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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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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형 직불제로 농정 틀 바꾼다

농정개혁TF, 농업예산 전면 재편안 제시…

환경보호 등 농민의 사회적 책임 강화
등록 2018-11-15 00:29 수정 2020-05-02 19:29
문재인 정부 농정개혁TF 위원들이 10월30일 활동 결과 발표에 앞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제공

문재인 정부 농정개혁TF 위원들이 10월30일 활동 결과 발표에 앞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제공

‘스위스 농업과 농정, 우리의 모델이 될 수 있을까?’

2011년 농업계의 민간 싱크탱크인 GS&J인스티튜트에서 발표한 보고서 제목이다. 내용은 충격적이다. 2009년 기준으로, 스위스의 농가당 평균 직불금(정부에서 받는 직접 지불금) 수입은 무려 5600만원(한국의 42배), 농민 1인당으로 계산하면 2천만원이었다. 농지 1㏊(1만㎡·3025평)당 직불금도 320만원(한국의 3.5배)에 이르렀다. 당연히 농가 소득에서 직불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었다. 평야지에선 54%, 경사지는 69%, 산악지는 무려 95%를 차지했다. 전체 농식품 예산에서 직불금이 차지하는 비중도 74.3%나 됐다.

직불금 정책이 스위스의 농정이고, 직불금이 스위스 농업과 농가의 존립 조건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스위스의 직불금은 전체 농가의 절대 소득을 지탱하는 강력한 ‘농민 기본소득’이었다. 스위스뿐 아니라, 독일도 비슷한 공익형 직불금 제도, 사실상 농민 기본소득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 농정개혁 지각 시동
농정개혁TF 위원장을 맡은 박진도 지역재단 이사장이 10월30일 ‘농정의 틀, 이렇게 바꾸자’는 기조 발제를 하고 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제공

농정개혁TF 위원장을 맡은 박진도 지역재단 이사장이 10월30일 ‘농정의 틀, 이렇게 바꾸자’는 기조 발제를 하고 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제공

10월30일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의 농정개혁TF(태스크포스·전담팀)에서 ‘문재인 정부의 농정개혁 방향과 실천 전략’을 발표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 농정개혁 방향을 발표한 것 자체가 이번이 처음이다. 무려, 정부 출범 1년 반 만이다. 새로운 변화에 농업계의 기대도 크다.

지난해 5월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뒤 농정은 무중력 상태나 다름없었다. 올해 초에는 농림축산식품부 장관과 청와대 농어업 비서관이 동시에 지방선거에 출마하는 난감한 사태가 벌어졌다. 상당 기간 농정 공백이 이어졌고 지금껏 농업계의 불만이 폭발 지경으로 치달아왔다. 농정개혁TF를 이끈 박진도 지역재단 이사장은 “농정개혁의 골든타임이 지나가고 있다는 안타까움이 컸고, 지난 5월 정해구 정책기획위원장의 동의를 받아 총대를 메고 농정개혁TF를 꾸렸다”면서 “‘농정의 틀을 바꾸자’는 데 뜻을 같이한 전문가들이 참여했다”고 말했다.

이날 제시된 문재인 정부의 핵심 농정개혁 방향은 스위스형에 가까운 ‘(공익형) 직불제 중심 농정 패러다임 전환’이다. 발표를 맡은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이명기 박사는 “직불제(직접지불제)라는 지금의 정책 명칭을 농업기여 지불제로 변경할 것”을 제안했다. ‘농업기여’란 말로 공익형의 취지를 분명히 하겠다는 뜻이다. 또, 쌀 중심으로 운영되는 8개 직불제를 기본형과 가산형 둘로 나누는 개편안을 내놓았다. 쌀과 밭작물을 재배하는 기본적 공익 기능에 지급하는 기본형 직불금과 환경·생물다양성·생태·경관·동물복지·청년 농부 등 추가적 공익 기능에 지급하는 가산형 직불금으로 나누겠다는 것이다.

2022년 농가당 월 50만원 지원

새로운 직불제 도입으로 농정과 예산을 전면 재편하겠다는 의지도 분명히 했다. 2019년 직불제 예산은 2조2천억원, 농업 예산의 20%에도 못 미친다. 그나마 직불제 예산의 80% 이상이 쌀 생산에 치우쳐 있어, 농업의 다양한 공익적 기능을 유도하기엔 한계가 뚜렷하다. 상위 10%의 대규모 농가에서 직불금의 46%를 수령한다는 문제도 있다. 농정개혁TF는 직불제 예산을 2022년까지 농업 예산의 30%인 5조2천억원으로, 해마다 1조원씩 대폭 늘리는 방안을 제시한다. 기존 농업 예산을 줄이고 시장 왜곡적인 쌀변동 직불제를 단계적으로 폐지해 연 5천억원을 확보하고, 농업 예산을 늘려 나머지 5천억원을 확보한다는 구상이다.

현재 전체 농가 수가 100만 가구 안팎에 그친다는 점을 고려하면, 5조원의 직불제 예산이면 농가당 연평균 500만원 가까운 금액을 지급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가짜 농부’들의 직불금 부당 수령을 엄격히 걸러낸다면, 환경 생태 농사에 충실한 일부 농가에서 월 100만원의 직불금 소득을 올리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번 농정 개편안은 농가 스스로 사회적 공공재를 공급하는 ‘사회적 책임 농업’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퍼주기 농업 예산’ 논란에 익숙한 만큼 직불제 확대를 퍼주기 확대로 비난하는 여론의 공세도 감당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공익형 직불제를 시행하는 유럽 나라들이 농가에 엄격한 상호 의무준수 제도를 도입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환경을 보전하고, 경관을 가꾸고, 동물복지를 담당하는 사회적 책무를 농가 직불금의 반대급부로 부과할 뿐 아니라, 엄격한 검열로 ‘가짜 공익형’을 걸러내는 것이다. 상호 의무준수를 위반한 농가는 직불금을 깎이는 등의 무거운 징벌을 받는다.

대통령 직속 농특위 설치 요구

이처럼 농가의 사회적 책임이란 직불제의 또 다른 축이 맞물려 돌아가면서, 유럽 여러 나라의 도시민이 농업 직불제를 지지하는 건강한 사회적 합의가 굳건해질 수 있었다. 그 결과, 경작지가 늘어나고, 농약과 화학비료 사용량은 줄어들고, 동물복지 농장이 확산되고, 농촌으로 인구가 분산되는, 공익형 직불제의 경제·환경·사회적 선순환 효과가 이어졌다. 스위스의 경우 1996년 농업의 다원적 기능 유지란 목표를 연방 헌법에 도입하면서, 공익형 직불제 전면 도입의 헌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농정개혁TF에서는 ‘직불제 중심 농정패러다임 전환’과 함께, 농정개혁 전환을 위한 농어업·농어촌 특별위원회(농특위)를 법률에 의한 대통령 직속 상설 자문기구로 설치할 것을 요구했다. 농특위 설치는 문재인 대통령의 선거공약이었고, 이를 위한 법률이 국회 상임위에 상정돼 있다. 이 밖에 지방분권과 협치 중심의 농촌 정책 전환과 ‘농장에서 식탁까지’ 통합적인 먹거리 정책 수립 등을 농정의 틀을 바꾸는 대표적인 정책으로 제시했다.

김현대 선임기자 koala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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