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살의 버마(현 미얀마) 사람 조모아는 16년째 한국에서 조국 버마의 민주화운동을 하고 있다. 매주 서울 용산구 한남동 미얀마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민주화 시위에 거의 빠지지 않고 참가했고, 버마 관련 각종 행사에 참여해 조국의 현실을 알리는 데 노력해왔다. 8월8일 ‘8888 민주화운동(수도 랑군에서 군사정권에 반대해 1988년 8월8일에 일어난 대규모 군중시위) 22주년 기념행사’를 앞두고 그는 더운 여름날에도 경기 부천의 버마 민족민주동맹(NLD) 사무실에서 전화 연락을 하고 있었다.
“요즘 날씨가 더워서 힘들긴 해도 고국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는 사람들에 비해선 너무 편한 거죠.”
붉은색 NLD 깃발과 아웅산 수치 여사의 초상화가 걸린 사무실에서 인사를 나눈 뒤 그가 한 첫말이다. 1988년 8월9일, 중학생 소년 조모아의 눈에 학교 선배들이 길거리에서 군인이 쏜 총에 가슴과 머리를 맞고 쓰러지는 모습이 들어왔다.
“제가 아는 선배 3명이 길거리에서 시위하다 머리와 가슴에 총을 맞고 쓰러지는 것을 봤어요. 그 주검을 군인들이 질질 끌고 가고…. 너무 화가 났어요. 그래서 저도 시위 현장에 나갔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의 ‘80년 광주’를 연상시킨다. 8888 민주화운동 이후 버마의 모든 학교는 폐쇄됐다. 조모아의 학교도 문을 닫았다. 1992년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대학을 바로 갈 수도 없었다. 강제로 모든 학교의 문을 1~2년씩 닫게 하다 보니 졸업하고 1∼2년을 기다려야 입학 순서가 왔던 것이다. 그럴 즈음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왔고, 그렇게 온 한국에서 반정부 활동인 버마 민주화운동을 하다 고국에 돌아갈 수 없는 처지가 돼버렸다.
“한국에 와서 보니 민주주의의 역사가 우리와 너무 비슷한 거예요. 한국도 1980년 5월 광주에서 그랬잖아요. 6·10 민주화운동으로 오늘날의 민주주의가 이뤄졌고요. 한국이 한 것처럼 우리도 할 수 있어요.”
한국에서 16년을 살다 보니 어느덧 자신도 지나온 세월만큼 한국인이 된 것 같다. 소주 안주로는 김치찌개가 좋고 막걸리 안주로는 두부김치가 딱이라며 한국 음식이 자신과 잘 맞는다고 한다.
조모아는 지난해 12월에 결혼했는데, 부인이 지금 임신 3개월째다. 그동안 몸이 아파서 쉬던 일도 이번 8888 기념행사가 끝나면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이젠 부양가족이 있으니 더 열심히 일해야 해요. 낮엔 일하고 남는 시간을 쪼개서 운동하려면 앞으로 꽤 힘들 거예요.”
사람들은 그냥 얌전히 돈이나 벌라고 하지만 조모아는 결코 민주화운동을 멈출 수 없다.
“우리가 자유로워야 많은 일을 할 수 있어요. 조국의 민주화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겁니다. 전 그 일을 할 거고, 후회는 없습니다. 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부천=사진·글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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