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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 감축은 위험한 선택”

등록 2004-06-03 00:00 수정 2020-05-03 04:23

북핵위협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케리의 한반도 정책… ‘일방주의’보다는 ‘지구적 동맹’이 먼저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주한미군 감축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사실 이 문제는 올 11월에 있을 미 대선 결과에 따라 또 어떤 우여곡절을 겪을지 모른다. 조지 부시 현 대통령의 주한미군 정책 기조는 분명하다. ‘주한미군의 감축’이라는 대세는 뒤집기 어려워 보인다. 그렇지만 민주당 대선 후보인 존 케리 상원의원의 주한미군 정책은 부시 행정부와는 사뭇 다른 점이 발견된다. 따라서 그의 당선은 주한미군의 감축 추진에 제동을 거는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부시처럼 ‘동맹’ 우습게 여기지 않겠다”

우선 그는 북한의 핵 위협이 상존하는 현 상황에서 주한미군 감축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이다. “동아시아에서 북한이 진정한 핵 위협을 제기하는 가운데 우리는 이라크에서 과중한 부담을 진 병력을 교체하기 위해 미군을 한반도에서 빼내기 시작했다.” 케리 의원은 지난 5월27일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자신의 외교안보 정책을 밝히면서 부시 행정부가 북한의 핵 위협을 과소평가하고 있고, 이런 상황에서 주한미군을 차출하는 데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케리는 기본적으로 북핵 위협을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그는 5월28일(현지시각) 와의 인터뷰에서 사담 후세인 체제의 이라크가 중동을 불안하게 할 수 있는 ‘나쁜 이웃’이지만, 북한과 이란은 테러조직의 수중에 비재래식 무기를 흘러들어가게 하는, 더 직접적이고 심각한 위협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부시 대통령이 이러한 북한의 위협 문제를 뒷전으로 제쳐놓았다고 비판하면서 북한이 여러 가지 점에서 훨씬 더 심각한 위협이며 가장 시급하게 다뤄져야 할 의제에 속한다고 강조했다. 케리의 관점에서는 현 단계에서 주한미군 감축은 상당히 위험한 선택인 셈이다.

그가 동맹을 유난히 강조하는 대목도 주한미군 감축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잘 반영하고 있다. “9·11 이후 시대의 새로운 동맹시대를 열겠다”고 공언한 그는 5월27일 자신의 국가안보 정책 원칙으로 △외국과 새 동맹관계 구축을 비롯해 △테러위협 대응에 부합하도록 군사력 첨단화 △국가 안보를 위해 외교, 정보, 경제력의 사용과 미국의 가치 및 이념 호소 △중동 석유에 대한 의존 탈피 등 4가지를 천명했다. 새로운 동맹 구축은 케리의 외교안보 정책의 핵심 중에 핵심이다. “테러 위협 대처엔 정보 입수 등을 위해 전 지구적 동맹이 요구된다. 지난 세기와 같이 미국이 동맹을 중시하는 근본 원칙으로 돌아가 동맹을 이끌어 다른 나라들을 테러 대응에 동참시켜야 한다.” 이런 원칙 아래서라면 케리가 차기 대통령으로 당선될 경우 ‘부시식 일방주의 외교’를 추진하기는 어렵다. 케리는 시애틀 유세에서 “미국의 군사력이 세계 최강이긴 하지만, 우리의 힘은 동맹을 통해서만 극대화될 것이며, 동맹을 통해 미국이 더욱 안전해지고, 비용을 줄일 수 있으며, 인명 손실을 줄일 수 있다”고 말해 부시 정책과 대립각을 세웠다.

이런 기조는 주한미군 정책에도 적잖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부시 행정부처럼 주한미군 차출과 같은 일방적인 결정은 하기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동맹의 강조는 곧 피동맹국과의 긴밀한 상호 의사소통과 협력, 즉 상호주의를 전제로 한다. 상대국을 설득하는 데 시간은 좀더 걸리더라도 타협과 절충을 중시함에 따라 동맹정신은 유지된다. 부시 행정부는 취임 초기부터 타협과 절충이 아닌 일방주의를 추구하면서 동맹을 우습게 여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오늘날 이라크에서 만신창이가 된 채로 전후 처리를 떠맡고 있는 것도 유엔과 동맹국 무시에 따른 자업자득이라는 평가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처럼 케리가 북핵 문제를 가장 시급하게 다뤄야 할 현안으로 간주하고 있다면 주한미군 감축 문제는 뒷전으로 밀릴 가능성이 크다. 물론 이때 한국 정부의 태도가 변수이긴 하다. 노무현 정부가 북핵 문제와 상관없이 주한미군 감축 협상을 예정대로 추진하자는 입장을 보일 경우 케리 진영이 어떻게 나올지가 관심사다.

남북한에 솔깃한 파격적 발언

케리의 핵심 외교안보 정책 조언자들이 옛 클린턴 시대 인물 일색이라는 점도 주한미군 정책의 급격한 변화보다는 지속성을 가늠케 한다. 새뮤얼 버거 전 백악관 안보보좌관, 리처드 홀부르크 전 유엔주재 대사,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 존 샤릴카슈빌리 전 합참의장 등 낯익은 인물들이 케리의 외교정책을 조언하는 핵심 그룹들이다. 이들은 선 북핵 문제 해결, 후 주한미군 협상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조언자들로 알려진다.

케리는 얼마 전 매우 의미심장한 발언을 던졌다. 북한과의 양자협상에서 한반도 감군을 협상할 용의가 있다고 밝힌 것이다. 그는 5월28일 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즉각 북-미 양자협상을 하고 한반도에서의 감군 문제와 정전협정 대체 문제는 물론 남북한 통일 문제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의제를 논의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그는 “조지 부시 대통령 행정부가 북한의 핵개발 문제를 다룰 아무런 계획도 갖고 있지 않으며, 북한과 직접 대화를 하지 않음으로써 중대한 실책을 범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가 북-미 양자회담의 의제로 예시한 ‘한반도 감군’은 남북한과 주한미군을 포함한 군비감축을, ‘정전협정 대체’는 평화협정 체결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나아가 그는 남북 통일 문제까지 북한과 협의하겠다고 밝혔다.

다들 파격적인 발언으로 읽힌다. 그의 발언 의도와 구체적인 내용은 더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당선될 경우 북-미, 남북 관계의 획기적 변화를 충분히 점칠 수 있는 발언들이다. 케리의 제안들은 한국은 물론 북한이 듣기에도 솔깃한 것들이다. 케리는 부시 대통령이 북한 문제에 진지하게 대처하지 않았으며 북한과 양자협상을 거부하고 군사적 선제 조치 가능성을 경고함으로써 이에 위협을 느낀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핵개발 프로그램을 가속화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북한 문제에 대처하는 데 부시 대통령이 미국의 힘이 갖는 영향력을 이해하는 데 실패했다”면서 “사람들을 협상 테이블로 이끌어내 협력적으로 만들고 앞으로 나아가도록 만들 수 있는, 동원 가능한 선택사항들이 상당히 많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가 제시한 외교안보 정책들은 일단 남북한은 물론 미국 내에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이끌어내고 있다. 는 5월30일 사설에서 케리의 외교안보 정책을 ‘진지하고 실질적인 대안’이라고 평가했다. 또 미국에 “새 대통령이 필요하다”는 그의 주장에 공감을 표시하며 그에 대한 사실상의 공개적 지지를 선언했다. 케리의 외교안보 정책은 일단 합격점을 받은 듯하다.

케리의 북한, 이란 등 불량국가 정책은 부시 못지않게 단호하다. 이들의 수중에 핵무기 등 대량살상무기가 흘러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나, 이들의 어떤 공격 가능성에 대해 압도적이고 파괴적인 군사력으로 대응하겠다는 군사주의 발언은 여전히 섬뜩하다. 그는 대통령 임기 첫날 미군에 대해 “세계에서 가장 잘 지휘되고 첨단 장비를 갖춘 최강의 군대로 만들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하지만 케리는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문제와 관련해 외교적 시도를 충분히 해보지 않고 무력에 의존함으로써 미국의 지도력을 훼손했다고 주장하고 모든 문제를 군사력이라는 렌즈를 통해 봐서는 안 된다고 따끔하게 지적하고 있다. 과연 케리는 그가 밝힌 대로 ‘세계에서 진정으로 더 강하고, 진정으로 존경받는 미국’을 만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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