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직후 즉각 그뤼네반트로 묶여…환경운동가·분야별 전문가·접경지대 주민들이 함께 보호
▣ 베를린·잘츠베델=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베를린 시내에 있는 환경보호단체 분트(BUND·독일의 환경과 자연보호를 위한 연대) 사무실에 들어서면 하얀색 벽마다 초록색 띠가 끊어질 듯 이어지고 있다. 1393km에 이르는 그뤼네반트 지대를 표시한 녹색선이다. 베를린의 분트에서 그뤼네반트 보호를 위한 기금모금 운동을 맡고 있는 사비네 퀸은 “1989년 11월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분트와 지역 주민이 중심이 되고 통일 독일 연방정부 그리고 지방정부의 간접적인 도움을 받아 옛 동·서독 접경지역에 150여 개의 자연보호구역을 지정했다”며 “벽에 그려진 녹색선이 옛날에는 철조망이 쳐져 있던 죽음의 경계선이었다”고 말했다.
연방정부 65%, 주정부 30%, 분트 5%
사무실 벽에 그려진 녹색띠 옆에는 청개구리, 살쾡이, 종달새 사진이 걸려 있다. 모두 그뤼네반트에 살고 있는, 독일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희귀종들이다. 퀸이 그뤼네반트의 홍보 팸플릿에 실린 사진 한 컷을 꺼내 보여줬다. “이 나비 한 마리가 사라질 뻔했는데 그뤼네반트 덕분에 아직 보존되고 있어요.” 독일 동남부 작센주의 척박한 습생초지에 사는, 멸종위기에 처해 있는 금빛어리표범나비였다. 퀸은 “사라지고 있는 동식물들이 동·서독 분단 40년 동안 철조망이 쳐져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동독 쪽 경계지역 안에서 새로운 서식처를 찾았던 셈”이라며 “접경지역 군인들이 감시 시야를 확보하려고 잔디를 깎고 나무들을 베어낸 것이 오히려 희귀 동식물의 생태에 도움을 줬다”고 말했다.
그뤼네반트 보호운동은 18년 전인 1989년 11월 독일 통일 직후부터 본격화됐다. 서독 쪽 바이에른주에서는 통일 이전부터 자연보호연맹 회원들이 접경지대에 사는 새들을 관찰하면서 멸종위기종의 서식처가 곳곳에 분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라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서독 철조망 접경지대를 그뤼네반트로 지정해 보호하자는 주장은 통일 이전에는 거의 제기되지 않았다. 그런데 장벽이 갑작스럽게 무너졌고, 옛 접경지대에 고속도로가 새로 뚫린다는 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분단의 기억을 빨리 잊으려는 듯 장벽에 설치됐던 감시탑과 철조망이 일제히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분트는 발빠르게 움직였다. 장벽이 무너진지 닷새 뒤인 11월14일 분트는 “옛 죽음의 선을 평화의 녹색선으로 보호하자”며 접경지역 생태서식지 보호를 결의하고, ‘다스 그뤼네반트’라고 이름 붙인 옛 접경지역 생태보존 프로젝트를 논의했다. 퀸은 “통일 당시 환경단체의 요구가 제기되면서 동·서독 정부가 접경지역 생태를 보호하기로 서약했는데,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규정은 따로 없었다”고 말했다. 이 서약서는 그뤼네반트를 직접 명시하지 않은 채 ‘옛 동·서독의 유적지, 환경적 가치가 있는 지역을 보호해야 한다’는 선언에 그쳤다.
통일 직후부터 옛 접경지역 곳곳은 즉각 그뤼네반트로 묶이면서 생명력 넘치는 야생의 생태공간으로 복원되었다. 동·서독 옛 접경지역의 총 길이 1393km(폭 50∼200m) 중 현재 다스 그뤼네반트로 지정된 곳은 약 85%에 이른다. 그뤼네반트로 묶여 보호되고 있는 땅은 연방정부가 약 65%, 주정부가 약 30%, 분트가 약 5%(250ha)를 소유하고 있다. 연방정부 쪽의 입장은 “소유한 접경지역 땅을 개발하지 않겠다”는 정도인데, 그뤼네반트로 보존되고 있는 현 상태를 ‘용인’하고 있는 양상이다. 퀸은 “분트와 주정부들이 지속적이고 명확한 그뤼네반트 보호를 위해 이 땅을 넘겨달라고 중앙정부에 요구하고 있다”며 “중앙정부가 넘겨주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시기와 면적은 아직 합의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직 그뤼네반트에 편입되지 못한 나머지 15%는 개인 소유의 땅으로 생태계 파괴가 꽤 진행되고 있다. 분트는 2000년부터 이런 개인 소유의 땅까지 사들이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 15%의 땅까지 모두 확보돼야 독일 그뤼네반트 생태축이 완성되는 것이다.
전지역 생태 조사 끝에 생태지도 완성
분트는 호수를 낀 습지와 숲이 많은 엘베·튀링겐·프랑켄발트 3곳을 그뤼네반트의 주요 거점으로 삼아 보호활동을 벌이고 있다. 분트는 2001년에 그뤼네반트 전 지역에서 생태 조사를 벌여 독특한 생태서식지 100여 곳과 멸종위기종 서식지를 표시한 생태지도를 완성했고, 그 뒤 그뤼네반트는 자연보호구역, 천연기념물관리지역, 경관보호지역 등으로 지정돼 보호되고 있다. 그러나 독일 그뤼네반트 전 지역이 국제적인 자연환경 기구로부터 그 보존 가치를 공식 인정받고 있는 건 아직 아니다.
흥미로운 것은 독일에서 그뤼네반트 보호를 둘러싼 찬반 논쟁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그뤼네반트를 둘러싼 의제가 선거 쟁점으로 등장하지도 않았고 그뤼네반트 보호를 위한 독자적인 법률이 제정돼 있는 것도 아니다. 그뤼네반트는 ‘이 지역에서는 동물이 도망가지 않도록 조용히 해야 한다. 식물을 갖고 가면 안 된다’는 등의 일반적인 자연보호 규정이 적용될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 옛 동·서독 접경지대는 조용히 그뤼네반트로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퀸은 “독일 사람 중에 그뤼네반트의 존재 자체를 잘 모르는 사람도 어느 정도는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남북을 가로지르며 동식물 생태서식지를 잇는 그뤼네반트 녹색띠는 환경운동가와 분야별 전문가들, 그리고 옛 접경지대 지역 주민들이 함께 손잡고 보호하고 있는 셈이다. 1990년대에는 대학생들까지 나서서 ‘분트 학생협회’를 구성해 그뤼네반트 지역에 대한 생태 조사를 벌이고 이 지역의 희귀 동식물들을 연구하기도 했다.
물론 그뤼네반트가 옛 동·서독을 연결하는 도로를 완전히 막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뤼네반트 위에는 고속도로 등 현재 약 450여 개의 큰길이 뚫려 있고, 작은 길도 많이 나 있다. 간혹 그뤼네반트 녹색선 위로 새로운 고속도로 건설이 추진될 때면 분트 회원들이 반대 시위를 벌이기도 하지만, 그뤼네반트의 존속 여부가 뜨거운 사회적 이슈로 등장한 적은 아직까지 없었다고 한다.
독일 그뤼네반트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개인 소유의 옛 접경지역 땅을 매입하기 위한 기금모금 참여자 △구입 대상 토지의 소유자를 찾아내고 팔도록 설득하는 자원활동가 △자전거를 타고 그뤼네반트 지역 현장을 돌면서 보호활동을 벌이는 사람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현재 분트가 직면한 가장 큰 골칫거리는 땅 문제다. 퀸은 “동독 시절 국가에 빼앗긴 땅을 통일 이후 개인들이 속속 되찾기 시작했는데 그 땅이 옛 접경지역의 15%에 이른다. 이 땅을 우리가 개인들에게서 다시 사들여 그뤼네반트로 편입하고 있다”며 “땅 매입 자금은 자연환경 보호에 관심이 있는 시민들로부터 모금하고 있다”고 말했다. 1인당 모금액은 65유로인데, 지금까지 약 1만 명이 모금에 동참했다고 한다. 모금에 참여한 사람은 분트로부터 일종의 ‘녹색증서’를 받게 된다. 옛 소련 대통령 고르바초프는 3천 번째 녹색증서 주인이다.
손자에게 선물로 주는 녹색증서
기금모금을 통해 분트가 사들인 뒤 그뤼네반트로 편입한 땅은 지금까지 250여ha에 이른다. 분트의 기금모금운동 활동가인 프란치스카 그룰레르는 “그뤼네반트에 대한 연방정부의 예산 지원은 거의 없다”며 “모금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보면 접경지대 근처에 살았던 지역 주민들이 많고, 특히 분단 시절 접경지대에서 군인으로 복무했던 사람들도 꽤 있다”고 말했다. 1989년에 태어난 통일둥이 아이들 여럿도 녹색증서를 갖고 있다고 한다. 모금에 참여한 사람의 절반 이상이 50살 이상으로, 65유로 후원증서를 손자한테 생일선물로 주는 사람도 있다. 독일 국민의 자발적 참여를 통해 옛 분단 철조망 지역이 거대한 생태축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모금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그뤼네반트 몇 번지 땅의 소유자가 되는 건 아니다. 대략 어느 지역의 땅을 구입하는 데 쓰였다는 사실만 알게 될 뿐이고 1년에 한두 차례 분트의 안내를 받아 그 지역에 현장 자연체험을 가보곤 한다.
분트는 그뤼네반트에 관한 달력을 만들거나 신문·잡지에 관련 기사를 싣고, 교과서 지도책에 그뤼네반트 생태축을 넣거나 자연보호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한테 정기적으로 편지를 보내 모금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분트가 제작한 그뤼네반트 팸플릿에는 ‘경계선 없는 자연’이란 글귀가 선명하게 박혀 있다. 그 어떤 것도 자연을 더는 갈라지게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접경지대의 땅 주인을 찾아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룰레르는 “개인 소유 땅 임자의 이름과 주소를 주정부가 잘 알려주지 않아서 이들을 찾아내는 일이 만만찮다”며 “주인을 찾더라도 돈을 턱없이 요구하거나 절대로 땅을 팔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 애를 먹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연방정부가 소유하고 있는 그뤼네반트 땅도 옛 주인이 갑자기 나타나 돌려달라고 요구하면 개인 소유로 뒤바뀌게 된다. 그뤼네반트의 끈 한 부분이 이렇게 떨어져나가는 일도 간간이 생기고 있다.
가장 큰 위험요소는 논밭 경작
그뤼네반트를 생태적으로 위협하는 가장 큰 요인은 그뤼네반트 바로 옆에서 이뤄지는 논밭 경작이다. 논밭에 농약을 치고 비료를 주게 되면 주변의 그뤼네반트 생태계가 파괴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옛 접경지역에서 서독 농부들은 당국의 허락을 받아 서쪽 경계선 철조망 앞까지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작센 안할트주의 분트 활동가인 디터 로이폴드는 “그뤼네반트 인접지역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농부들을 자주 만나 이곳의 생태보호가 중요하다는 점을 지속적으로 알리고 있다”며 “작센 안할트 지역의 경우 그뤼네반트 인접지역에서의 농사를 법적으로는 금지하지는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육지책으로 분트는 그뤼네반트 근처에 있는 농지까지 사들여야 할 형편인데, 한편으로는 “그뤼네반트 생태가 잘 보전되면 관광객이 많이 와서 농촌 지역 주민들한테도 이익이 될 수 있다”며 농부들을 설득하고 있다.
물론 그뤼네반트 지역에 ‘일반인 출입금지’ 팻말이 붙어 있는 건 아니다. 로이폴드는 “그뤼네반트를 관광상품으로 만들기 위해 자연체험 프로그램들을 만들고 있는데 옛 분단의 흔적들이 남아 있도록 그대로 놔뒀더라면 관광객을 끌어오기 쉬웠을 것”이라며 “물론 그뤼네반트를 지속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다시 철조망을 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사람들이 생태체험을 하도록 접근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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