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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잠들지 못하는 희망

상처 치유하려 김포 용화사 찾은 쌍용차 해고자 세 가족… 절망의 터널에서 빠져나오려 서로를 위하며 안간힘 쓰는 노동자들
등록 2011-07-15 16:01 수정 2020-05-03 04:26
경기도 김포 용화사에서 저녁 예불을 드리는 쌍용차 해고자들과 그들의 가족. 한겨레21 김경호

경기도 김포 용화사에서 저녁 예불을 드리는 쌍용차 해고자들과 그들의 가족. 한겨레21 김경호

지난 7월1일 쌍용자동차 해고자인 신동기씨, 최성국씨, 허종석(가명)씨네 세 가족 13명이 경기도 김포 용화사를 찾았다. 쌍용자동차 해고자와 가족들이 잇달아 목숨을 끊어, 그들을 걱정하고 연대하길 원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참이다.

쌍용차 노동자의 시계는 뒤로 가고 있다. 2011년 4월 노동환경건강연구소와 금속노조가 발표한 쌍용차 노동자 정신건강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쌍용자 노동자 가운데 52.3%가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겪고 있고, 80%는 중등도 이상의 우울 증상을 보이는 것으로 확인됐다. 2년 전인 2009년 9월 같은 단체가 조사한 결과와 비교해보면 PTSD는 42.8%에서 52.3%로, 중등도 이상 우울 증상자는 71%에서 80%로 높아졌다. 쌍용차 노동자들의 정신건강이 그만큼 나빠졌다는 뜻이다.

“너무 힘들다, 죽을 것 같다”

용화사를 찾은 첫날, 그들이 김포 용화사 주지인 지관 스님께 물었다. “스님 우리가 겪는 고통은 누구의 업보입니까?” 스님이 답했다. “우리 모두가 지은 공업(共業)입니다.”. 용화사에 머문 둘쨋날 쌍용자동차 파업 현장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상영회가 있었다.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안 돼서 신동기씨가 자리를 떴다. 경찰특공대 진압 장면에 이르러서 최성국씨가 뛰쳐나갔다. “너무 힘들다, 죽을 것 같다.” 그들은 경련을 일으켰다. 해고와 극단적인 폭력에 노출된 지 2년, 배상도 치료도 없이 지낸 시간이다. 폭력의 기억은 시간이 흐른다고 잊혀지는 게 아니었다. 이들이 상처를 추스르려고 용화사에 머문 2박3일은 방송사 비정규직 PD 12명이 제작하고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 에 고스란히 담길 것이다.

최성국씨는 허리가 불편하지만, 구속되고 입원하느라 아이들을 못 봤던 시간을 채우기에 바쁘다(왼쪽 사진). “우리 허리를 펴자.” 이윤미씨는 올해 초 정혜신 박사의 심리상담을 받고 긴 마음의 터널을 벗어났다. 한겨레21 김경호

최성국씨는 허리가 불편하지만, 구속되고 입원하느라 아이들을 못 봤던 시간을 채우기에 바쁘다(왼쪽 사진). “우리 허리를 펴자.” 이윤미씨는 올해 초 정혜신 박사의 심리상담을 받고 긴 마음의 터널을 벗어났다. 한겨레21 김경호

2009년 8월5일. 경찰특공대가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에 진입한 날, 쌍용차에 삶을 기대고 있던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모든 것이 부서졌다. 그날 최성국씨는 만신창이가 되어 나왔다. 도장공장 옥상에 피비린내가 넘쳐났다. 경찰특공대 여럿이 달려들어 한 사람을 마구잡이로 때렸다. 팔과 다리가 시퍼렇게 부어올랐고, 고무총탄에 맞은 곳들은 더 깊이 파였다. 최씨는 그길로 충남 아산경찰서로 잡혀갔다. 조사받다가 기절했다. 병보석이 되어 간수에게 업혀서 나왔다. 1년 넘게 휠체어에 무너져가는 몸을 기댔다. 몇 달 전에야 가까스로 걸을 수 있게 됐지만, 손마디는 여전히 아리다. 허리 통증이 심술을 부리면, 아내 설경애씨는 눈물과 빰이 범벅이 되어 남편 최씨의 팔다리를 주무르고 쓰다듬는다. 부부는 그렇게 지새는 날이 많다.

아내 설경애씨는 경찰의 강제진압이 있기 전인 2009년 5월20일 아이 둘을 데리고 농성자 가족들과 회사 앞에 천막을 쳤다. 그해 6월26일부터는 아이들을 아침이면 어린이집에, 저녁이면 이웃에 맡겼다. 밤마다 ‘그들’의 괴롭힘이 반복됐다. 시커멓게 늘어선 전투경찰들은 공장 안 농성자들이 못 자도록 방패를 치며 땅을 흔들었다. 확성기로 고막을 찢으려 했다. 헬리콥터가 떴다. 물도 음식도 없는, 고립된 공장 안에서 남편의 속이 타들어가고 있겠구나, 경애씨의 속도 썩어 문들어졌다. 짧은 여름밤이 길게만 느껴졌다. 2011년 7월, 지금도 남편은 경찰차 사이렌 소리만 들려도 눈자위에 실핏줄이 돋는다. 아내는 안다. 남편이 경찰만 보아도 힘줄이 튀어나오도록 주먹을 쥔다는 사실을. 그때마다 아내는 먹먹하게 되뇐다. “잊자, 우리 잊자.” 남편의 손을 맞잡아주는 것말고 할 수 있는 게 없다.

처음엔 남편이 나섰다. 이젠 ‘해고자 전원 복직’에 아내가 더 열심이다. 한겨레21 김경호

처음엔 남편이 나섰다. 이젠 ‘해고자 전원 복직’에 아내가 더 열심이다. 한겨레21 김경호

가물거리는 희망

최성국씨와 설경애씨는 고향인 전남 순창에서 18살·16살 때 만났다. 쌍용자동차에 입사하고 아들딸을 낳고 평택에 집 한 칸 장만했을 땐 남부러울 게 없었다. 그날 이후, 목숨과도 같던 집을 팔았다. 생활비를 댈 수입이 없기 때문이다. 80kg의 건장한 체구로 눈에 띄는 외모 덕에 파업 현장에서 카메라 세례를 받았던 남편은, 지금은 아내 몰래 아이들에게 양말 꿰매는 법을 가르친다. 한푼이라도 아껴야 한다는 건 아이들도 안다. 최씨는 몸만 추스르면 ‘3D(Difficult·Dirty·Dangerous) 업종’이건 뭐건 일하고 싶다. 재봉일을 나가는 아내를 지켜보는 건 최씨에게 고문이다. 아이들 앞에서도 자존감을 느끼고 싶고, 거울 속의 비웃는 표정의 표정에서도 벗어나고 싶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는 최씨가 지금 PTSD를 앓고 있다고 추정한다. 고문 피해자들처럼 국가 폭력에 의해 극도의 공포와 자존심이 바닥까지 허물어졌던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앓게 되는 질환이다.

용화사 주변을 함께 걷는 쌍용차 해고자들과 그들의 가족. 한겨레21 김경호

용화사 주변을 함께 걷는 쌍용차 해고자들과 그들의 가족. 한겨레21 김경호

쌍용차 해고자들은 집단적인 PTSD를 앓고 있다. 신동기씨는 휘발유를 끼얹어 죽으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는 원래 정리해고 대상자가 아니었다. 파업이 끝난 뒤 2009년 12월10일 해고 통지를 받았다. “회사는 제가 선전·선동을 주도했고 폭력행위를 했다고 합니다. 저는 선전·선동이 뭔지도 몰랐고 함께 살자고 했을 뿐인데 밖으로 쫓겨났습니다.” 2010년 정월 초하룻날 집안 어른은 해고당한 그를 “빨갱이”라 불렀다. 순해도 너무 순해 제 밥그릇이나 찾아 먹을까 걱정했던 아들이 쌍용차에 자리잡았다고 기뻐하던 부모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다. 세 아이를 임신했을 때 통닭 1마리 못 사먹은 아내에게 했던 ‘고기 많이 사주겠다’던 약속을 지금은 지킬 수 없다. 그들 부부는 어딜 가든 마지막 남은 생활비 200만원이 담긴 통장을 들고 다닌다. 세 아이와 함께 새 삶을 일굴 마지막 남은 마중물이기 때문이다. 용역들이 가족의 천막을 부순 날 이후, 아내 이윤미씨는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부부에게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들어가지 못하는 일터를 쳐다보며 사는 건 고문이었다. 하루 종일 혼자 틀어박혀 인터넷 검색 사이트에서 ‘쌍용’을 누르고 또 눌렀다. 희망이 담긴 소식은 어디에도 없었다. 남편들이 자살이 두렵지 않다고 말할 때, 아내들은 애써 외면하며 ‘나도 마찬가지’라고 속으로 답했다. 사는 게 죽는 것보다 어려운 세월이다.

“몸과 마음을 예전처럼 회복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원하는 최성국씨. 한겨레21 김경호

“몸과 마음을 예전처럼 회복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원하는 최성국씨. 한겨레21 김경호

노동조합과 연락을 끊은 사람들의 문제는 더 심각하다. 아침에 갑자기 노동조합 활동가의 전화가 오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또 누가 죽었구나.’ 정직 처분을 받은 사람들 중엔 매일 아침 무작정 회사로 출근하는 이도 많다. 그들은 공장이 분주해지면 기숙사에 틀어박힌다. 점심시간이 되면 방에서 몰래 컵라면을 먹는다. 돈도 떨어져서 달리 갈 곳이 없다. 해고도 아니고 정직인데 곧 불러주겠거니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지낸 게 벌써 2년이다. 그사이 회사는 비정규직 수십 명을 새로 충원했다.

허종석(가명)씨 부인 김정숙씨는 파업이 한창일 때 아이 둘을 데리고 컨테이너에서 77일을 버텼다. 아이들은 컨테이너에서 새우잠을 자고 학교에 갔다. “우리 아빠는 살아남았는데요. 해고된 사람들과 같이 하다가 징계를 받았어요.” 민아(12·가명) 말처럼 아이들은 모두 안다. 평택엔 살아남은 자와 죽은 자가 있다. 김정숙씨는 아이를 업고 다른 엄마들과 함께 경기도 평택시가 지역구인 한나라당 소속 국회의원을 찾아간 일이 있었다. 우리 이야기를 한 번만 들어달라고 했지만 만나주지 않았다. 경찰을 불러 그들을 쫓아냈다.

퇴직금을 털어 치킨집이나 피자집을 차린 해고자들도 있었다. 그들이 퇴직금을 모두 날리는데는 딱 석 달이면 족했다. 있던 가게들도 줄줄이 문을 닫는 판이었다. 3천 명이 자신의 일터에서 쫓겨난 도시는 먹는 일도 잊은 듯했다. 평택을 떠난 사람도 있었다. 다시 취업한 곳이 유성기업 아산공장이었다. ‘잠 좀 자면서 일하고 싶다’며 24시간 맞교대제를 주간 교대제로 바꿔달라고 회사 쪽에 요구했다가 노동자들이 봉변을 당하고 있는 바로 그 사업장이다. 하필 쌍용차에서 대치했던 용역과 다시 얼굴을 마주쳤다. 그제야 사람들은 깨달았다. 자리를 피한다고 삶이 달라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힘겨울수록 서로 돕는 노동자들

김정숙씨는 파업 투쟁을 겪고는 남편과 함께 한 진보정당에 가입했다. 남편은 일용직으로 일하고 아내는 장애인 도우미로 일하는 처지에 당원 활동은 꿈도 못 꾸지만, 당원회비로 낸 돈이 ‘우리 같은 사람’에게 가겠거니 하는 상상으로 행복하다. 수입이 없는 신동기씨 통장에서도 매달 자동이체로 빠져나가는 돈이 있다. 매달 10여 건씩 다른 단체로 돈을 보내는 해고자들도 있다. 그 단체나 다른 해고자들이 다시 또 돈을 보낸다. 결국 돌고 도는 일이 많다. 그 돈이 그 돈이 되더라도 많은 해고자들은 보잘것없는 한 달 생활비를 나눈다.

템플스테이 둘쨋날, 해고자 가족들이 울력에 열심이다. 한겨레21 김경호

템플스테이 둘쨋날, 해고자 가족들이 울력에 열심이다. 한겨레21 김경호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이창근 기획실장은 “만약 한진중공업이 잘 풀리면 그다음 희망 버스는 대기업 쌍용이 아니라 중소기업인 유성기업으로 먼저 보내자”고 민주노총 활동가들을 설득한다. 용화사 템플스테이가 시작되던 7월1일, 쌍용차의 다른 해고자 5명은 한진중공업 노동자 대규모 정리해고 철회를 촉구하며 평택에서 부산까지 천릿길 행진을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이제 안다. 절망의 터널에서 빠져나오는 길을. 아무리 힘겨워도 서로를 보듬고 위하려 안간힘을 쓰는 길뿐이라는 것을.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글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경기도 김포 용화사에 수련이 피었다. 한겨레21 김경호

경기도 김포 용화사에 수련이 피었다. 한겨레21 김경호

경기도 김포 용화사에서 예불을 드리는 쌍용차 해고자들과 그들의 가족. 한겨레21 김경호

경기도 김포 용화사에서 예불을 드리는 쌍용차 해고자들과 그들의 가족. 한겨레21 김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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