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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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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대수익을 시민에게로

제18차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대회 참가기…

“기본소득은 깊은 인간애에 바탕을 둘 때만 비로소 가능”
등록 2018-09-22 18:00 수정 2020-05-03 04:29
핀란드 탐페레에서 8월24일(부터 26일까지) 열린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의 첫 전체 강연자인 필립 앨스턴 유엔 인권이사회 극빈·인권 특별보고관의 강연을 듣기 위해 모인 참가자들.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핀란드 탐페레에서 8월24일(부터 26일까지) 열린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의 첫 전체 강연자인 필립 앨스턴 유엔 인권이사회 극빈·인권 특별보고관의 강연을 듣기 위해 모인 참가자들.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핀란드인들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도시’ 탐페레에서 8월24일부터 26일까지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대회’(Basic Income Earth Network·이하 비엔 대회)가 열렸다. 비엔 대회는 세계 기본소득 연구자와 활동가가 토론하고 교류하는 ‘기본소득 축제’다.

100년 전인 1918년, 탐페레는 핀란드 내전으로 초토화되었다. 탐페레는 전투적 노동운동의 중심지였고, 많은 노동자가 좌파인 ‘적군’(red army)에 가담해 우파인 ‘백군’(white army)과 싸웠다. 백군은 1918년 3월 탐페레에 대공세를 퍼부었다. 방어하던 적군 병사 1천 명이 숨진 뒤 도시는 백군에게 넘어갔다. 적군 병사들은 포로수용소로 끌려가 질병과 학대로 또 1천 명 이상 죽었다. 비엔 대회가 열린 탐페레 대학교는 노동자들이 묻힌 묘지에서 가깝다.

핀란드가 복지국가로 간 배경에는 내전의 상처를 치유하고 갈등을 통합해야 하는 필요성이 있었다. 노동계급에 기반을 둔 사회민주당과 농민을 대변한 중앙당은 자주 연합하면서 핀란드 복지체제를 만들었다. 노동자들이 선호하는 사회보험 체계와 농민이 선호하는 사회수당 체계를 결합한 보편 복지는 그렇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핀란드는 2017년부터 세계 최초의 전국적 기본소득 실험을 하고 있다.

핀란드의 실험 정신은 이번 제18차 비엔 대회의 주제하고도 만난다. ‘기본소득과 새로운 보편주의, 21세기 복지국가를 다시 사고하자.’ 많은 한국 사람들이 핀란드식 복지국가를 동경하지만, 거기 속한 많은 사람은 그 체계의 한계를 분석하고 그 너머로 나아가려 한다. 그 과제의 중심에 기본소득이 있다.

44개 나라 320여 명 참가

대회 첫날 아침, 행사장인 탐페레대학 본관에는 한국과는 달리 안팎에 펼침막 하나 걸려 있지 않았다. 차분하던 행사장은 곧 여러 나라에서 온 참가자들로 떠들썩해졌다. 비엔 공동 창립자이자 기본소득 운동의 산증인인 필리프 판 파레이스, 1970년대 캐나다 매니토바주 도핀에서 실시된 기본소득 실험 ‘민컴’ 프로젝트의 결과를 최초로 분석한 에벌린 포르제 등 전설적 인물들도 나타났다. 대회 관계자에 따르면 44개 나라에서 온 320여 명이 참가 등록을 했다.

사흘 동안, 개·폐회식을 제외하고 다섯 차례의 전체 강연과 52개의 개별 세션(150명의 발표자)이 열렸다. 세션이 끝나면 참가자들은 로비에 준비된 커피를 들면서 스스럼없이 대화하고 토론했다. 언어 장벽은 있었지만 나도 금세 이 분위기에 끼었다. 하나의 아이디어에 깊이 공감하는 사람들 사이에 언어 장벽은 큰 방해물이 아니었다.

둘쨋 날 일정이 끝나고 비엔 대회 공식 만찬이 열렸다. 만찬장은 탐페레 시 노동자 회관이었는데, 대회에서 나와 인터뷰한 얀 오토 안데르손 전 오보아카데미대 경제학 교수(비엔 창립 멤버)는 “이 홀에서 1905년에 레닌이 스탈린을 처음 만났어”라고 말해 나를 놀라게 했다. 레닌은 탐페레 노동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러시아 혁명 운동에 관여했다. 탐페레 노동자들은 1905년 러시아와 핀란드를 휩쓴 총파업에 앞장섰다. 핀란드를 지배하던 러시아 황제가 양보해 핀란드는 1906년 유럽 최초로 남녀 동등 선거권을 확보한다. 여성들의 정치 참여는 보편주의적 복지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2000년 핀란드 첫 여성 대통령인 타르야 할로넨이 당선됐고(2000~2012), 그는 이번 대회 개회사를 했다.

셋쨋 날에는 세션이 끝나고 폐회식을 한 뒤 비엔 총회가 열렸다. 총회에서 가장 중요한 안건은 집행위원회 의장 선출이었는데 처음으로 경선이 치러졌다. 전 의장인 루이즈 하그(영국)가 다시 출마했고 노르웨이의 안야 아스켈란드가 도전장을 던졌다. 루이즈 하그는 비엔을 더 중요한 존재로 만들겠다고 공약했고, 안야 아스켈란드는 비엔을 좀더 민주적인 글로벌 운동으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선거 전 나는 안야와 대화할 기회가 있었는데, 내가 비영어권에서 온 사람들은 불편함이 많다고 말하자 그녀는 진지하게 내 말을 경청하고 동의를 표했다. 이 경선에는 성장하는 운동에서 공존하고 갈등하는, 강력한 중심을 세우려는 경향과 분권적 민주주의의 경향이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 의장으로 루이즈 하그가 선출됐다.

사유화된 공유재를 모두의 것으로
탐페레 풍경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탐페레 풍경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대회에서 발표된 내용들은 기본소득의 정당화 논리, 젠더 불평등·생태 위기·기술적 실업 등에 대한 대응책으로 기본소득의 가능성, 기본소득의 재원 마련 방안, 최근 주목받는 블록체인 기술과 기본소득의 접목 등 아주 다양했다. 기본소득 한국네트워크에서도 여러 연구자(강남훈·곽노완·권정임·서정희·안현효·이건민)가 발표했고 청중의 큰 관심을 받았다.

대회 발표 내용 가운데 내가 중요하다고 여긴 것은 크게 세 가지로 묶을 수 있다. 첫째, 공유재와 기본소득을 연결하는 과감하고 구체적인 제안들이 나왔다. 토지·천연자원·지적 유산 등 공유재는 사회적 부의 원천이며, 오늘날 불평등의 성격은 공유재의 특권적인 포획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강남훈·권정임 교수는 “노동만이 아니라 공유지도 사회와 경제의 기초이고, 공유지는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동등한 권리가 있다”는 관점에서 ‘공유재 자본금’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사유화된 공유재를 모두의 것으로 돌리고 임대수익을 시민에게 배당하자는 것이다. 곽노완·안현효 교수는 자연자원에서 인터넷과 주파수까지, 글로벌 공유지에서 생긴 수익을 유엔이나 제3의 국제조직이 ‘글로벌 기본소득’으로 제공하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최근 한국에 번역된 의 저자 가이 스탠딩은 ‘커먼페어’라는 개념으로 공유재에 대한 권리를 철학적으로 한층 정교하게 제시했다. 조세에 기반한 복지(웰페어)와 노동과 연계한 복지(워크페어)가 아닌 커먼페어는 공유재에 대한 권리를 사용권만이 아니라 배당권으로까지 발전시킨 개념이다.

기본소득은 결국 정치의 문제
공유재와 기본소득 세션에서 발표하는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연구자들. 왼쪽부터 권정임, 강남훈, 곽노완, 안현효 교수.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공유재와 기본소득 세션에서 발표하는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연구자들. 왼쪽부터 권정임, 강남훈, 곽노완, 안현효 교수.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둘째, 현존 사회보장제도와 기본소득의 결합 필요성이 강조됐다. 핀란드 청년녹색당 루카스 코르펠라이넨은 ‘한발 더 나아간 핀란드 기본소득 모델’을 제안하며, 사회보장 모델을 지나치게 단순화해서는 안 되며, 무조건적 기본소득·핵심 사회보장·약한 조건부 수당 등을 묶어 ‘사회보장 패키지’를 만들자고 했다.

비엔 의장 루이즈 하그도 강연에서 “기본소득은 만병통치약이 아니고 복지국가 시스템과 조합을 이루어야 사회 발전의 이상에 기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는 이번 대회에 참여한 백승호·서정희 교수 등이 쓴 (사회평론아카데미 펴냄)의 문제의식과 일맥상통한다. 기본소득이 현존 사회보장제도의 무엇을 대체하고 보완할지, 어떤 접합으로 새로운 보편주의를 구성할지 더 나아간 논의가 요청된다.

셋째, 지금 각국의 기본소득 실험이 처한 상황을 소개했다. 이 실험들 하나하나가 ‘증거에 기초한 사회정책 설계’를 위한 중요한 디딤돌이다. 핀란드 기본소득 실험 설계 과정에 참여한 올리 캉가스 박사는 일부 언론의 ‘오보’와 달리 “실험은 중단되지 않았고 실패하지도 않았다”고 힘주어 말했다. 실험 결과 분석은 2018년 말 실험이 끝나면 시작된다. 다만 현 중도보수 정부는 기본소득보다는 취업 유도에 더 방점을 찍어 이 실험이 에피소드로 끝날 위험이 다분하다. 캐나다 온타리오주 기본소득 실험이 중단된 배경에 관해 매니토바대 에벌린 포르제 교수가 설명했다. 보수당의 더그 포드(‘캐나다의 트럼프’라고 한다)는 지난 6월 온타리오 주지사로 당선되자마자 실험을 유지하겠다던 기존 약속을 깼다. “기본소득 실험은 실패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온타리오 실험 진행에 참여한 포르제 교수는 “아직 어떤 데이터도 나오지 않았다”며 주지사의 결정은 근거가 없다고 비판했다. 포르제 교수에 따르면, 실험 참가자인 한 여성이 그 전까지 아이를 위탁 가정에 맡겨두었다가 기본소득을 받으면서 아파트를 구해 아이를 데려왔는데 지급이 중단되면 월세를 내지 못해 아이를 도로 빼앗길 상황에 처했다. 기본소득 캐나다네트워크와 실험 참가자들은 정부의 선택에 항의하는 시위와 소송을 하고 있다. 기본소득 한국네트워크 박선미 사무국장이 강조하는 것처럼 “기본소득 도입은 결국은 정치의 문제다.”

‘21세기 복지국가’를 상상해야

대회가 마무리될 때 ‘새로운 보편주의’와 21세기 복지국가의 전망이 보였느냐고? 솔직히 그건 내 능력 밖이다. 그러나 대회 참가자들의 치열한 현실 분석과 진단에 비춰볼 때, 기존 복지국가들이 ‘앞서간 길’을 따라가면 된다는 생각은 그림자를 붙잡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이다. 모든 것이 변화한 21세기에 그 길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저들이 만든 20세기 복지국가를 모방할 게 아니라 저들과 함께 21세기 복지국가를 창조하고 혁신해야 한다.

대회 참가자들에게 감동을 준 애니 밀러(비엔 공동 창립자)의 폐회 연설을 인용하는 것으로 소회를 대신할까 한다. “기본소득은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에 바탕을 둘 때만 비로소 가능할 것입니다. 우리는 가장 야비하고 악한 사람에게도 ‘나는 당신을 좋아하지 않지만, 당신도 기본소득의 축복을 받길 바랍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준호 저자 기본소득 한국네트워크 운영위원

얀 오토 안데르손 비엔 공동 창립자 인터뷰


“낮은 기본소득은 사회보험과 보완해야”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얀 오토 안데르손(사진)은 생태경제학자이며, 1986년에 현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의 전신인 기본소득유럽네트워크를 공동 창립했고, 핀란드에서 기본소득 도입 논의를 주도적으로 이끈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시민소득’(Citizen’s Income)이란 말을 널리 알렸다. 대회 첫날인 8월24일 탐페레대학에서 그를 인터뷰해 이번 대회의 주제와 핀란드 기본소득 실험에 대해 물었다.

‘새로운 보편주의’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다. 북유럽 복지국가의 특징인 보편복지가 한계에 처했다고 보는가.
북유럽 복지국가는 아동수당·학생수당·질병수당·공적연금 등 다양한 보편적 복지 제도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제도들이 모두 분리되어 있어 복잡하고 까다롭다. 켈라(KELA·핀란드 사회보험기관)가 관할하는 수당 종류가 수백 가지에 이른다. 제도 사이에는 자격 심사와 대기 기간이 있고 수급자에게 정부 간섭도 늘었다. 또한 대상자가 많이 낼수록 많이 돌려받는 사회보험 시스템과 모두가 동등하게 받는 보편적 재분배 시스템 사이에 긴장도 커졌다. 이런 것들이 보편주의를 재구축해야 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핀란드 기본소득 실험이 끝나간다. 한계와 의의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실험 참가자가 기본소득과 별개로 다른 여러 복지 급여를 받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실험 결과를 해석하는 데 어려움을 줄 수 있다. 또 다른 문제는 미디어의 관심이다. 실험 참가자인 어떤 사람들은 언론 인터뷰로 무척 유명해졌다. 그는 전세계에서 온 언론과 인터뷰하고 심지어 독일에 초청받아 가기까지 했다. 기본소득이 아니라 언론에 의해 생긴 명성이 그의 삶을 바꿨다. 이것은 실험으로 보려는 결과하고는 관계가 없다.
실험의 의의 가운데 하나는 기본소득과 연관된 복지 개혁의 필요성에 정당들이 전보다 공감한다는 점이다. 다음 선거에 승리할 것으로 보이는 사회민주당도 전보다는 기본소득에 우호적이다. 사회민주당의 청년 조직이 지난여름의 당대회에서 복지 개혁안을 제출했다. 기본소득 제안은 아니다. 음의 소득세, 유니버설 크레디트(여러 수당을 통합한 지원 체계), 참여소득을 결합한 계획이다. 그들은 이 안을 ‘소득 수준 보장’이라 한다.
한국처럼 복지 수준이 아직 낮은 곳에서 기본소득을 도입할 때 낮은 수준에서 시작해도 괜찮을까?
괜찮다고 본다. 낮은 기본소득은 사회보험과 참여소득 등으로 적절히 보완해야 할 것이다. 자격 심사가 너무 높고 까다롭지 않으면 시작 단계에서 이것이 있다고 꼭 나쁘다 할 수는 없다. 브라질의 보우사 파밀리아(빈곤층 가족에 조건부로 지급하는 수당)는 기본소득과는 다르지만 사람들은 “어느 정도는 기본소득”이라고 말한다. 장기적으로 보고 어떤 프레임으로 접근할지 생각해야 한다. 처음에는 기존 복지 제도 위에 기본소득을 도입해야 할 텐데, 빈곤층 부조제도가 있다면 거기서 시작해 급여를 높이고 범위를 확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본소득을 복지국가 패키지의 일부로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녹취·정리 목화균,
사진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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