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옛 삼성에버랜드)의 합병이 부당했다는 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옛 삼성물산의 지분 2.1%를 갖고 있던 일성신약 등이 합병에 반대한 뒤 삼성물산을 상대로 ‘주식매수청구권’(자신이 보유한 주식을 사달라고 청구할 권리)을 행사하면서 법원에 주식매수 가격을 결정해달라고 낸 사건의 항소심에서 지난 5월30일 서울고법 민사35부(재판장 윤종구)는 삼성물산이 승소한 1심 결정을 뒤집고 일성신약의 손을 들어줬다. 삼성물산이 산정한 1주당 5만7234원이 정당한 매수가격이 아니니 1주당 6만6602원에 주식을 매수하라고도 결정했다.
재판부는 삼성그룹이 두 회사의 합병으로 새로운 지주회사인 통합 삼성물산을 만드는 과정에서 나타났던 각종 의혹을 조목조목 짚으며 문제점을 지적했다. 법원 결정문에는 삼성그룹으로서는 뼈아픈 대목이 적지 않다.
“옛 삼성물산의 실적 부진이 이건희(삼성전자 회장) 등의 이익을 위하여 누군가에 의해 의도되었을 수도 있다는 의심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옛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인 국민연금공단의 옛 삼성물산 주식 매도가 정당한 투자 판단에 근거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의심을 배제하기는 어렵다.”
지난해 옛 삼성물산의 주주였던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엘리엇)와 소액주주들이 합병을 반대할 때만 해도, 삼성은 ‘탐욕스러운 외국 투기 자본의 공격’이라는 방어 논리를 폈다. ‘삼성 대 엘리엇’이라는 대결 구도가 짜이면서 합리적 의심과 정당한 문제 제기는 설 자리를 잃었다. 새로 출범할 지주회사에서 총수 일가의 지배력을 높일 목적으로 삼성물산의 주가가 의도적으로 낮게 관리되고, 최대주주인 국민연금공단이 주주로서의 이익을 훼손시키면서까지 삼성물산의 합병에 찬성해 총수 일가의 경영권 승계를 도왔다는 의혹 등도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제1072호 경제 <font color="#C21A1A">‘엘리엇 태풍의 잔해들’</font> 참조).
서울고법 결정문을 토대로 경제개혁연대와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이하 내만복) 등이 공개적으로 제기한 문제점 등을 종합해 옛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석연치 않은 점이 무엇이었는지를 질문과 답변 형식으로 다시 한번 짚어본다.
<font color="#006699"><font size="4">1. 삼성물산은 합병을 앞두고 주가와 실적을 관리했을까?</font></font>옛 삼성물산의 사업부문은 건설과 상사(무역)로 나뉘었다. 건설 부문이 매출의 52%, 영업이익의 87%(2014년 기준)를 차지하는 주력 업종이었다. 삼성물산 건설 부문은 2014년과 2015년 시공능력평가에서 모두 1위를 차지했다. 그런데 2015년 삼성물산의 주가 흐름은 좀 이상했다.
2015년 1월~5월22일(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을 결의한 이사회 이전의 마지막 거래일) 사이에 주요 건설사 주가는 적게는 16.4%부터 많게는 33%까지 상승했다(상단 그림2 참조). 당시는 금리 인하, 분양가 상한제 폐지 등에 힘입어 주택 매매 시장이 활기를 띠던 시점이다. 유독 삼성물산 주가만 ‘훈풍’과는 거리가 멀었다. 삼성물산 주가는 1주당 6만700원(2015년 1월2일 종가 기준)에서 5만5300원(2015년 5월22일 종가 기준)으로 8.9% 하락했다.
상장법인 두 회사가 합병할 때 합병가액은 합병을 위한 이사회 결의일 전날을 기준으로, 최근 1개월간 평균종가 등을 따져 정한다. 삼성물산 이사회 결의(2015년 5월26일) 이전 한 달 동안 주가 흐름에 따라 합병가액이 달라진다.
특히 옛 삼성물산의 주가는 되도록 낮게, 제일모직의 주가는 되도록 높게 형성돼야 할 이유도 존재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이재용 부회장 등은 옛 삼성물산 지분을 1.41%밖에 보유하지 않은 반면, 제일모직 지분은 42.19%나 갖고 있었다(하단 그림1 참조). 통합 삼성물산의 지분 보유율이 높아지려면 최대한 삼성물산 주가가 낮게 형성되는 편이 유리했다는 뜻이다.
또 총수 일가 입장에서 그룹 전체 지배력을 확대하려면, 삼성전자 지분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은 제일모직보다는 삼성전자 주식 4.06%를 소유한 삼성물산 지분을 흡수하는 일이 요긴했다. 결국 삼성물산 주식 1주는 제일모직 주식 0.35주랑 같은 가치를 갖고 있는 것으로 합병 비율이 정해졌다.
옛 삼성물산은 2014년 말부터 수주 실적도 부진했다. 2015년 상반기 다른 건설사들이 주택 공급을 늘리고 있을 때, 삼성물산은 상반기 신규 주택을 300여 가구만 공급하는 데 그쳤다. 대형 신규 수주도 없었다. 주관하던 공사 가운데 일부는 삼성엔지니어링으로 넘기기까지 했다. 하지만 합병 결정이 내려진 뒤로 태도가 갑자기 달라졌다. 2015년 7월 ‘하반기 서울 8곳에서 총 1만994가구의 아파트를 공급할 예정’이라고 밝히고, 5월에 공사대금 2조원가량의 카타르 복합화력발전소 공사를 수주했다는 사실도 7월 말에야 공개했다.
이같은 정황을 종합해 서울고법 재판부는 “시장가격(주가)이 실제 삼성물산의 기업 가치와 일치하지 않는다. 또 옛 삼성물산의 주가 하락과 관련해 이해관계자(총수 일가) 쪽에 유리한 거래 행위 등이 존재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실적 부진도 이건희 등의 이익을 위해 의도되었을 수 있다는 의심이 든다”고 판단했다.
국민연금은 단일 주주로는 옛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다. 2015년 3월26일 기준으로 삼성물산 주식 중 11.43%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삼성물산 이사회가 합병을 결의하기 직전까지 2개월여간 계속 주식을 팔아, 보유 비율이 9.54%로 줄었다. 반면 국민연금이 갖고 있던 제일모직 주식은 같은 기간 동안 5% 미만에서 5.04%로 늘어났다.
이사회 합병 결의 이후, 국민연금은 이전과는 반대로 움직였다. 지나치게 주가가 오른 삼성물산 주식을 사들이고, 주가가 떨어진 제일모직 주식을 팔아서 삼성물산 주식 보유 비율을 높인 것이다. 일반적인 투자 원칙에는 어긋난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간 합병을 찬성한 결정도 납득하기 어렵다. 국민연금은 2015년 합병이 안건으로 올라 있는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었다. 주주총회에 참석한 83.57%의 주주 가운데 69.53%가 ‘찬성’표를 던져 합병안이 가결됐는데, 11% 넘는 지분을 보유한 국민연금이 ‘반대’표를 던졌다면 의결정족수 미달(출석한 주주 의결권의 3분의 2 미달)로 합병 안건이 부결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 지침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기금운용본부에 설치한 투자위원회의 심의·의결을 거쳐 의결권을 행사해야 한다. 특히 기금운용본부가 입장을 정하기 곤란한 안건은 ‘주식 의결권행사 전문위원회’에 결정을 요청하거나, 외부 의결권 전문기관에 자문할 수 있다. 국민연금은 전문위원회에 결정을 요청하지도 않았고, 서스틴베스트·글래스루이스 등 외부 전문기관의 ‘반대’ 자문 의견을 무시한 채 ‘찬성’표를 던졌다.
서울고법 재판부는 “국민연금이 합병 전 삼성물산 주식을 지속적으로 매도한 것이 삼성물산 주가를 하락시키는 데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투자 행태, 주주총회 의결권 행사에 관한 방침 결정 과정 등으로 볼 때 국민연금의 주식 매도가 정당한 투자 판단에 근거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의심을 배제하기는 어렵다”고 지적했다.
‘내만복’은 6월2일 내놓은 논평에서 “법원이 제시한 주식매수 가격으로 합병 비율을 재산정할 경우, 국민연금이 766억원 손실을 입은 반면 이재용 부회장 등 삼성 총수 일가의 지분 가치는 4626억원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법원이 제시한 6만6602원을 기준으로 하면, 합병 비율이 제일모직 1주당 삼성물산 0.418주로 변경되고 국민연금이 보유한 통합 삼성물산의 지분 가치가 1조7932억원에서 1조8698억원으로 높아진다는 추정(2015년 9월15일 종가 기준)이다. 같은 조건을 적용하면 삼성 총수 일가의 통합 삼성물산 지분율은 30.42%에서 28.88%로 낮아진다.
‘내만복’은 “의도적인 주가 낮추기로 총수 일가가 4천억원이 넘는 부당이익을 챙겼다. 비상식적인 투자 행태를 보이고 규정에 따른 논의 절차도 생략해 국민연금에 손실을 끼친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에게 철저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홍완선 전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은 삼성물산 주주총회 2주 전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만난 사실이 밝혀져 지난해 국정감사 때 질타를 받은 바 있다.
<font color="#006699"><font size="4">3. 서울고법 결정의 파장은 어디까지 미칠까? </font></font>일단 이번 법원의 결정으로 옛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자체가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옛 삼성물산이 산정한 1주당 5만7234원이라는 매수가격을 2014년 12월18일 시장가격 기준으로 정한 6만6602원으로 올려서 일성신약에 지급하라는 게 결정문의 취지다. 삼성물산이 추가로 부담해야 하는 돈은 350억원 안팎이다. 엘리엇은 일성신약과 같은 취지의 사건을 법원에 냈다가 지난 3월 사건을 취하했다. 삼성 쪽과 비공개로 매수가격을 조정해 합의했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이 불공정했다는 의심이 정당하다는 점을 법원이 확인해준 만큼, 이번 결정의 파장이 쉽게 사그라들지 않을 수 있다. 경영권 승계를 위해 삼성이 편법을 동원한다는 불명예스러운 꼬리표도 계속 달리게 됐다.
삼성 쪽은 곤혹스러워하는 분위기다. 지난 6월1일 아침 ‘수요 사장단 협의회’에 참석한 최치훈 삼성물산 사장은 “1심과 2심이 다르지 않냐. (법원 결정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재용 부회장은 이날 오후 서울 중구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호암상 시상식에 참석했지만, 기자들의 관련 질문에 답하지는 않았다. 삼성 쪽은 재항고해서 대법원의 최종 판단을 받겠다는 태도다.
일성신약은 이번 사건 외에도 삼성물산을 상대로 합병 무효 소송을 내놓은 상태다. 하지만 이번 결정이 ‘비송 사건’(민사 사건 중 특정 쟁점에 대해서만 법원이 신속하게 결정을 내리는 비소송 형태의 사건)이어서 법원의 직권 해석 여지가 많았던 만큼, 합병 무효 소송에서도 비슷한 판단이 나올지는 결과를 지켜봐야 한다는 게 법조계 안팎의 시각이다.
금융 당국이나 검찰이 나서지 않는 이상, 삼성물산 경영진이나 국민연금 관계자들에게 배임 혐의를 적용해 형사고발하거나 민사소송을 제기하는 후속 조처도 현재로서는 쉽지 않아 보인다. 결정문에 담긴 정황증거만 있을 뿐, 결정적인 입증 자료가 없는 탓이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은 “형사고발이나 추가 소송 등 앞으로 어떤 추가 조처를 취할지는 좀더 지켜보겠다”고 말했다. ‘내만복’은 삼성물산 합병 과정에 대한 국회 청문회를 요구했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카카오톡에서 을 선물하세요 :) <font color="#C21A1A">▶ 바로가기</font>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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