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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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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D ‘동네북’이 된 한국

최근 정부 상대로 잇따르며 청구금액만 6조원 넘어…

FTA 독소조항 못 막은 대가 치르나
등록 2018-10-27 04:47 수정 2020-05-02 19:29
문재인 대통령이 9월24일(현지시각) 미국 뉴욕 팰리스호텔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안에 서명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9월24일(현지시각) 미국 뉴욕 팰리스호텔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안에 서명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설마설마했던 악재가 한꺼번에 터지려는 걸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당시 대표적 독소조항으로 지적된 ‘투자자-국가 간 중재’(ISD)가 최근 정부를 상대로 잇따라 제기됐다. 누적된 청구 금액이 무려 6조원을 넘었다. ISD에서 질 경우 청구된 돈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변호사 비용과 이자 등을 물게 돼 엄청난 규모의 세금 낭비가 불가피하다.

선진국에 유리한 중재 구조

지난 7월 미국계 헤지펀드인 엘리엇과 메이슨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박근혜 정부의 부당한 개입(국민연금에 합병 찬성 강요)으로 손해를 봤다며 ISD를 제기한 데 이어, 스위스 승강기 제조업체 쉰들러가 10월11일 현대엘리베이터의 유상증자 허위 공시를 금융감독원이 제대로 감독하지 않아 2대 주주로서 손실을 보았다며 ISD를 제기했다. 앞서 투기자본 론스타가 2012년 제기한 5조3천억원 규모의 ISD까지 포함하면 청구 금액만 6조6천억원에 이른다.

이 와중에 지난 6월7일 이란의 다야니 가문이 제기한 ISD에서 730억원을 다야니 쪽에 물어주라는 중재 판정이 내려져 정부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이 사건은 ISD에서 우리 정부가 진 첫 사례인데, 애초 쉽게 이길 것으로 예상했던 것이라 충격이 컸다. 다야니 쪽은 2010년 한국자산관리공사가 대우일렉트로닉스 매각 과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계약이 불발됐다고 주장하며 2015년 국제상거래법위원회(UNCITRAL)에 ISD를 제기했다. 한국과 이란 사이에 맺어진 양자투자협정(BIT)을 근거로 한 것이다. 정부는 영국계 글로벌 로펌 프레시필즈와 율촌을 대리인으로 선정해 대응했으나 중재 판정부 설득에 실패했다. 정부는 현재 중재 판정 취소 소송을 영국 법원에 낸 상태다.

ISD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선진국으로 변신한 열강들이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의 저개발국가에 해외투자 형태로 진출하면서 자국의 해외투자자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제도다. 저개발국가들이 전후 정치적 불안으로 자주 정권이 교체되고 이 가운데 일부 배타적 민족주의를 표방한 정부가 집권하면서 외국인 투자자 자산을 몰수하는 일이 벌어지자 이를 막기 위한 안전장치가 필요했다.

자본선진국은 투자를 유치하려는 국가와 양자투자협정 또는 자유무역협정을 맺을 때 ISD를 포함했다. 하지만 ISD가 투자유치국 정부의 정당하고 합리적인 공공정책을 무력화하고 사법주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어 투자유치국들의 불만이 꾸준히 제기됐다. 또 ISD를 진행하는 중재 판정부의 공정성도 문제가 됐다. 세계은행 산하 국제중재기관인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가 주로 ISD를 진행하는데(그 외는 국제연합 국제상거래법위원회(UNCITRAL) 중재 규칙이 적용된다), 세계은행이 미국과 유럽 자본선진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중재 판정이 공정하지 않다는 지적을 받게 됐다. 이로 인해 베네수엘라(2012), 볼리비아(2007), 에콰도르(2009) 등 중남미 국가들을 중심으로 ISD 시스템에서 탈퇴하거나 판정에 불복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ISD에 대한 반발은 저개발국가만의 일이 아니다. 경제 대국인 오스트레일리아(2011)와 인도(2012)는 앞으로 맺을 양자투자협정이나 자유무역협정에서 ISD를 배제하겠다고 선언했다. 일본이 주도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서도 회원국들 사이에 ISD를 적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 때문에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일방적 요청에 따라 시작된 한-미 자유무역협정 재협상에서 자동차 분야를 양보하는 대신 ISD의 독소조항을 고쳐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지만, 지난 9월 발표된 재협상 결과는 ISD의 건재함만 재확인했다.

중재인 명단에 한국인 10명, 미국인 200명
론스타가 제기한 ‘투자자-국가 간 중재’(ISD) 결과가 최종변론이 끝난 지 2년이 넘도록 나오지 않고 있다. 론스타코리아 사무실. 김진수 기자

론스타가 제기한 ‘투자자-국가 간 중재’(ISD) 결과가 최종변론이 끝난 지 2년이 넘도록 나오지 않고 있다. 론스타코리아 사무실. 김진수 기자

ISD의 문제점은 비단 결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ISD를 당하는 순간부터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구조적 문제도 있다. ISD는 소송이 아닌 중재다. 소송은 법원이라는 공적 기구를 통해 분쟁을 해결하는 반면, 중재는 분쟁 당사자끼리 사적으로 해결하는 구조다. 그래서 중재를 진행하는 비용 일체(중재 판정부 수당, 중재인 수임료 등)를 당사자(중재에서 진 쪽)가 부담해야 한다. 중재 판정부는 분쟁 당사자가 1명씩 선정하는 중재인과 양쪽이 합의해 선정하는 의장 중재인 등 3명으로 구성된다. 중재인은 소송에서 변호사와 같은 역할을 한다. 따라서 판정을 좌우하는 인물은 의장 중재인이다. 그래서 의장 중재인을 누구로 선정하느냐가 중요한데, 문제는 중재인의 ‘인력풀’이 특정 국가에 유리하게 돼 있다는 것이다. ISD의 대부분을 진행하는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의 중재인 후보 명단에 한국인은 10명이 채 안 되지만 미국인은 200명이 넘는다.

전문성과 언어장벽(영어 사용) 문제로 중재인은 미국과 영국 등 대형 로펌들이 독식한 실정이다. 몸값도 비싸다. 송기헌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국정감사 때 낸 자료를 보면 론스타의 ISD와 관련해 정부가 2013년부터 2017년까지 쓴 중재인 비용(법률 자문료 등 포함)은 400억원이 넘는다.

값비싼 대가를 치르더라도 당사자에게 남는 게 있다면 그나마 위안이 될 것이다. ISD가 동시다발적으로 상당 기간 진행되면 담당 부처에 노하우가 쌓일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실상은 이와 거리가 멀다. 중재인으로 선정된 외국 로펌들은 김앤장과 광장, 태평양 등 국내 대형 로펌들을 파트너로 선호한다. 세금을 들여 대형 로펌들만 좋은 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법조계에서 정부법무공단 소속 변호사들을 ISD 업무에 참여시키자는 제안이 나왔지만 반영되지 않았다. 법무부 관계자는 “경험과 능력 문제로 (법무공단을 참여시키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결국 ISD를 당하지 않는 게 국고를 지키는 최선의 방책인 셈이다.

ISD 안 당하는 게 최선의 방책

이런 맥락에서 최근 스위스 승강기 제조업체인 쉰들러의 ISD 제기는 여러모로 아쉬운 점이 있다. 스위스는 한국과 FTA를 맺은 유럽연합(EU) 회원국은 아니지만, 투자협정을 맺은 유럽자유무역연합(EFTA) 회원국이다. 쉰들러는 앞서 ISD를 제기한 론스타와 엘리엇, 메이슨과 같은 헤지펀드와 전혀 다른 성격의 자본이다. 론스타 등은 단기간에 주가를 띄워 차익을 노리는 투기자본 성격이 강한 데 반해, 쉰들러는 제조업체로 투자한 기업의 성장을 통해 이익을 얻는 장기 투자자다.

쉰들러는 2006년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 경영권 다툼을 벌이던 KCC(당시 금강고려화학)로부터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25.5%를 사들여 이 회사의 2대 주주가 됐다. 쉰들러는 현 회장에게 지분 매입 사실을 알린 뒤 현 회장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는 서신을 보냈다. 현 회장도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쉰들러가 KCC를 비롯한 현대가의 경영권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백기사’ 구실을 할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쉰들러는 이후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율을 35%까지 늘렸다.

하지만 현 회장이 그룹 주요 계열사인 현대상선의 자금난 해소를 위한 6건의 유상증자에 현대엘리베이터를 참여시키면서 쉰들러 쪽과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현대상선의 실적 부진으로 그만큼 현대엘리베이터의 기업 가치가 훼손되고, 동시에 쉰들러의 지분율도 축소(35→15.53%)됐기 때문이다. 쉰들러는 가처분 소송과 주주대표 소송 등으로 현 회장에 맞섰다.

쉰들러가 정부를 상대로 ISD를 제기한 것은 당시 금융감독원이 현대상선의 유상증자를 제대로 감독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유상증자가 현 회장의 경영권 유지를 위한 것이었는데, 당시 증권신고서에는 유상증자의 목적을 허위로 기재해 불순한 의도를 숨겼다는 것이다. 쉰들러 쪽은 10월10일 법무부에 보낸 중재 신청서에서 “2013년부터 2015년까지 금감원과 금융위원회에 6차례 민원을 제기했지만, 금감원 등은 어떤 조사도 하지 않았다. 증권 신고서 내용의 허위 여부를 검토하지도 않았다”고 주장했다.

금융 당국은 쉰들러 쪽의 일방적인 주장이라고 일축했다. 당시 현대상선이 제출한 증권신고서 내용 중에 미흡한 부분을 수정, 보완하도록 지시하는 등 모두 11차례 정정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현대 쪽이 유상증자로 확보한 자금을 어디에 썼는지 사후에 확인하는 것은 금융 당국도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설명도 뒤따랐다.

사전 협상 때 정부가 성의 보여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왼쪽 넷째)이 9월18일 남북 정상회담 특별수행원 자격으로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열린 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왼쪽 넷째)이 9월18일 남북 정상회담 특별수행원 자격으로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열린 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그러나 법조계에서는 현 회장의 과도한 경영권 방어 행위에 근본 원인이 있는 만큼 정부가 쉰들러와 사전 협상에서 좀더 성의 있는 태도를 보여야 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앞서 쉰들러 쪽은 3월과 7월 두 차례 정부에 협의 요청 서한을 보내 진지한 협상을 요청한 바 있다. 하지만 쉰들러 쪽은 정부 관계자에게 성의 있는 답변을 듣지 못했다고 판단한 것으로 전해졌다. 투자분쟁 업무에 밝은 한 변호사는 “쉰들러는 헤지펀드가 아닌 선의의 장기 투자자라는 점에서 다른 ISD 사건들과 성격이 다르다. 국내 재벌들의 경영권 세습과 계열사 부당 지원, 이에 대한 정부의 감시 소홀 등의 문제가 부각되면서 ‘한국이 과연 장기적으로 믿고 투자할 만한 곳인가’라는 의문이 해외에서 제기될 수 있다”고 말했다.

국내 ISD의 ‘원조’에 해당하는 론스타 사건은 2016년 6월 최종 변론 기일을 마친 지 2년이 훌쩍 지났는데도 아직 최종 판정이 나지 않았다. 론스타 사건은 청구 금액이 무려 5조원이 넘기 때문에 중재에서 진다면 그 충격은 헤아리기조차 쉽지 않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최종 판정이 언제 나올지 아직 확실치 않다. 판정 결과가 어느 한쪽의 전패나 전승으로 나오지는 않을 것 같다”고 했다.

론스타 사건의 쟁점은 두 가지다. 론스타는 국세청이 외환은행 매각 수익금 4조6천억원에 부과한 세금 8500억원과 그동안 발생한 이자까지 포함해 1조7천억원을 돌려줄 것을 주장한다. 또 외환은행 매각에 한국 금융 당국이 부당하게 개입해 3조3800억원을 손해 봤다고 주장한다. 2003년 1조3800억원에 사들인 외환은행을 2007년 5조9376억원에 HSBC에 매각할 수 있었지만, 검찰 수사와 법원 재판 등을 이유로 금융 당국이 매각 승인을 미루는 바람에 2012년 하나금융에 3조9157억원에 팔게 돼 그만큼 손해를 봤다는 것이다.

통상 정책에 대한 불신이 더 큰 타격

중재 판정부가 국세청 과세가 부당하다고 판정하면 론스타로부터 거둔 세금을 돌려주면 되기 때문에 타격은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외환은행 매각에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판정이 나오면 배상금과 그에 따른 이자까지 물기 때문에 충격은 더 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부에 더 큰 타격은 통상 정책에 대한 불신이다. 한–미 FTA 자유무역협정 협상 때 독소조항이라는 전문가들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ISD 도입을 막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 중재 건에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국고를 낭비하게 됐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당시 통상 정책 담당자들은 “ISD는 해외에 투자하는 국내 기업들도 혜택을 볼 수 있다”는 논리로 독소조항이라는 지적을 일축했다. 송기호 변호사는 “중국의 사드 보복이나 트럼프 행정부의 일방적 관세 부과에 대응해 국내 기업이 ISD를 제기할 수 있겠나. ISD가 국내 기업을 보호할 수 있다는 논리는 현실과 전혀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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