 한 외교안보 전문가는 “남과 북 양쪽 모두 개성공단 폐쇄의 책임을 서로에게 떠넘기고 싶어 하는 모습을 보여왔다”며 “남쪽의 대화 제의에 대한 북쪽의 반응이나, 북의 대화 거부에 대한 남쪽의 반응은 한마디로 서로에게 신경질을 부리는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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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신경질’ 속에, 10년 세월 ‘옥동자’로 키워온 개성공단이 뿌리부터 말라가고 있다. 이미 개성공단에 진출한 123개 기업 대부분이 지난 4월8일 북쪽이 잠정폐쇄 조치를 내린 이후 지금까지 적게는 몇억원에서 많게는 50억원 이상씩 손실이 쌓이고 있다. 문제는 사태의 장기화다. 거래처의 주문은 줄줄이 끊기고, 일부 원부자재 납품업체들도 납기 일정 불확실성을 이유로 공급을 꺼리기 시작했단다.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는 한 개성공단 입주기업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지난 4월8일 공단 잠정폐쇄 조치 이후) 납기를 맞추지 못해 발생한 손실과 영업이익 감소에 따른 손실, 복귀 직원 임금과 거래처의 클레임 청구 등 유형적인 피해만도 지금까지 15억원대다. 영업권 차단과 계약 파기, 거래처 불신 등으로 인한 무형적인 피해는 산정조차 불가능하다. 납기를 맞추지 못해 20여 개 거래처 전체를 상대로 읍소만 하고 다니는 형편이다. 남쪽에서 대체 생산도 할 수 없는 터라, 약 300억원대에 이르는 전체 계약고가 불안한 상태다.”
기실 정부의 잔류 인원 철수 방침이 나오기 전부터, 이미 개성공단의 ‘신뢰도’는 곤두박질을 치고 있었다. 지난 10년여 세월 동안 개성으로 향하는 길이 이번처럼 오래도록 막힌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박용만 녹색섬유 대표는 이런 상황을 두고 “더는 체력이 없다”는 말로 표현했다. 그의 설명을 들어보자.
“바이어를 만나서 물량을 달라고 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시장 메커니즘이란 게 물건을 사고파는 것인데, 지금 공단 입주업체들은 가격 협상력 면에서 완전히 무장해제된 상태다. 개성공단에서 사업을 벌인 게 ‘원죄’가 돼, 적절한 가격으로 거래를 성사시킬 수가 없다. 이제 개성공단 입주업체 대다수는 납기 불안을 이유로 가격을 깎아줘야 할 처지로 내몰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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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공단 입주기업 전체가 살얼음판을 걷고 있지만, 특히 패션·의류 업체의 타격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계절을 놓치면, 완제품은 물론 원부자재마저 소용없어지는 업계의 생리 탓이다. 의류업체 ‘가드뱅크’의 박재기 대표는 “이미 올 가을·겨울철을 겨냥한 의류 수주가 불발되면서 30억원가량의 손실이 불가피해졌다”고 밝혔다. 여성 속옷과 스포츠웨어 전문업체인 ‘나인JIT’의 이희건 대표가 “(공단 가동 재개를) 기다리는 정도가 아니라, 갈망하는 수준”이라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개성가는 길 /한겨레 김명진 기자
“의류업체는 시기를 놓치면 피해가 엄청나게 늘어난다. 현재까지 산출한 피해 규모는 제품만 따져 소비자가격으로 50억원, 원가로 따져도 25억원 이상이다. 5월 초까지만이라도 통행이 재개되면 피해는 확 줄어들 수 있다. 계속 막혀 있으면, 대체 생산을 해야 한다. 원부자재 수급도 다시 해야 하고, 생산비용도 다시 투자해야 한다. 초기 시설투자비 400만달러를 빼고도, 이번 폐쇄 조치로 인한 손실액만 지금까지 40억원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제조업체들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김철영 ‘성화물산’ 대표는 “개성공단에 보관 중인 32억원대 규모의 원부재자를 빼고도, 지금까지 발생한 손실만 50억원대로 추정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른바 ‘산업 연관 효과’가 큰 제조업체들의 가장 큰 고민은 원부자재를 납품받는 협력업체들이다. 북쪽 노동자 700명을 고용해 지난해 모두 340만달러 규모의 임가공 제품을 생산한 성화물산만 해도, 원부자재를 납품하는 협력업체만 145개, 기타 협력업체까지 합하면 298개에 이른단다. 김 대표는 “협력업체들과 한 해 거래하는 금액도 350억원대에 이른다”고 밝혔다. 개성길이 아예 막히면, 이들 업체 모두가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을 터다.
생산 중단과 납품 연기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입주기업들이 호소하는 ‘발등의 불’은 자금 압박이다. 기업 신인도가 떨어지면, 금리는 반사적으로 오르기 마련이다. 이는 다시 자금 압박을 부르는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어낸다. 한 입주기업 대표는 “잠정폐쇄 조치 이후 정부가 입주기업 지원 대책을 내놓고는 있지만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한다”며 “자금 압박을 풀려면 직접적인 경영자금 지원이 절실한데도, 신용대출만 강요하고 있다”고 말했다.
역시 익명을 요구한 한 전자업체 대표는 “정부 차원의 지급보증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급히 대출을 받으려고 해도, 은행에선 담보를 요구한다. 하지만 개성공단 입주기업들은 자산 대부분이 개성에 묶여 있어 담보물이 마땅치 않다. 답답한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입주기업 대표자들은 “잠정폐쇄 조치가 해제되고 재발 방지 대책이 마련되면 장기적으로 개성공단에서 사업을 키워보고 싶다”고 말했다. 개성공단의 ‘가격(임금) 경쟁력’엔 의문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지리적으로도 가까워 생산 당일 반출입이 가능한데다, 통관·물류 비용도 적다.
“공장이 거기(개성에) 있는데, 장기적으로 사업을 키워나갈 다른 계획을 세울 이유가 뭔가?” 정부의 잔류 인원 전원 철수 방침이 발표되기 전 향후 사업계획을 묻는 질문에 한 입주업체 대표는 이렇게 되물었다. 북쪽 노동자 700명가량을 고용한 그가 지난해 올린 매출은 120억원대에 이른단다. 한 신발업체 대표는 ‘가장 절실한 정부의 지원 대책이 뭐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공단 재가동”이라고 답했다. “인력과 임금, 물류와 기반시설 등 모든 면에서 개성공단은 남쪽에 판매시장을 가지고 있는 제조업체를 운영하기에 가장 적합한 지역”이라는 게다.
그래서다. 개성공단 입주 기업인들은 “이번 기회에 개성공단을 외풍에 휘둘리지 않은 경제특구화하는 방안을 놓고 남북이 머리를 맞대면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가능성이 아예 없는 소리도 아니다. 이미 여당 내부에서도 똑같은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터다.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최고위원은 지난 4월26일 오전 서울 중구 국가인원위원회 8층 배움터에서 열린 제3회 북한인권사랑방 모임에 참석해 “비 온 뒤에 땅이 더 굳듯이 개성공단을 취약한 시스템으로 남겨놓을 것이 아니라, 이번에는 더 강화된 확실한 보장이 이행되는 국제경제특구로 격상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답’은 정해져 있는 셈이다.
“(이번 사태는) 기업의 잘못으로 발생한 문제가 아니다. 기업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개성공단을 움직이는 실질적인 주체는 기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기업은 뒷전으로 밀려 있고, 그로 인해 발생한 손실을 기업이 100% 안고 가야 한다. 기업이 없으면, 개성공단도 없다.” 2005년 입주했다는 한 중견업체 대표는 이렇게 지적했다.
정기섭 ‘에스엔지’ 대표도 비슷한 생각이다. 그는 아예 남과 북 당국을 향해 이렇게 호소했다. “정부는 북 당국이 정치·안보 상황에 따라 언제든 개성공단을 어렵게 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더 이상 개성공단 입주기업들이 북 당국의 일방적 조치에 생사를 맡겨야 하는 상황을 끊어야 한다. 개성공단은 남북한 화합과 공영의 마중물이다. 북쪽과 평화 공존의 토대를 마련해달라. 북쪽에도 호소한다. 개성공단 입주기업을 남쪽 당국에 대한 압박 수단으로 삼지 마시라. 압박 효과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남과 북의 거친 공방 속에 오는 6월 말로 착공 10돌을 맞는 개성공단이 생사의 기로에 섰다. 개성공단 폐쇄의 책임을 떠안지 않으려고 서로를 향해 삿대질만 해대는 것은 남이나 북이나 마찬가지다. 막힌 길을 어서 뚫지 않으면, 공단은 스스로 수명을 다할 수밖에 없을 터다. 시간이 많지 않다.
“이젠 소회고 뭐고도 없다. 어쩌면 이게,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어쩔 수 없는, 나라의 운명….” 북쪽의 대화 제의 거부와 남쪽의 잔류 인원 전원 철수 방침이 잇따라 터져나온 4월26일 저녁, 정세현 원광대 총장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게 깔려 있었다. 김대중 정부 말부터 노무현 정부 초기까지 통일부 장관을 연임하며, ‘남북관계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정 총장은 이렇게 탄식했다.
“남북관계 개선이 북에 끌려가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정권을 맡는 게 국운이라면, 유연하게 대화로 문제를 풀어가는 것을 북에 끌려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수준의 사람들이 정책 결정 선상에 있다면, 그런 시대라면, 어찌할 수 있겠나. 운명인데, 포기해야지. …이젠, ‘통일’이란 단어를 쓸 자격이 있는지 우리 스스로 자문할 때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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