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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한 외아들’의 배신? 현정은의 ‘기구한 운명’

현대상선, 주인 바뀌자 현정은 회장 배임 혐의 고소… 현대그룹 “죽어가는 자식 살려놨더니… ”

현대그룹, 상선 매각 뒤 사세 흔들… 경영권 다툼 트라우마 현 회장의 ‘경영권 집착증’도 원인
등록 2018-01-23 16:12 수정 2020-05-03 04:28
북한의 평창겨울올림픽 참가 선언을 계기로 남북관계에 훈풍이 불고 있다. 대북사업을 하는 현대그룹엔 모처럼 찾아온 기회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왼쪽)이 2009년 8월16일 방북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가운데) 등과 기념촬영한 모습. 연합뉴스

북한의 평창겨울올림픽 참가 선언을 계기로 남북관계에 훈풍이 불고 있다. 대북사업을 하는 현대그룹엔 모처럼 찾아온 기회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왼쪽)이 2009년 8월16일 방북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가운데) 등과 기념촬영한 모습. 연합뉴스

공부 잘하는 딸들을 희생시키며 애지중지 키운 외아들이 부잣집 데릴사위가 되자 부모를 배신한다? ‘막장 드라마’의 단골 소재 같은 사건이 현대그룹에서 일어나 재계의 입길에 오르고 있다. 해운업 위기 속에 2년여 전 산업은행으로 주인이 바뀐 현대상선이 ‘옛 주인’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 전 경영진을 배임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전임 경영진이 현대상선을 살리려는 자구책으로 체결한 물류회사 현대로지스틱스 매각 계약이 현대상선에 1천억원 이상 손실을 발생시켰다는 게 이유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한솥밥 먹던 사이에서… </font></font>

1월16일 서울 종로구 연지동 현대상선 사옥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장진석 현대상선 준법경영실장(전무)은 “현대로지스틱스 매각과 관련한 불공정 계약으로 현대상선은 아직까지 고통스러운 피해를 입고 있다”고 주장했다. 장 실장은 “(불공정 계약과 관련해) 현 회장이 현대그룹의 정점에 있다”고 말해 이번 고소가 현 회장을 겨냥했음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현대그룹은 그룹 내 덩치가 가장 큰 현대상선이 2016년 산업은행으로 넘어가기 직전까지 그룹 내 우량 계열사인 현대엘리베이터 등을 통해 현대상선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현대엘리베이터 2대 주주인 쉰들러(스위스 엘리베이터 제조업체)가 ‘계열사 부당 지원’이라며 소송을 내는 등 강하게 반발했지만 현 회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치 사업에 실패한 외아들에게 딸들이 모아준 생활비를 털어주는 노모처럼 현 회장은 막무가내였다. 이런 마당에 현대상선에 고소를 당한 현 회장의 심정은 어떨까. 현대그룹 관계자는 “현대상선 사옥은 현대그룹 빌딩과 마주 보고 있다. 날마다 얼굴을 맞대며 한솥밥을 먹었던 처지라 직원들도 황당해하는데, (현 회장은) 그 심정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 문제가 된 현대로지스틱스 매각 계약은 2014년부터 추진됐다. 국내 해운업이 생존의 갈림길에 들어선 때였다. 2008년 국제 금융위기와 2012년 유럽 재정위기를 거치면서 세계의 해운 업황이 급격히 악화되자 현대상선을 비롯한 국내 해운업체들도 직격탄을 맞았다. 현대상선은 2013년 말 부채비율이 1400%까지 오르자, 현대로지스틱스와 현대증권의 지분을 비롯해 팔 수 있는 자산을 모두 매각해 3조3천억원의 현금 유동성을 확보하는 자구 계획을 발표했다.

현대로지스틱스 지분 매각 방식은 매우 복잡했다. 먼저 일본계 금융회사 오릭스가 투자금 6500억원을 모아 사모투자펀드(PEF) ‘오릭스PE’를 만들고, 이 펀드가 현대로지스틱스 지분 88.8%를 인수한 뒤, 롯데그룹이 오릭스PE의 지분을 다시 인수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롯데그룹이 오릭스PE 지분을 6500억원 이하에 매입하면 펀드 투자자들은 손실을 입는 문제가 제기됐다. 그러자 현대상선이 1064억원을 펀드에 후순위로 투자해 다른 펀드 투자자들이 입을 손실을 부담해준 것이다. 후순위 투자금은 지난해 상반기에 현대상선의 손실로 전환됐다.

이뿐만이 아니다. 현대상선은 현대로지스틱스가 롯데그룹에 매각된 뒤에도 국내외 육상운송과 항만서비스 사업 등에서 5년 동안 현대로지스틱스(롯데글로벌로지스로 이름이 바뀜)만을 이용해야 한다는 조건이 걸렸다. 또 ‘롯데글로벌로지스’의 영업이익이 연 162억원에 미치지 못하면 그 차액을 5년 동안 매년 지급한다는 조건이 추가됐다. 이런 불공정한 계약이 당시 이사회 결의도 거치지 않고 이행됐다는 게 현대상선 쪽의 설명이다.

이 과정에서 당시 현대로지스틱스 지분 13.4%를 보유했던 현 회장이 직접 경제적 이득을 취했다는 주장도 나와 논란이 예상된다. 현대상선 관계자는 “현 회장이 회사가 유동성 위기를 겪는 중에 현대로지스틱스 매각 대금을 일부 가져간 정황이 포착됐다. 이런 부분은 모두 검찰 조사 과정에서 밝혀져야 한다”고 말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현대엘리베이터 직원들의 배신감 </font></font>

현대그룹은 현대상선 쪽의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한다. 이준기 현대그룹 홍보담당 상무는 “해당 계약은 당시 로펌의 법률 검토를 받은 것이다. 그 결과 배임에 해당할 만한 문제는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말했다. 당시 유동성 위기를 막기 위해 일부 불리한 조건에 계약했지만 배임에 해당할 정도의 고의성(손실이 발생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계약을 맺는 것)은 없었다는 것이다. 현대로지스틱스를 되도록 비싸게 팔려면 인수자 쪽이 요구하는 조건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다. 이 상무는 또 계약 조건은 이사회 결의 사항이 아니었다고 반박했다. 현대로지스틱스를 어디에 매각할지 등 주요 안건은 이사회 결의 사항이었지만, 계약 조건은 대표이사에게 위임됐다는 것이다.

현대그룹은 현대상선을 살리기 위해 추진했던 현대로지스틱스 매각을 ‘수혜자’인 현대상선 쪽이 문제 삼는 것에 강한 불쾌감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현대엘리베이터 직원들이 느끼는 배신감이 크다. 현대상선이 유동성 위기를 겪을 때마다 막대한 자금을 지원한 곳이 바로 현대엘리베이터이기 때문이다.

2대 주주인 쉰들러가 금융감독원 공시 자료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현대엘리베이터는 2005년부터 2016년까지 11년 동안 유상증자와 영업이익 등으로 조달한 현금 1조6천억원 가운데 무려 절반이 넘는 8800억원을 현대상선에 지원했다. 하지만 현대엘리베이터의 설비투자에 사용된 현금은 고작 1100억원 정도에 불과했다. 현대엘리베이터의 주주와 직원들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지원이었다.

전폭적 지원으로 현대상선의 기업가치가 올라갔다면 그나마 위안이 될지 모른다. 부실 계열사의 기업가치 상승은 그룹 안에서 시너지 효과를 낼 수도 있다. 하지만 현대상선은 끝내 부실을 털어내지 못하고 채권단 자율협약에 따라 산업은행으로 주인이 바뀌었다. 이로 인해 현대그룹의 ‘사세’는 크게 위축됐다. 현 회장의 시아버지인 고 정주영 회장이 경영하던 1987년에 국내 대기업 자산 규모 1위였던 현대그룹은 2016년 자산 규모가 전성기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한 2조원으로 축소돼 중견그룹으로 강등됐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멈추지 않는 경영권 집착증 </font></font>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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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에서는 현대그룹의 사세가 악화된 원인을 현 회장 중심의 견고한 지배구조 체제를 만드는 데 자원을 집중한 탓으로 본다. 총수의 경영권에 집중하다보니 각 계열사의 사세가 점차 약해진 것이다. 현대엘리베이터가 대표적이다. 현대엘리베이터는 국내시장에선 점유율이 44%에 이를 정도로 독보적이지만, 국내보다 더 큰 먹거리가 있는 국외시장에선 고전을 면치 못한다. 미국 시장조사 업체 리서치앤드마켓에 따르면 지난해 국외 엘리베이터 시장 규모는 약 996억달러(약 108조원)였는데, 현대엘리베이터의 시장점유율은 2%(9위) 수준으로 1위 오티스(약 12%)의 10분의 1에도 못 미쳤다. 업계 관계자는 “현대엘리베이터가 그동안 벌어들인 돈을 현대상선 지원이 아닌 설비 투자에 썼다면 지금 막강한 경쟁력을 갖췄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 회장의 경영권 집착을 현대가의 치열한 경영권 다툼에 대한 트라우마 탓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현 회장은 남편 정몽헌 회장이 2003년 숨진 뒤 그룹 회장에 취임했으나 곧바로 범현대가의 경영권 공격을 받았다. 정주영 회장의 여섯째 동생인 정상영 회장이 이끄는 KCC그룹이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확보에 나선 것이다. 5% 공시 위반(지분을 5% 이상 보유하면 공시해야 하는 규칙)으로 KCC의 현대엘리베이터 인수 시도가 무산된 뒤 2006년에는 시동생 정몽준 회장이 이끄는 현대중공업이 현대상선 지분을 인수하면서 경영권을 위협했다. 현 회장은 이를 막기 위해 현대상선 주식에 대한 다수의 파생상품 계약을 맺어 우호 지분을 확보했다. 하지만 파생상품 계약이 대부분 현대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상대 금융회사의 손실을 보전해주는 방식인 탓에 주주가치가 훼손됐고, 결국 우호 세력이던 쉰들러와 소송까지 벌이게 됐다.

하지만 현 회장의 경영권 집착증은 범현대가의 경영권 도전 위험이 사라진 뒤에도 멈추지 않았다. 이전까지는 경영권 도전에 대한 방어 성격이 강했으나 지금은 경영권 세습을 목적으로 한다. 방식은 재벌들의 단골 메뉴인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다. 현 회장은 두 딸과 아들이 70% 지분을 가진 비상장회사인 현대유엔아이의 유상증자에 현대엘리베이터를 참여시켰다. 이후 현대유엔아이가 물류사업을 위해 설립한 자회사인 현대무벡스에 현대엘리베이터의 물류사업부를 분리해 넘기도록 했다. 업계 관계자는 “총수 일가의 가족회사를 키우기 위해 우량 계열사의 사업 기회를 빼앗아 넘겨준 전형적인 일감 몰아주기”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현대그룹 쪽은 "현대무벡스에 물류사업을 넘긴 것은 현대유엔아이와 시너지 효과를 기대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모처럼 남북관계 훈풍 부는데… </font></font>

현대그룹에는 올해가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2018년은 금강산 관광을 시작한 지 20년이 되는 동시에 관광객 피살 사건으로 금강산 관광이 중단된 지 10년이 되는 해다. 때마침 북한의 평창겨울올림픽 참가 결정으로 남북관계에 모처럼 훈풍이 불고 있다. 남북관계 개선은 정주영 회장의 유훈인 대북사업을 전담하는 현대아산과 현대그룹에 희망적인 신호다. 하지만 현 회장을 둘러싼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아 보인다. ‘출가한 외아들’의 배신이 어떤 결말을 낳을지 재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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