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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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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 부르는 ‘돈 놓고 돈 먹기’

등록 2002-08-15 00:00 수정 2020-05-03 04:22

투자수익 없이 신규 가입자의 돈으로 배당금 나눠주는 금융 피라미드 ‘폰지게임’ 성행

서울 강남의 한 사금융업체는 1997년 “5만원을 내면, 6주 동안 주말마다 1만원씩을 주겠다”며 투자자들을 끌어모았다. 이들의 제안은 매우 매력적이었다. 6주 만에 5만원이 6만원이 된다면 수익률은 20%다. 연율로 환산하면 무려 160%가량이나 된다. 이런 방식으로 돈을 번다면 세상에 돈벌이보다 쉬운 일은 없을 것이다. 투자자들은 돈벌이에 취해 앞다퉈 뛰어들었다. 5만원을 1구좌로 해서 수백구좌를 투자한 사람도 있었다. 한동안 착실하게 돈이 나와 투자자들은 흥에 겨웠다. 하지만 사금융업자는 어느 날 돈을 모두 챙겨 달아나버렸다. 애초에 사기극이었던 것이다.

새 투자자 없으면 돈 챙겨 도주

투자자들에게 5만원을 받고 6만원을 주려면 사금융업자는 모은 돈으로 무언가 수익사업에 투자해 돈을 나줘주고 남을 만큼 많은 수익을 내야 한다. 그래야 사업이 지탱된다. 그러나 이들은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다만 새로 가입하는 투자자들에게 받은 돈으로 먼저 가입한 사람에게 약속한 수익금을 주고, 나머지는 자신들이 챙겼다. 이들은 사람들을 계속 끌어모으기 위해 투자자가 여섯 번째 1만원을 받으려면 다시 5만원을 투자하거나, 5만원을 투자할 사람을 새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사기꾼이 돈을 챙겨 달아난 것은 새로 들어오는 돈보다 투자자들에게 줘야 하는 배당금이 더 많아진 그 시점이었다.

미국에서 부동산 개발붐이 한창이던 1920년대 ‘찰스 폰지’라는 사람은 이런 사기극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폰지는 해안 휴양지로 좋은 입지조건을 갖춘 플로리다에서 부동산 개발에 투자해 고수익을 보장하겠다며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그는 투자자들에게 실제 고율의 배당을 실시했고, 그것을 믿고 투자하는 사람들은 점차 늘어만 갔다. 그러나 폰지는 부동산 개발은 전혀 하지 않았다. 새로 들어오는 돈 가운데 일부를 배당금으로 나눠주고 나머지는 자신이 챙겼을 뿐이다. 폰지는 투자자가 늘어나지 않자 돈을 끌어들이기 위해 점점 더 높은 배당을 약속했다. 그럴수록 배당에 대한 부담은 커졌고, 결국 배당을 지급하지 못하는 사태에 직면했다. 폰지의 사업은 파산했고 그는 구속됐다. 하지만 돈을 날린 투자자들은 하소연할 곳이 없었다. 폰지의 사업처럼 빚을 내서 빚을 갚아나가는 사기극을 ‘폰지게임’이라고 한다. 폰지게임은 새로운 투자자(빚)를 계속 끌어들이지 못하면 유지되지 못한다. 그것을 잘 아는 사기꾼들은 이제 폰지처럼 사업에 끝까지 매달리지 않는다. 사업이 더 확장되지 않는다 싶으면 모든 돈을 챙겨 달아나버린다.

이미 오래전 사기극으로 판명난 폰지게임이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계속되고 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단순히 돈만 왔다갔다하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 무언가 상품을 끼워넣는 다단계 판매를 가장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지난 7월 말 금융감독원에 제보가 들어온 ㅇ사(서울 광진구)의 영업행태도 폰지게임의 전형적 사례라 할 수 있다. ㅇ사는 회원이 1구좌에 시중가 100만원가량인 금 20돈을 220만원에 사면, 구매일 다음날부터 18개월간 매달 14만원씩 252만원을 투자자에게 지급한다. 투자자가 금을 현금화해서 원금중 100만원을 챙긴다고 보면, 실제로는 120만원을 투자해 18개월 동안 152만원을 받게 되므로 투자수익률은 30%가량 된다. 연간으로 환산하면 20%에 이르는 높은 수익률이다. 이 회사는 회원들에게 정상적으로 돈을 지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은행 정기예금 이자율이 연 5%대에 지나지 않는 현실에서 회사쪽이 회원들이 투자한 돈으로 연간 20% 이상의 수익을 내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결국 회원 수가 늘어나는 동안에는 별 문제가 없지만, 회원 수 증가가 멈추면 언젠가는 월 배당금을 지급하기 어려운 상황에 부닥칠 수밖에 없다. 겉모습은 다르지만 폰지의 사업방식과 원리상 조금도 차이가 없다.

실제로는 금융 피라미드인데도 다단계 판매를 가장하기 위해 중간에 끼워넣는 상품으로는 건강보조식품·자동판매기 등이 대표적이다. 건강보조식품은 제품을 사는 사람에게 회원 자격을 주고, 회원이 새로 회원을 끌어들여 물건을 팔면 고액의 후원수당을 주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얼핏 보면 다단계 판매처럼 보이지만, 이 또한 뒤에 들어온 사람의 돈을 먼저 들어온 사람이 차지하고 언젠가 파산할 수밖에 없는 금융 피라미드다. 정상적인 다단계 판매라면 일반적인 유통구조에서 생기는 유통비용을 판매원들이 수익으로 챙긴다. 그러나 대부분의 다단계 판매업자들은 원가에 몇배의 마진을 붙여 회원에게 판매하기 때문에 사실상 회원들에게 돈을 걷는다. 그러므로 더 이상 회원이 확대되지 않으면 ‘꽝’ 하고 마는 폰지게임과 전혀 차이가 없다.

올 상반기에 금감원에 제보가 들어오거나 금감원이 정보수집을 통해 수사기관에 통보한 유사수신업체를 분석한 결과 다단계 방식을 이용한 불법 자금모집업체는 지난 1분기 16개에서 2분기 27개로 늘어났다. 특히 다단계 판매를 가장한 금융 피라미드는 경제적 능력이 떨어지는 회원들을 끌어들이면서 신용카드 대출을 알선해주는 경우가 많아, 신용불량자를 양산하는 온상이 되고 있다. 금감원이 검찰에 수사를 의뢰한 한 다단계 판매업체의 판매원 ㅂ씨는 “회사쪽 알선으로 카드를 발급받아 구매한 물건값 400만원을 감당하지 못해 사채업자를 찾았고, 결국 빚 때문에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다. 나 같은 처지에 놓인 대학생 회원이 많다”고 말했다.

단속에 걸리면 재빨리 회사이름 바꿔

폰지가 부동산 개발을 내세운 것처럼 금융 피라미드 업자들 가운데 고수익 투자를 내세우는 경우는 제법 모양을 갖춘 경우다. 이들은 오락기나 통닭구이 기계에 투자하면, 회사쪽이 이를 관리해 투자자에게 정기적으로 수익금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한다. 업자들은 이들 상품이 매우 획기적인 것이어서 많은 배당금을 받을 수 있다고 유혹한다. 게다가 몇달 뒤에는 기계를 되사주겠다는 계약을 체결해 투자자들을 안심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업자들은 투자금만 받고 실제로 그런 사업에 투자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폰지가 그런 것과 똑같다. 금감원 조성목 비제도금융팀장은 “수천명의 회원을 끌어들인 한 자판기 업체를 조사한 결과, 실제 보유한 자판기는 수백대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고 말했다.

화장문화가 널리 확산되면서 납골당 분양권도 금융 피라미드 업자들의 유행품목으로 떠올랐다. 한 다단계 판매업체는 시중가 15만원가량인 납골당 분양권을 230만원에 사면 하위 판매원을 끌어들일 수 있는 회원 자격을 준다. 이어 회원이 하위 회원에게 분양권을 팔면 후원수당으로 30만∼50만원을 지급한다. 몇 단계만 하위 판매원을 만들면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다고 유혹하는 것이다. 그러나 애초 15만원짜리를 230만원에 파는 것인 만큼 뒤에 들어오는 사람이 비싸게 분양권을 산 돈의 일부를 먼저 회원이 된 사람이 가로채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회원 확장이 안 되면 사업은 중단되고, 뒤늦게 뛰어든 사람은 시중가의 수십배에 이르는 분양권만 손에 쥘 뿐이다.

다단계 판매를 위장한 금융 피라미드 업체들은 단속에 걸리면 재빨리 회사 이름을 바꾸고 다시 영업을 시작하기 때문에 쉽게 근절되지 않는다. 서울에 본사를 둔 ㅈ사는 전국적 영업망을 갖추고 100만원 이상 가입조건으로 투자자들을 모집하다가 지난 3월 적발됐다. 이 회사는 부동산 투자를 통해 3개월간 월 12∼15%의 확정이자를 지급한다며 투자자를 모았다. 이들은 제때 이자를 지급하지 못한 투자자들이 항의하자 이자 지급을 뒤로 미루면서 사법당국의 단속이 있을 때마다 ‘00개발’, ‘00리츠’, ‘00라이프’ 등으로 수시로 이름을 바꿨다. 신고하는 사람에게는 투자금을 돌려주지 않는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금융 피라미드 업자들은 교통범칙금 대납업을 하던 한 유사보험회사가 ‘불법’ 판정을 받았으나 이미 확보된 거대한 회원조직을 재빨리 농산물 다단계 판매로 전환하는 데 성공한 것을 예로 들며, 당국이 문제삼을 경우 상품만 바꾸면 된다고 투자자들을 안심시킨다.

금감원이 올 상반기 사법당국에 통보한 유사수신업체 수는 1분기에 75개, 2분기에 54개로 모두 129개에 이른다. 지역별로 보면 2분기에 통보한 54개 업체 가운데 서울·경기 지역에 본점이 있는 업체가 51개로 대부분을 차지하고, 특히 서울 강남·서초 지역에 본점을 둔 업체가 절반을 넘는다. 서울 강남·서초 지역에 본사를 두는 것은 그럴듯한 회사로 보이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 업체들은 지방에도 지점을 내고 전국적 영업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지방이라고 해서 피해의 사각지대라고 보기는 어렵다.

수많은 피해사례에도 여전히 극성

그동안 수많은 피해사례가 보고됐음에도 여전히 폰지를 본뜬 사기극이 끊이지 않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오랫동안 다단계 판매업체를 옮겨다닌 한 판매원은 “오래 해본 사람은 아이템만 좋으면 먼저 뛰어들어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안다”고 말했다. 아이템이 좋다는 것은 빠른 시간 안에 회원 수를 늘릴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 사업이 얼마나 지탱될 수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을 알면서도 폰지게임에 뛰어들었다가 돈을 벌고 빠져나가는 사람은 극소수일 뿐이다. 다수를 차지하는 선의의 피해자는 계속 양산되고 있다. 금융 피라미드 업체들은 대부분 합법적인 다단계 판매업체로 등록한다. 다단계 판매업에 대한 조사권은 시·도와 공정거래위원회에 있는데, 조사인력의 한계 때문에 제대로 단속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 금감원이 제보자 포상제도(사금융피해신고센터·02-3786-8655)를 실시하며 불법행위에 대한 신고를 유도하지만, 대개는 피해가 현실화된 뒤에야 제보가 잇따른다. 그런 상황을 잘 아는 사기꾼들은 지금도 폰지게임을 열심히 연구하며, 또 다른 ‘봉’을 찾고 있다.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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