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엔 팔에 시계를 찬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다. 초등학생들도 “아저씨, 지금 몇 시예요?”라고 묻는 대신 주머니 속에서 휴대전화를 주섬주섬 꺼내어 시간을 본다. 중학교 입학 선물 1호로 몇십 년 동안 굳건한 자리를 차지했던 시계, 팔에 차는 것 자체가 자랑이던 시계는 이제 입학 선물 순위 안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r%!^n 시계산업이 사양길이면 시계를 수리하는 일 또한 마찬가지일 텐데, 이 일을 40여 년 동안, 그것도 대를 이어서 하는 사람이 있다. 시계수리의 명장 이희영(53)씨와 그의 아들 둘이 그들이다. 둘째며느리도 같은 일을 하고 있다.
%!^r%!^n 시계수리가 사양길이 아니냐고 묻자 이씨는 고개를 젓는다. “디지털 시대지만 아직도 아날로그 마니아들은 있어요. 또 명품 시계가 늘어 웬만한 기술로는 못 고치는 시계가 많아지면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고 할까요?”
%!^r%!^n 이씨는 어려서부터 기계를 좋아했다. 자전거, 자명종 할 것 없이 일단 기계처럼 생긴 것만 있으면 무조건 다 뜯어봐야 직성이 풀렸다고 한다. “형님이 중학교 입학 기념으로 새 시계를 선물해줬지. 째깍째깍 돌아가는 소리에 가만히 있지 못하겠더라고.” 이씨는 선물을 받자마자 시계를 죄다 뜯어봤다. 부모님한테서 불벼락이 떨어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r%!^n 그 뒤 이씨는 학교가 끝나면 집에 가지 않고 학교 앞 시계수리점 유리창에 딱 붙어 앉아 뚫어지게 시계만 봤다. 오묘한 시곗바늘에 취해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공부하는 길로 나가길 바란 부모님도 이씨의 의지를 존중해줬다. 결국 고교 진학을 포기하고 대구의 시계점에 취직했다.
%!^r%!^n “친구들은 학교에 진학했지만 전혀 부럽지 않았어요. 난 좋아하는 일을 맘껏 할 수 있어서 행복했죠. 낮에는 조수라 어깨너머로 배울 수밖에 없어 남들이 퇴근한 뒤 혼자 남아서 시계를 뜯어보고 조립하는 일을 수십 번도 더 했어요. 새로운 시계가 들어오면 밤에 혼자 몰래 뜯어보기도 하고.”
%!^r%!^n 이씨의 남다른 열정은 1976년 기능사 자격시험 1급 시계수리 부문에 역대 최연소인 21살의 나이로 합격하면서 빛을 본다. “그 시절 기능사는 합격자 명단을 뉴스에서 발표했을 정도로 대단한 자랑거리였습니다. 버스 타고 가는데 내 이름이 라디오에서 나오더라고요. 얼마나 기쁘던지….”
%!^r%!^n 경제가 발달하고 사람들이 패션에 눈뜨게 된 1980년대로 들어서자 시계를 차는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기 시작했다. 덩달아 이씨가 하는 일도 황금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기계식 시계가 좀처럼 고장나지 않는 전자식 시계로 바뀌면서, 또 80년대 후반에 물밀듯 들어온 홍콩의 저가 시계 때문에 이씨의 일은 점점 줄어들었다. %!^r%!^n “시계가 싸니까 고장나면 그냥 버리고 새로 사는 겁니다. 같이 일하던 사람들도 많이 그만뒀죠. 가게 문도 많이 닫고.”
%!^r%!^n 이씨도 시계수리를 그만둘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좋은 기술을 썩히는 게 아까워서 계속 이 길을 걷기로 마음먹었다. 지금은 패션시계나 고가의 명품시계들 중심으로 수리하는 물량이 늘었다. 명성을 듣고 전국에서 택배로 부쳐오는 시계도 많다. 부모님이 차던 예물시계를 고쳐달라는 사연과 함께 배달된 몇십 년 된 시계를 볼 때면 과거의 기억들이 떠올라 웃음짓기도 한다. 대구=사진·글 윤운식 기자 yws@hani.co.kr%!^r%!^n
팔에 차는 것 자체가 자랑이던 시계는 이제 입학 선물 순위 안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시계산업이 사양길이면 시계를 수리하는 일 또한 마찬가지일 텐데, 이 일을 40여 년 동안, 그것도 대를 이어서 하는 사람이 있다. 시계수리의 명장 이희영(53)씨와 그의 아들 둘이 그들이다. 둘째며느리도 같은 일을 하고 있다.
시계수리가 사양길이 아니냐고 묻자 이씨는 고개를 젓는다. “디지털 시대지만 아직도 아날로그 마니아들은 있어요. 또 명품 시계가 늘어 웬만한 기술로는 못 고치는 시계가 많아지면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고 할까요?”
이씨는 어려서부터 기계를 좋아했다. 자전거, 자명종 할 것 없이 일단 기계처럼 생긴 것만 있으면 무조건 다 뜯어봐야 직성이 풀렸다고 한다. “형님이 중학교 입학 기념으로 새 시계를 선물해줬지. 째깍째깍 돌아가는 소리에 가만히 있지 못하겠더라고.” 이씨는 선물을 받자마자 시계를 죄다 뜯어봤다. 부모님한테서 불벼락이 떨어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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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이씨는 학교가 끝나면 집에 가지 않고 학교 앞 시계수리점 유리창에 딱 붙어 앉아 뚫어지게 시계만 봤다. 오묘한 시곗바늘에 취해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공부하는 길로 나가길 바란 부모님도 이씨의 의지를 존중해줬다. 결국 고교 진학을 포기하고 대구의 시계점에 취직했다.
“친구들은 학교에 진학했지만 전혀 부럽지 않았어요. 난 좋아하는 일을 맘껏 할 수 있어서 행복했죠. 낮에는 조수라 어깨너머로 배울 수밖에 없어 남들이 퇴근한 뒤 혼자 남아서 시계를 뜯어보고 조립하는 일을 수십 번도 더 했어요. 새로운 시계가 들어오면 밤에 혼자 몰래 뜯어보기도 하고.”

작은 가게의 한쪽에 이씨와 등지고 앉아 열심히 현미경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있다. 어려서부터 어깨너머로 아버지 일을 배우던 첫째아들 윤호(32)씨다. “맏이는 날 닮아서 할 줄 알았어요. 그냥 말없이 하는 게 나랑 비슷하거든. 근데 인호(둘째아들)까지 이 일을 할 줄은 몰랐어요.” 둘째아들 인호(30)씨도 구미에 가게 분점을 차렸다. 시계수리 주문을 인터넷으로 접수하는 일도 담당하고 있다.
%!^r%!^n “아버지가 명장이시니까 쉽게 가는 장점도 있어요. 너무 난해하면 아직도 아버지께 달려와서 도움을 요청하곤 하죠.” 해맑게 웃는 인호씨는 이날도 아버지가 있는 대구까지 몇 개의 시계를 들고 와서는 겸연쩍게 내민다.
%!^r%!^n “아버지를 보면 모든 굴곡을 이긴 장인의 모습이 느껴져요. 저 같으면 진작에 포기했을 거 같은데요.”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첫아들도 이미 장인의 경지에 오른 듯하다. 맏아들의 기술력을 묻는 질문에 아버지는 몰래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면서 조용히 말한다.
%!^r%!^n “어유, 잘해요. 내가 인정할 수 있어요. 쟨 원래 소질이 있었거든. 이젠 가게를 맡겨도 불안하지가 않아요.”
%!^r%!^n 이씨는 지난 2001년 시계수리에 대한 탁월한 기술을 인정받아 우리나라에서 단 4명뿐인 시계수리의 명장으로 지정됐다. 조건에 굴하지 않고 한 가지 일만 고집해온 장인의 기술력은 대를 이어 내려오면서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대구=사진·글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이씨의 남다른 열정은 1976년 기능사 자격시험 1급 시계수리 부문에 역대 최연소인 21살의 나이로 합격하면서 빛을 본다. “그 시절 기능사는 합격자 명단을 뉴스에서 발표했을 정도로 대단한 자랑거리였습니다. 버스 타고 가는데 내 이름이 라디오에서 나오더라고요. 얼마나 기쁘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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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가 발달하고 사람들이 패션에 눈뜨게 된 1980년대로 들어서자 시계를 차는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기 시작했다. 덩달아 이씨가 하는 일도 황금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기계식 시계가 좀처럼 고장나지 않는 전자식 시계로 바뀌면서, 또 80년대 후반에 물밀듯 들어온 홍콩의 저가 시계 때문에 이씨의 일은 점점 줄어들었다. 가게도 많이 문을 닫았다.
이씨도 시계수리를 그만둘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좋은 기술을 썩히는 게 아까워서 계속 이 길을 걷기로 마음먹었다. 지금은 패션시계나 고가의 명품시계들 중심으로 수리하는 물량이 늘었다. 명성을 듣고 전국에서 택배로 부쳐오는 시계도 많다. 부모님이 차던 예물시계를 고쳐달라는 사연과 함께 배달된 몇십 년 된 시계를 볼 때면 과거의 기억들이 떠올라 웃음짓기도 한다.
작은 가게의 한쪽에 이씨와 등지고 앉아 열심히 현미경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있다. 어려서부터 어깨너머로 아버지 일을 배우던 첫째아들 윤호(32)씨다. “맏이는 날 닮아서 할 줄 알았어요. 그냥 말없이 하는 게 나랑 비슷하거든. 근데 인호(둘째아들)까지 이 일을 할 줄은 몰랐어요.” 둘째아들 인호(30)씨도 구미에 가게 분점을 차렸다. 시계수리 주문을 인터넷으로 접수하는 일도 담당하고 있다.

대구=사진·글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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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명장이시니까 쉽게 가는 장점도 있어요. 너무 난해하면 아직도 아버지께 달려와서 도움을 요청하곤 하죠.” 해맑게 웃는 인호씨는 이날도 아버지가 있는 대구까지 몇 개의 시계를 들고 와서는 겸연쩍게 내민다.
“아버지를 보면 모든 굴곡을 이긴 장인의 모습이 느껴져요. 저 같으면 진작에 포기했을 거 같은데요.”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첫아들도 이미 장인의 경지에 오른 듯하다. 맏아들의 기술력을 묻는 질문에 아버지는 몰래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면서 조용히 말한다.
“어유, 잘해요. 내가 인정할 수 있어요. 쟨 원래 소질이 있었거든. 이젠 가게를 맡겨도 불안하지가 않아요.”
이씨는 지난 2001년 시계수리에 대한 탁월한 기술을 인정받아 우리나라에서 단 4명뿐인 시계수리의 명장으로 지정됐다. 조건에 굴하지 않고 한 가지 일만 고집해온 장인의 기술력은 대를 이어 내려오면서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대구=사진·글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대구=사진·글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대구=사진·글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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