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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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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집, 집, 집은 놀라웠다

등록 2005-05-12 00:00 수정 2020-05-03 04:24

어느 장애인 노숙자가 아직 철거되지 않은 삼일아파트에 들어가 희망을 품게 되기까지

▣ 사진·글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나 임진택(30)은 노숙자였다. 19살 때 당한 교통사고의 후유증으로 오른쪽 다리 무릎 아래가 뜻대로 움직이질 않아 지금까지 제대로 일을 못했다. 어렵게 봉제공장 일자리를 얻었지만 금세 문을 닫았다. 밀린 월급도 받지 못했다. 믿었던 친구가 사기를 쳐 월세방 보증금까지 날린 뒤 살림살이 하나 챙기지 못하고 거리로 내팽개쳐졌다. 일을 하고 싶었지만 장애 때문인지 아무도 받아주지 않았다. 지난해 5월부터 시청과 서울역, 영등포 등을 전전하며 만삭인 아내와 함께 노숙자 생활을 해왔다. 아내 송정숙(26)과 결혼한 지 5년 만인 지난해 6월에 딸을 얻었지만 도저히 길바닥에서 키울 수 없었다. 양육권을 포기하고 멀리 미국으로 입양을 보냈다.

문득 돌아보니 세상에는 집도 많다. 땅바닥도 모자라 하늘까지 차고 올라가는 집, 집, 집. 못 쓰고 버려진 집이라면 내가 잠시 들어가서 살면 안 될까?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기운이 스쳐가던 지난해 9월, 같이 노숙생활을 하던 동료들과 채 철거되지 않은 서울 종로구 창신동의 삼일아파트로 들어갔다. 구청과 한전쪽이 가만히 있지 않았지만 끈질긴 설득과 대화 끝에 철거가 시작될 6월까지만 지내기로 했다. 물론 비공식적인 합의 사항이라 언제 상황이 변할진 모른다.

일단 주거가 안정되자 모든 것이 변했다. 세수도 안 하고 살았던 나는 먼저 용모를 단정히 하고 주변을 청소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밥벌이를 해보고 싶었다. 아파트 이곳저곳을 뒤져 입주민들이 버리고 간 폐품을 끌어모아 길거리에서 팔기 시작했다. 노점을 하면서 사람을 기피하던 노숙자 근성도 없어졌다.

집이 주는 놀라운 의미를 새삼 깨닫는다. 나 같은 사람의 재활에는 주거가 필수 조건이다. 빈 건물이나 집에서 잠시나마 살 수 있다는 것이 정말 큰 도움이 된다. 나를 좋게 봐주는 사람들의 도움도 차츰 늘어나고 있다. 절망 속에서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가던 과거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혼자 힘으로 무엇이든 해볼 것이다. 새로운 희망도 품어본다.

오는 6월 이 아파트에서 나가게 되면 들어온 사람들과 함께 서울 외곽의 노는 땅에서 재활용품을 모으고 유기농을 하는 생산 공동체를 꾸릴 생각이다. 뭔가를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고 소중한 아내가 있기에 나는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것이다. 여기서 난 더 이상 노숙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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