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022년 8월15일 광복절을 맞아 특별사면·복권됐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장세주 동국제강 회장 등 다른 재계 인사들과 함께다.
이에 삼성전자의 아르이(RE)100 참여가 조만간 공식화되는 등 ‘큰 선언’이 임박했다는 관측이 나온다. 전력소비량 국내 1위 기업인 삼성전자의 RE100 가입 전망은 2022년 본격화됐다. 삼성전자가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RE100 가입’ 방침을 전했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고, 한종희 삼성전자 대표이사(부회장)는 5월30일 “조만간 큰 선언을 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전력이 밝힌 삼성전자의 2021년 국내 전력 사용량은 18.41테라와트시(TWh)로, 2위인 에스케이(SK)하이닉스(9.21TWh)의 두 배다. 2021년 국내 재생에너지 총발전량(43.09TWh)의 5분의 2에 해당한다.
RE100은 전세계 기업들의 탄소중립 프로젝트다. 기후위기를 막기 위해 2050년까지 기업이 쓰는 전력을 모두(100%) 태양광이나 풍력 같은 재생에너지(RE)로 만들자는 협약이다. 투자자들에게 기업의 온실가스 정보를 공개하는 영국의 비영리단체 탄소정보공개프로젝트(CDP)와, 역시 영국에 기반을 둔 비영리단체인 더클라이밋그룹이 2014년부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구글이나 애플, 이케아, 베엠베(BMW) 같은 글로벌 기업 370여 곳이 참여하고 있다. RE100에 가입하려면 매우 구체적인 계획을 제출해야 한다. 가입한 기업들이 RE100을 달성하겠다고 목표한 시기는 평균 2030년으로, 북미나 유럽 기업은 2030년 이전에, 아시아 기업은 2030년대 후반에 재생에너지 100%를 달성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구글,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등 61개 기업은 이미 RE100을 달성했다. 가입한 회원사들 평균 달성률은 45%가량이다. 한국에선 에스케이 계열사, 현대차 계열사 등 2022년 7월 기준 21개 기업이 가입돼 있다. 2020년 6개에서 빠르게 늘었다. 회원사를 국가별로 보면, 미국(96개), 일본(72개), 영국(48개)에 이어 한국이 4번째로 가입 기업 수가 많다.
RE100은 명목상 구속력 없는 자발적 캠페인이지만, 이미 RE100을 달성한 기업이 다시 부품 등을 공급받는 협력회사에 RE100을 요구하는 등 사실상 참여가 강제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온실가스 배출량이 많을수록 시장에서 불리해지도록 압박하는 흐름도 본격화한다. 유럽연합은 2023년부터 탄소국경조정제도를 시행하고 2026년부터 탄소국경세를 징수한다. 글로벌 금융회사, 기관투자자들은 진작부터 이에스지(ESG, 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을 통해 재생에너지 사용을 압박해왔다.
하지만 RE100에 가입한 기업 수는 빠르게 늘어나는 반면, 국내 재생에너지 발전량은 다른 주요국에 견줘 심각하게 적다(그림 참조). 산업통상자원부는 국내 RE100 가입 기업의 전력 사용량이 전체 재생에너지 발전량 이내(2022년 57% 예상)라 문제없다고 설명하지만, 이 문제가 조만간 이들 기업의 발목을 잡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전력 사용량 1위 삼성전자의 RE100 참여는 그 신호탄이다.
삼성, 미국·유럽에선 100% vs 한국은 2.7%RE100을 달성하려면 기업의 사용 전력 전부를 온실가스를 배출하지 않는 재생에너지로 조달해야 한다. 직접 재생에너지 발전소를 짓거나, 재생에너지 발전사의 전력을 사면 된다. 전력 구매는 발전사의 공급인증서(REC)를 사거나 웃돈을 내는 녹색요금제에 가입하는 식으로 이뤄진다. 최근엔 발전사와 직접 계약하는 방식도 늘어나고 있다. 물론 인증서나 녹색요금, 발전사와의 계약 가격은 모두 해당 국가의 전체 재생에너지 발전량에 영향받는다. 한국은 이 세 가지 조달 방식에 드는 비용이 각각 유럽의 1.5~2배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의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보면, 삼성전자는 이미 2020년에 미국과 유럽, 중국에서 RE100을 달성했다. 브라질과 멕시코에선 2021년 각각 재생에너지 비중이 94%, 71%로 올라섰다. 중남미와 서남아시아 지역에서도 2025년까지 RE100을 달성할 계획이다. 반면 국내에선 이 숫자가 2.7%(2021년 기준 500GWh)로 고꾸라진다. 국내 재생에너지 발전량이 턱없이 부족한 탓이다. 삼성전자는 더구나 베트남(휴대전화)과 한국(반도체)에 생산시설이 몰려 있다. 글로벌 전력 사용량의 57%를 국내에서 쓴다.
그렇다고 RE100 가입을 미루기도 힘들다. 이미 RE100을 달성한 글로벌 기업이 압박하는 탓이다. 애플은 매우 적극적이다. 애플은 2018년 4월 사무실과 데이터센터, 소매점 등에서 RE100을 달성했다고 밝혔다. 2020년 7월엔 부품 조달부터 서비스 제공에 이르는 전 사업 활동에서 2030년까지 RE100을 달성하겠다고 선언했다. 온실가스 순배출량도 함께 0으로 만들 계획이다. 삼성전자의 경쟁사인 대만 반도체회사 티에스엠씨(TSMC)는 2020년 발 빠르게 RE100에 가입했다. 국내에선 에스케이 계열사들이 일찌감치 RE100에 가입했다. 업계에선 에스케이하이닉스 매출의 13%가량이 애플에서 나오는 것으로 알려졌다. 2021년 기준 애플의 공급사인 국내 기업은 삼성전자를 포함해 엘지(LG)디스플레이 등 23곳에 이른다. 조만간 RE100 달성 계획을 내놓지 않으면 이들 기업의 애플 납품이 불가능해진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너지경제연구원은 2021년 발간한 보고서에서, 한국 기업이 RE100에 참여하지 않는 경우 자동차(-15%)와 반도체(-31%), 디스플레이(-40%) 산업에서 수출액이 감소할 것으로 분석했다. 전력 사용량 상위 11개 주요 기업이 쓰는 전력(2020년 98TWh)을 모두 재생에너지로 대체하려면 국내 발전량의 4.5배를 확보해야 한다. 아니면 아예 국외로 공장을 이전하는 수밖에 없다.
정부도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다. 2022년 7월27일 장영진 산업통상자원부 1차관은 RE100에 가입돼 있거나 가입하려는 국내 기업들과 간담회를 열었다. 장 차관은 이 자리에서 “수출기업을 포함한 우리 기업들의 RE100 이행이 매우 중요해지지만 우리나라 재생에너지 공급 여건이 외국에 비해 불리하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장기적으로 RE100이 국제적 투자장벽으로 작용할 우려가 있다”며 “우리 기업이 원활하게 RE100을 이행하도록 구체적 정책 방향을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문제는 정부가 재생에너지 발전량 자체를 늘리는 게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상황을 해소하려는 점이다.
기업 쪽 참석자들은 이 자리에서 재생에너지 조달 비용이 부담된다며 세제 지원을 해달라고 건의했다. 또 국외에서 구입한 인증서를 국내 재생에너지 조달 실적으로 인정해달라고 했다. 모두 RE100의 근본 취지와 맞지 않는 일종의 꼼수인데도 산자부는 “RE100 인정 기준 자체가 한국에 불리하다”며 “구체적으로 (기업들의 건의안을) 논의해 RE100 주관 단체인 시디피(CDP)와 협의하겠다”고 했다.
김진효 한국탄소금융협회 이사(변호사)는 “RE100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 중 하나는 전력을 사용하는 현지 국가나 지역 안에서 RE100의 이행 수단을 확보하는 것”이라며 “(재생에너지를 통해 온실가스를 줄이겠다는) RE100의 기본 전제를 무너뜨리는 예외를 시디피가 허용할 리 만무하다”고 말했다.
현대차그룹 LNG발전소 계획 보류태양광, 풍력 같은 재생에너지를 확대하는 근본 대책이 시급하지만, 현 정부는 오직 친원전에만 골몰해 있다. 2022년 7월5일 발표한 ‘새 정부 에너지정책 방향’은 원전 비중을 2030년까지 30%로 늘리는 원전산업 부흥에 방점이 찍혔다. 재생에너지를 2040년까지 30~35%로 확대하려던 문재인 정부 계획은 사실상 축소될 전망이다. 결국 장기적으로 RE100과 관련한 국내 기업의 경쟁력은 훼손될 수밖에 없다.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 시절인 2022년 2월 대선 텔레비전 토론에서 처음 들은 말이라는 듯이 “RE100이 뭐냐”고 되물은 바 있다. 2022년 4월 RE100에 가입한 현대차그룹의 경우 RE100 가입 직후 184㎿ 규모의 엘엔지(LNG·액화천연가스)발전소를 새로 짓겠다고 밝혔다가 RE100을 만든 더클라이밋그룹의 해명 요구를 받고 계획을 보류했다. 모두 RE100과 관련해 안이한 인식을 드러내주는 사례다.
기후활동가그룹 플랜1.5의 권경락 공동대표는 “RE100 주관 단체인 더클라이밋그룹은 연간 보고서에서 한국을 RE100을 시행하기에 가장 힘든 시장 1위로 꼽기도 했다”며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원전 수출이 아니라 입지 규제에 막혀 있는 재생에너지를 빨리 늘리는 것인데 현 정부의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하다”고 말했다.
박기용 기자 xe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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