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가 노랗게 익었네요.”
“황금 들판이란 말이죠?”
“하늘이 매우 파랗네요.”
“감까지 잘 익었다니 정말 예쁘겠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설명하는 자원봉사자들과 궁금함을 참지 못해 연방 질문을 던지는 시각장애인들의 목소리는 김명균 문화유산해설사가 설명을 시작하자 곧 멈췄다. “이곳 무우정은 조선 인조 때 석학 우담 채득기 선생이 은거하며 학문을 닦던 곳입니다.” 지그시 눈을 감고 김 해설사의 설명을 듣는 시각장애인들의 얼굴에는 진지함이 묻어났다.
시각장애인의 권익 옹호와 복지 증진을 위해 제정된 ‘흰지팡이의 날’을 하루 앞둔 10월14일, 시각장애인 15명과 자원봉사자 12명이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의 버스를 타고 경북 상주 경천대를 찾았다. 복지관이 올해 네 번째로 준비한 ‘고적 답사’ 프로그램이다.
눈이 시리게 파란 하늘과 하얀 백사장, 굽이쳐 흐르는 강물을 따라 끊어질 듯 이어지는 산줄기 아래 펼쳐진 황금 들판을 보는 순간 이곳이 낙동강 1300리 물길 중 가장 아름다워 ‘낙동강 제1경’으로 불린다는 말이 허투루 생긴 게 아님을 알겠다. 소나무 사이로 불어온 바람이, 여전히 따가운 가을 햇살에 배어난 이마의 땀을 씻어준다.
그런데 앞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들이 ‘고적 답사’라니, 이들은 무엇을 어떻게 보고 기억한다는 것일까?
“비장애인들은 사진으로 추억을 남기지만 우리 시각장애인들은 ‘이야기’로 추억을 남겨요. 그 지역의 유래나 문화재에 대한 설명을 바람결에 실려와 몸에 닿는 독특한 느낌과 함께 기억 창고에 넣어둡니다. 각 지역마다 독특하게 느껴지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무엇’이 있어요.”
이희규(52)씨의 설명을 들으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비장애인들도 시간이 지나면 눈으로 본 풍경은 기억에서 희미해지고 사진 속에 남은 경치만 추억할 따름이지 않은가? 그래, 여행을 통해 무엇인가를 느끼는 것이 중요하지! 건성건성 둘러보며 아무것도 마음속에 느끼지도, 가슴속에 남기지도 못하고 사진만 찍고 돌아오는 여행을 하는 사람들보다 이들의 여행이 훨씬 알차지 않은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공을 세운 정기룡 장군의 위패를 모신 충의사를 둘러보고 상주자전거박물관에서 다양한 형태의 자전거를 직접 만져본 이들은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모두들 만족한 표정이었다. “다음에 또 왔으면 좋겠어요.”
상주=사진·글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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