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를 쓰고 국민이 내는 돈은 ‘전기세’일까, ‘전기요금’일까? 답은 전기요금이다. 주식회사 한국전력(한전)이 파는 전기를 소비자가 사는 데 치르는 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전기세라는 말도 많이 쓴다. 전력이 가진 공공재 성격 때문에 사람들은 전기요금을 국가에 내는 세금과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다.
여름마다 반복되는 딜레마
한전의 지분 구조도 전기요금과 전기세를 혼동케 한다. 2019년 3월 기준 한전의 최대주주는 대한민국 정부(32.90%)다.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이 18.20%, 국민연금공단이 7.18%의 한전 주식을 갖고 있다. 나머지 주식은 외국인 주주와 국내 소액주주가 보유한다. 이런 이유로 매년 여름을 앞두고 ‘누진제’가 쟁점이 될 때마다 ‘딜레마’에 빠지는 일이 반복된다. ‘요금폭탄’을 호소하는 국민 여론을 외면할 수 없는 정부는 누진제 한시적 완화를 결정하는데 이는 곧 한전의 적자로 연결된다. 이에 소액주주들은 반발하며 소송을 예고한다. 개별 주주의 이익을 넘어 한전 적자는 추후 전기요금 인상을 압박하는 요소로 다시 작용해 국민 부담으로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더운 여름이 지나면 이 ‘불편한 진실’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 는다.
정부와 한전은 매년 논란이 돼온 주택용 전기요금 누진제 개편에 칼을 빼들었다. 지난해 12월 구성한 ‘전기요금 누진제 티에프(TF)’가 만든 세 가지 개편안을 6월3일 공개했다. 개편안은 현행 3단계인 누진제를 여름에만 구간을 조정하거나(1안), 전기를 많이 쓰는 3구간 사용자의 부담을 여름에만 덜어주거나(2안), 아예 누진제를 폐지(3안)하는 것으로 나뉜다. 누진제 티에프는 토론회·공청회·온라인 의견 수렴(한전 누리집)을 통해 세 개편안 가운데 하나를 뽑아 한전에 권고하고, 정부는 6월 안에 최종안을 확정할 방침이다.
현행 누진제는 200㎾h 이하 사용량에는 ㎾h당 93.3원, 201~400㎾h 사용량에는 187.9원, 400㎾h 초과 사용량에는 280.6원을 부과한다. 전기 사용량이 많을수록 요금이 배로 뛰는 누진제는 그동안 계속 논란이 됐는데 지난해 기록적인 폭염이 닥치면서 소비자 불만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누진제 티에프는 400㎾h 이상 쓴 누진 3구간 가구 비율(연간 9.4%)이 지난해 8월 41.3%로 훌쩍 뛰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박종배 누진제 티에프 위원장(건국대 교수)은 “여름철엔 일단 요금 불안을 해소해야겠다는 취지로 3개 안을 도출했다”고 밝혔다. 3개 개편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여름철(7~8월)에만 누진제 1구간 0∼300㎾h, 2구간 301∼450㎾h로 조정한다. 요금은 1구간 ㎾h당 93.3원, 2구간 187.9원, 3구간 280.6원을 그대로 유지하는데 평소 2~3구간에 속했던 가구가 혜택을 받는다. 2018년 사용량을 기준으로 하면 누진제가 적용되는 2250만여 가구 중 1629만 가구에 월평균 1만142원(할인율 15.8%) 할인되는 효과가 있다. 현행 누진제 틀은 유지하는 방안이다.
② 여름철에만 전기 소비가 많은 3구간 가구에 2구간 요금(280.6원→187.9원)을 적용한다. 평년(2017년) 전기 사용량을 기준으로 하면 385만 가구에 1만4217원(할인율 15.4%) 할인되는 효과가 있다. 폭염(2018년) 사용량을 기준으로 하면 609만 가구가 1만7864원(할인율 17.2%) 할인 혜택을 받는다. 전기를 많이 쓰는 가구가 혜택을 받는다.
③ 누진제 폐지다. 모든 가구에 ㎾h당 125.5원 단일 요금을 적용한다. 평년(2017년) 사용량을 기준으로 하면 811만 가구가 7508원(할인율 14.0%) 할인 혜택을 받지만, 전기 소비가 적은 1427만 가구는 월평균 4361원 요금이 오를 수 있다. 폭염시(2018년) 사용량 기준으로는 877만 가구가 9951원(할인율 17.1%) 할인 혜택을 받지만, 1416만 가구는 4335원(인상률 23.9%)을 더 낸다. 여름철 전기요금은 적게 내지만 봄·가을·겨울 전기요금은 상향 평준화할 수 있다.
더 많은 미세먼지, 더 빠른 기후 재앙
3개 개편안 가운데 1·2안은 전기요금 인상이 없고 3안은 전기를 적게 쓰던 가구의 전기요금이 오른다. 모두 전력을 많이 쓰는 가구에 혜택을 주는 방식이라 소비자 부담은 줄어들 수 있다. 하지만 요금으로 전기 소비를 어느 정도 줄여왔던 우리 에너지 정책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전문가와 시민단체는 전기 소비량이 늘어 현재 정부가 진행 중인 에너지전환(원전·석탄 발전은 줄이고 신재생에너지 비중은 늘리는 장기 계획) 정책과 엇박자가 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누진제 개편안 공개와 함께 열린 ‘주택용 전기요금 개편 전문가 토론회’에서 박호정 고려대 그린스쿨 대학원 교수는 “요금 할인을 계속하면 전기 수요량이 늘어날 텐데, 이를 어떻게 관리할지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 에너지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사단법인 에너지전환포럼은 6월5일 보도자료를 내어 “전기요금을 낮춘다는 것은 전기를 더 많이 소비하도록 하는 것이다. 석탄화력발전과 원자력발전이 전체 발전량의 70~80%인 국내 상황을 감안할 때 더 많은 원자력발전과 석탄화력발전소를 가동하겠다는 정책 결정이다. 이것은 더 많은 핵폐기물, 더 많은 미세먼지, 더 빠른 기후 재앙을 초래할 것이다”라며 누진제 개편안을 비판했다.
개편안이 적용되면 한전이 최대 2500억원 이상 부담을 떠안는 것도 논란이 될 수 있다. 지난해 여름철 전기요금 한시적 할인을 한 뒤 한전은 3611억원의 부담을 안았다. 정부가 이를 보전해주기로 했지만 국회에서 제동이 걸렸고 한전이 90%를 부담했다. 이는 한전 적자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토론회에서 권기보 한전 영업본부장은 “요금 인하가 아니라 정부 재정이나 전력산업기반기금(전기요금에서 일정 부분 적립)을 활용한 저소득층 직접 지원이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원가 공개 등 근본적 개편 필요해
정부는 6월4일 ‘3차 에너지기본계획’을 확정했다. “2040년까지 신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을 30~35%로 확대하고, 석탄발전은 과감히 축소하며, 원전은 점진적으로 감축한다”는 목표를 밝혔다. 전력 수요를 관리하지 않고서는 이루기 힘든 목표다. 이렇다보니 누진제 개편에 논의를 집중할 게 아니라, 아예 전기 생산 원가를 공개해 투명성을 높이고 전기 생산에 드는 사회·환경 비용을 원가에 반영하는 등 전기요금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개편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한겨레21>이 기존 구독제를 넘어 후원제를 시작합니다. <한겨레21>은 1994년 창간 이래 25년 동안 성역 없는 이슈 파이팅, 독보적인 심층 보도로 퀄리티 저널리즘의 역사를 쌓아왔습니다. 현실이 아니라 진실에 영합하는 언론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투명하면서 정의롭고 독립적인 수익이 필요합니다. 그게 바로 <한겨레21>의 가치를 아는 여러분의 조건 없는 직접 후원입니다. 정의와 진실을 지지하는 방법, <한겨레21>의 미래에 투자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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