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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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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박물관] “아프냐? 우리 모두 아프다”

등록 2003-09-24 00:00 수정 2020-05-02 04:23

‘고통의 연대’를 통해 생활 속에서 평화의 싹을 틔우는 ‘평화박물관 건립운동’ 이야기

의 베트남전 캠페인에 뿌리를 둔 ‘평화박물관 건립운동’이 본궤도에 올랐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준)’ 공동사무처장 한홍구 교수와 건축가 정기용씨가 글을 보내왔다.

한겨레신문사와 시민사회단체가 손잡은 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준)(공동대표 고희범·김진균·이옥선·이해동)가 지난 9월16일 각계각층 100여명의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사업설명회를 열고 박물관 건립을 위한 본격 활동에 들어갔다. 추진위원회의 공동사무처장을 맡고 있는 한홍구 교수와 건축부문에 참여하고 있는 정기용씨가 이 운동에 관한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 글을 보내왔다. 추진위원회는 현재 준비 중인 사이버평화박물관이 개관하는 10월 하순경에 (준)을 떼어버리고 정식 추진위원회로 출발한다. -편집자

“아프냐, 나도 아프다.”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드라마 에서 가장 깊게 사람들의 마음에 꽂힌 대사다. 에 나오는 “네가 아프니 나도 아프다”를 더 함축적으로 표현한 말인 듯하다. 평화박물관을 준비하는 우리는 이 대사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을 보면서 평화박물관운동의 밝은 장래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이 말만큼 평화박물관이 이루고자 하는 ‘고통의 연대’를 잘 짚은 것은 없다. 전쟁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로의 아픔을 보듬어주고, 똑같은 비극이 되풀이됨을 막는 일이야말로 평화운동의 중요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는 착한 마음들이 손을 잡는 ‘고통의 연대’를 통해서만 우리는 평화에 대한 위협에 맞설 수 있다.

‘베트남전 사죄운동’이 그 뿌리

누구나 평화를 바란다지만, 평화만큼 추상적이고 손에 잡히지 않는 말은 또 없다. 우리가 단 한번도 평화 속에서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청-일 전쟁, 러-일 전쟁의 전쟁터가 된 이래 한반도는 일제의 만주침략 전진기지로, 대륙침략 병참기지가 되었다. 도둑처럼 찾아온 해방에 뒤이은 한국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채 전쟁과 학살의 상흔을 땅과 사람에게 짙게 남기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베트남전쟁, 걸프전쟁, 앙골라 내전, 소말리아 내전, 아프가니스탄 전쟁, 그리고 지난 4월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은 미국이 발을 들여놓은 전쟁에 거의 빠짐없이 군대를 보내야 했고, 지금은 이라크에 전투병 추가파병 문제를 놓고 온 나라가 시끄럽다.

늘 전쟁 속에서 살아온 우리는 전쟁을 기념한답시고 웅장한 전쟁기념관을 지어놓았다. 전쟁기념관은 ‘전장에서의 위대한 행동’과 ‘전쟁영웅’에 대한 기념을 통해 결국 전쟁을 정당화하고 무력행사를 찬양하게 만든다. 전쟁기념관을 둘러본 아이들이 이 탱크가 더 세냐, 저 폭탄이 더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느냐에 관심을 갖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시도 전쟁의 위협과 공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우리가 정녕 기념해야 할 것이 전쟁일까, 평화일까 아이들 손을 잡고 평화를 보고 느끼고 만지기 위해 찾아볼 장소는 수백만의 목숨이 전쟁과 학살, 국가폭력으로 사라져간 이 땅 어디에도 없다. 이에 우리는 우리들 마음속의 평화의 씨앗을 모아 평화박물관을 세우려고 첫발을 떼었다.

평화박물관 건립운동은 독자들의 성원으로 진행돼온 한국군의 베트남전에서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조사와 사죄운동을 직접적으로 계승한 움직임이다. 베트남 캠페인이 한창이던 2000년 여름, 베트남전진실위원회에는 4300만원이라는 큰 돈이 전해졌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중국에서 수십년 만에 귀국한 문명금 할머니께서 정착지원금으로 받은 돈을 전쟁 피해자들을 위해 좋은 일에 쓰라고 내놓으신 것이다. 이어 같은 위안부 출신인 김옥주 할머니께서도 유산으로 2700만원을 내놓으셔서 진실위원회에는 7천만원이라는 거금이 모였다. 수십조의 공적자금이 낭비되고, 수백·수천억원의 살상무기들이 손쉽게 거래되고, 터졌다 하면 수천억원인 부패사건이 꼬리를 무는 세상에서 7천만원이란 그리 큰 돈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세상 누구보다도 깊은 전쟁의 상처를 몸과 마음에 안고 살아오신 두분 할머니 삶의 무게가 담긴 그 돈은 어느 누구도 함부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에 진실위원회는 전쟁의 피해자로서 또 다른 피해자가 나와서는 안 된다는 할머니들의 뜻을 받들어 평화를 사랑하는 시민들의 정성을 모아 평화박물관을 짓기로 했다.

당신이 선 곳에서 출발한다

처음 진실위원회가 평화박물관의 위치로 생각한 곳은 베트남이었다. 그러나 베트남 답사를 포함해서 많은 고민과 검토를 거친 결과, 진실위원회는 정말 평화박물관이 필요한 곳은 한국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진실위원회가 베트남에서 만난 피해자 중 한 분은 사죄하러 온 우리 일행에게 지금도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행한 것과 똑같은 일들이 세계 여러 곳에서 벌어지고 있다면서, 진정한 사과는 베트남에 와서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을 막는 것이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진실위원회의 베트남 답사에 합류한 건축가들도 베트남에는 건축가들이 힘을 모아 작은 기념관을 지을 테니, 진실위원회는 전쟁과 학살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채 군사주의가 횡행하는 한국 땅에 평화박물관을 세우는 데 주력하라고 힘 있게 권유했다.

많은 분들이 평화박물관을 어디에 세울 것이냐고 묻는다. 아직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지으려는 평화박물관은 그저 웅장한 건물 하나 덩그러니 세우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평화박물관이 건물의 크기로 전쟁기념관과 경쟁해서야 되겠는가 우리는 평화를 바라는 여러분이 서 계신 곳에서부터 출발할 것이다. 학교에서, 도서관에서, 시민단체의 작은 사무실에서, 어린이집에서, 마을회관에서 평화박물관은 출발한다. 긴 복도와 계단과 벽이 없는 학교는 없다. 많은 학교에는 빈 교실도 있다. 이런 곳을 평화의 벽으로, 평화의 계단으로, 평화의 복도로, 평화의 교실로, 평화의 책장으로 새롭게 꾸미는 일은 평화박물관운동의 중심과제가 될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평화와 인권에 대한 감수성을 키우고 남의 아픔을 이해하는 마음을 키우지 않는다면, 전쟁기념관보다 더 웅장한 건물을 지어도 그런 평화박물관은 사상누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 생활공간 속에 세우는 평화박물관은 어떤 유명한 사람들의 고상한 활동이나 전쟁의 참상만을 전시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 한번도 평화를 누려본 적이 없는 우리에게 평화와 관련한 유물이 많은 것도 아니다. 평화박물관이 전시할 내용은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우리가 벌이는 작은 노력이며, 우리 자신의 자료이다. 한 예로 한국의 초등학교가 이라크 바그다드의, 아체의 또는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지역의 초등학교와 자매결연을 맺고 아이들끼리 주고받은 편지와 그림과 사진을 전시한다면 이보다 더 소중한 평화자료가 있을까 평화를 생각하며 내가 그린 그림이, 내가 참여한 작은 활동이 기록되고 보존되고 공유되는 곳이 평화박물관이다. 또한 평화박물관은 유물들의 공동묘지에 그치지 않고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교류하고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평화교육 프로그램을 준비할 것이다.

평화를 만지고 느끼고 체험하고 성찰하는…

평화박물관이 주력할 또 하나의 사업은 사이버평화박물관을 만드는 일이다. 우선 사이버 공간에서는 땅값이 들지 않고 막대한 건축비를 요하지도 않는다. 사이버평화박물관은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더 손쉽게 평화에 대한 시청각 자료와 문헌자료를 접하는 공간이 될 것이며, 오프라인상에 건설될 평화박물관의 제한된 전시공간을 보완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곳곳에 세워질 생활형 평화박물관들의 네트워크, 다양한 평화교육 프로그램 그리고 사이버 평화박물관은 장차 우리가 세울 평화박물관의 굳건한 주춧돌이 될 것이다. 이 주춧돌 위에 작고 아담하지만, 그곳에 가면 평화를 만지고 느끼고 체험하고 성찰할 수 있는 그런 박물관을 우리는 지을 것이다.

아무리 우리가 작고 아담한 박물관을 짓는다 해도 박물관 하나를 짓는 일에는 막대한 재정과 노력이 필요하다. “단 한번도 남을 침략한 적이 없는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이란 말로 미국의 침략전쟁을 거드는 대군을 파병한 우리의 불행한 역사를 고쳐쓴, 베트남전에 대한 사죄운동을 가능케 한 독자 여러분들의 성원을 바란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를 느끼는 우리의 마음속에 평화박물관은 이미 지어지고 있다(문의 02-3675-5810).

한겨레 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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